16화
흠흠 헛기침을 하고 다시 분위기를 잡은 그가 다시 설명했다.
“모든 게임의 마지막 콘텐츠는 바로바로…! 뉴비 육성하기! 즉! 뉴비세스 메이커입니다!”
희연은 그 말에 눈만 깜박이다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했다.
“와, 그렇구나.”
그 말 외에 무슨 말을 더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희연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말했다.
“저희는 생각했습니다. 더딘 업데이트. 이미 다 깬 콘텐츠. 이대로 매일 반복되는 일퀘와 의미 없는 제작 스킬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아하.”
“그래서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보통 생각이 거기까지 튀나?
“우리끼리 대회를 열고, 우리끼리 공성전을 벌였지만 사실 이쯤 되면 그 나물에 그 밥이라 다 아는 사이죠. 허구한 날 같은 얼굴 보는 게 재밌을 리가 없잖습니까!”
이쯤 되니 왜 캐릭터 생성구역에 고인물들이 바글바글했는지 알 것 같았다. 뉴비 없지는 그런 희연의 생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원한다는 마음으로 새 콘텐츠를 만들었습니다!”
“…….”
“그것이 바로 뉴비세스 메이커. 겨우 뉴비 정착 지원 안내자나 하는 다른 놈들과 달리 완벽하게 단 한 명의 뉴비에게 집중하는 일인 맞춤 콘텐츠!”
“…와.”
“그래서 길드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공했습니다. 바로 뒤쪽에 계신 길드장 님이 우리의 뉴비세스 메이커 1기이십니다!”
“…….”
희연은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요정님은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좀 지겹다는 듯한….
“그러나 모든 콘텐츠에는 끝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뽀쨕하던 길마님은 너무나 잘 커버려 우리를 버스 태울 수준까지 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비통한 얼굴을 했다. 너무나 잘 커서 고맙지만 아쉬움을 안겨준 그들의 길마를 보면서.
엔딩을 봤으니 이번에는 새로운 루트의 엔딩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도 슬그머니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새 엔딩을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새로운 뉴비!”
“그래서… 새로 찾은 뉴비가 저예요?”
“네!”
“…….”
“저희랑 같이 게임을 하시면 즐거움을 보장해드릴 수 있습니다. 뭐든 지원 가능합니다! 탱커부터 딜러, 요리사, 농부도 있어서 어떤 아이템이든 지원 가능하고요!”
“…우와.”
“설산 가서 순록이 이끄는 썰매도 태워 드릴 수 있고 드래곤도 색깔별로 태워 드릴 수 있고! 21세기 현대 문물을 선호하신다면 리무진도 태워 드릴 수 있습니다!”
왜 탈것에 저리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드래곤은 좀 기대됐지만.
“저희가 완벽하게 키워 드릴 수 있습니다, 뉴비님! 우리의 새로운 길마가 되어주세요!”
그의 말에 희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뉴비세스 메이커 1기이자 현 길마께선 희연에 시선에 그냥 웃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 희연처럼 얼떨결에 이곳에 와 얼떨결에 키워지고 얼떨결에 길마까지 된 듯싶었다.
그는 말 몇 마디로 제 자리를 뺏길 위기에 처했는데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희연은 일단 말을 아꼈다. 짧지만은 않은 현생에서도, 짧은 겜생에서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뭐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는… 아니, 일단 그렇게 막 열정적으로 게임을 하려고 한 건 아닌데요….”
“라이트 유저시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의 찬란한 뉴비 키우기 전적! 라이트부터 하드까지 맞춤으로 키워 드립니다! 저를 믿으세요!”
“아뇨. 라이트 유저도 아니고 저는 그냥… 힐링 게임인 줄 알았거든요.”
“…힐… 링도 자신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이 아름다운 온실! 저희가 또 힐링에 일가견이 있습니다앗!”
어떤 말에도 지지 않는 저 열정과 자신감을 보라. 만일 그가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면 학부모의 마음을 매번 뒤흔들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열정인 걸까.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남 도와서 뭐 남는 게 있는 걸까?
희연은 결국 궁금해서 물었다.
“…그런데 뉴비를 많이 키워보셨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 뭐 남는 게 있나요?”
“여러분이 남습니다.”
“…….”
그는 희연과 요정님을 차례로 가리켰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사실 길드에 들어가는 건 별 상관없기는 했다. 보아하니 다른 길드원 전부가 희연을 반기는 분위기이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면 길드에 속하는 것도 좋다 생각하는 것이, 희연이 이미 맛본 고인물의 지혜가 꽤나 달달했기 때문이다. 또한 길드 없는 서러움을 그녀는 이미 맛보았다.
눈 뜨고 설탕 제비꽃을 뺏겨야만 했던 그 상황! 에흐테를 강탈당할 뻔했던 그 상황!
일단 길드가 있다면 그런 걱정을 훨씬 줄어들 것 같았다. 그리고 이미 여기까지 와서 좋은 정보 다 듣고 싫다고 하는 것도 좀 그랬다.
저들을 버스 태워줄 정도로 잘 컸다는 뉴비 1기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길드이기는 하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적인 것 포함해 여러 가지로.
짧은 고민 끝에 희연은 말했다.
“갑자기 길마 자리 떠넘기거나 하지 않으면… 길드에 들어갈게요.”
조금 아쉽기는 했으나 뉴비 없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길마 엔딩을 보았기에 수긍이 빨랐다.
곧이어 희연의 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길드 <뉴비세스 메이커>에 가입하시겠습니까?]
희연은 곧바로 수락을 눌렀다. 반짝거리는 은색의 빛줄기가 날아오더니 백색 나무 브로치로 변해 희연의 옷에 고정되었다. 이 길드의 문장인 듯싶었다.
그것을 더듬자 온갖 알림이 띠롱띠롱 울렸다.
[길드 <뉴비세스 메이커>에 가입했습니다.]
[현 길드의 순위는 4위입니다.]
[총인원 수는 7명입니다.]
[<내가 바로 이 구역 신입입니다!> 업적 달성]
[업적 효과 : 기관에 소속된 막내들에게 동질감을 얻습니다.]
“4위?”
이 인원으로? 아니 애초에 길드 하우스가 이렇게 큰데 왜 일곱밖에 없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희연의 중얼거림을 들은 킹스메이커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오페라 칭호만 넷이라 그래요. 정확한 계산법은 모르지만… 오페라 칭호에 속한 명성 스텟이 높아서 그런 걸 거예요.”
아무래도 희연이 생각한 것보다 더 대단한 인물들이었던 듯싶다. 너무 비범해서 이상한 쪽으로 발전한 건가 싶을 정도로.
“그런데 왜 인원수가 적은 거예요?”
그녀는 이 길드가 최소 몇십, 몇백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성이 크니 기본 인원도 많을 것이고, 뉴비 키우기를 즐기니 데리고 온 이들도 많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그건. 메인으로 키우는 게 아니면 다 잘 키워서 보내 드렸거든요.”
그렇게 보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궁금했다. 그중 하나가 아닌 것이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긴가민가했다.
“자! 그러면 자기소개를 해볼까요? 마침 다 있으니까 인사 나누면 되겠다!”
가장 먼저 자신을 소개한 것은 이야기를 꺼낸 킹스메이커 본인이었다.
“일단 저는 알다시피 ‘21세기 킹스메이커’고요. 전에 말한 것처럼 킹스메이커나 짧게 킹이라고 부르면 돼요. 부길마고 직업은 마법사예요!”
부길마였구나….
아마도 희연이 이 길드에 오게 된 과정에 킹스메이커의 입김이 강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뉴비라고 하면 그게 누구든 그냥 다 좋은 길드였지만 다행히도 희연은 진실을 몰랐다.
“저는 ‘느그 집에는 뉴비 없지’입니다! 아까 말한 대로 성기사고 길드의 또 다른 부길마죠! 편한 대로 부르세요!”
편한 대로 부르라고 했지만, 뭐라 불러야 할지 짐작 가지 않는 닉네임이었다. 그런 희연을 도와준 것은 킹스메이커였다.
“모르겠으면 그냥 부길마라고 부르세요.”
그럼 되겠다. 부길마는 둘이었지만 그와는 달리 킹스메이커는 부를 만한 닉네임이었다. 그러나 그는 삭막하다며 그 호칭을 싫다 했다.
그에 킹스메이커는 귀찮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뉴비 없지.”
“나에게는 뉴비가 둘이나 있다! 그러니 뉴비 있지, 라고 불러주세요!”
희연은 그의 간절한 외침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뉴비 없지는 기뻐했다. 그다음으로 자신을 소개한 것은 요리사 복장을 한 남자였다.
“‘내 왼손의 흑염소’라고 해요. 그냥 흑염소라고 부르시면 돼요. 직업은 알다시피 요리사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세요!”
“화염방사기로 요리하는 건가요?”
“즉석 직화구이 할 때는요.”
그 즉석의 의미가 사냥과 동시에 음식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의미인가 싶었다.
흑염소 다음으로 자신을 소개한 것은 킹스메이커가 말한 오페라 칭호 소유주 중 하나인 검은 정장 차림의 여자였다.
“‘우리 강아지는 초코 나는 청산가리’라고 해요. 청산가리나 초코로 부르시면 되고. 직업은 암살자예요.”
희연은 고민하다 초코로 호칭을 정했다.
“저는 ‘귀농을 해보자’고요 남들 부르는 것처럼 귀농이라고 부르면 될 것 같네요. 아, 그리고 직업은 농부입니다.”
당장에라도 그늘에 앉아 새참을 찾을 것 같은 복장의 남자는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다. 희연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미는 귀농과 악수를 하고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눈오리의 돌격’이고요… 눈오리나 오리라고 불러주세요. 아직 직업은 없어요.”
차례로 닉네임을 들었더니 뭔가 마음이 편해졌다.
희연의 시선은 에흐테와 친분을 나누고 있는 이 길드의 길마에게로 넘어갔다. 그는 에흐테의 갈기를 쓰다듬어 주던 것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Nick’이라고 해요. 직업은 테이머고 일단은… 하는 일은 없지만, 이 길드의 길마예요.”
역시 강제로 앉혀진 자리였나 보다. 희연은 그에게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인사가 끝나자 킹스메이커가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테이블 위로 다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우리 오리 님의 직업을 뭐로 할까 고민의 시간을 가져볼까요?”
아, 맞다. 그것 때문에 왔던 거지.
희연은 뒤늦게 이곳에 온 초기의 목적을 상기했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직업 교육을 들으러 왔다 길드 가입을 하고 말았다. 요상한 결말이었다.
그들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어떤 직업이 좋을까 함께 고민해 주었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귓속으로 쏙쏙 들어오는 것이 고인물의 맞춤 설명은 과연 탁월했다.
“상대를 방심시켰다가 한 방 먹이고 싶으면 제작 직업이 좋죠. 딜 잘 나오면서 빠르게 싸우고 싶으면 킹처럼 마법사하고 근접 무기 드는 것도 추천합니다.”
“대신에 피 관리를 잘해야 해요. 운동신경 좋으면 추천하고 싶은데. 아니면 혹시 따로 취향인 직업 있나요?”
킹스메이커의 질문에 희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낫을 든 마법사와 화염방사기를 든 요리사. 평온하게 유니콘과 놀고 있는 닉까지.
“…저는 평화로운 직업을 선호합니다.”
희연의 말에 이번에도 새로운 뉴비를 얻고만 뉴비 없지가 첨언을 했다.
“평화로운 것 중에는 힐러가 최고죠. 평화롭게 보호받다가 살려달라고 빌면 그때 힐 해주는 역할이니까요. 갑질해도 모셔가야 하는 파티의 꽃이죠.”
“…….”
언제부터 힐러의 정의가 저거였는지 모르겠다.
“사실 굳이 따지면 신전 쪽 직업이 대체로 평타는 친다고 봐야 하죠. 힐러나 성기사나. 하나는 갑 중의 갑이고 다른 하나는 적폐니까요.”
뉴비 없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킹스메이커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신전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어서 직업퀘 같은 것도 잘 되어 있거든요. 많이들 하니까 공략법 같은 것도 찾기 쉽고. 마법사 같은 경우에도 마탑이라는 뒷배가 있기는 하지만….”
말을 흐리던 킹스메이커는 중간에 한숨을 내쉬었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 너무 명확한 곳이라서요.”
일단 마법사는 하지 말아야겠다. 그나마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건 힐러 정도였다.
성기사와 힐러 중 누가 더 욕 잘 먹냐는 질문에 성기사라는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네가 힐을 안 줘서 죽었어, 보다는 그렇게 힐 받고도 살아남지 못한 네가 문제다 이런 반응이 대부분이죠.”
“원래 힐러가 더 욕먹는 직업 아닌가요?”
“원래는 그런데, 그쪽 랭커 애 하나가 분위기를 잡아놔서요. 렙 낮을 때는 힐러가 욕먹지만 어느 정도 고렙존에 들어가면 힐러는 언제나 갑이죠.”
어쨌든 그녀가 들고 온 파브넷의 특별 추천장으로는 웬만한 직업은 다 얻을 수 있다는 확언과 함께 희연은 상당히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대강 가닥이 잡히는 듯했지만, 확실히 내린 결론은 제작 직업은 하지 않겠다 정도였다. 그녀는 뭐 만들고 인내심을 가지는 쪽으로는 이골이 났다. 그건 카페 알바로도 충분했다.
“그러면 일단 도시로 돌아가서 전직부터 할까요?”
희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의 뒤를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 그리고 닉이 따라왔다.
희연은 그 조합이 의외이면서도 제법 적절히 섞였다고 생각했다. 뉴비에 미친 사람과 적당히 미친 것처럼 보이는 사람. 그리고 적절한 범위 내에서 친절한 사람.
사실 이렇게 두고 보면 닉 홀로 정상인 포지션인 것 같았지만 두 부길마가 뉴비 1기를 제법 끔찍하게 여기는 듯하니 적절한 브레이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길드 하우스에 오고 싶으면 귀환 스킬을 쓰면 된다는 설명을 들으며 희연은 길드원들과 친구를 맺었다. 텅 비었던 친구 창에 개성 가득한 이름이 나열한 것을 보니 괜히 뿌듯했다.
“저 안쪽에 포탈기가 있으니 그걸 타고 에빌론으로 돌아가면 돼요.”
포탈기로 갈 수 있는 목록을 훑는 희연에게 킹스메이커는 이 주변 지리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포탈기가 있어서 다행이죠. 길드 하우스에서 에빌론으로 걸어가려면 최소 일주일은 각오해야 하거든요. 물론 중간에 죽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그 말을 들으며 희연은 새삼스레 길드 가입해서 다행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포탈기는 길드원만 사용할 수 있다고 뜨는데…? 만약 가입하지 않았으면 돌아갈 때….
거기까지 생각하던 희연은 고개를 돌려 킹스메이커를 보았다. 순해 보이게 커스텀 된 눈매에도 불구하고 빙그레 웃는 그녀의 얼굴은 뭔가… 흑막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