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직업은 혈연, 지연, 학연』
광장에 설치된 포탈기에서 나온 희연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길드 하우스에서 느껴지던 숲의 지저귐이 아닌 활발한 유동 인구들이 들려주는 소음이었다.
킹스메이커는 마치 모든 것이 낯선 관광객을 상대하듯 희연에게 이것저것을 설명해 주었다.
이미 행정지구와 함께하는 즐거운 에빌론 방문기 시간을 보냈다는 점을 고려해서인지 그녀는 주로 레이가 알려주지 않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저쪽으로 가면 뒷골목이라는 구역이 나와요. 정보 길드와 암살 길드가 있죠. 그리고 암시장이 열리는데-.”
“…우와.”
비록 조금은 불법적인 냄새가 나고 내용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유용한 정보이기는 했다.
반복되는 희연의 영혼 없는 감탄사에 가만 서서 에흐테를 쓰다듬어 주고 있던 닉이 그녀에게 말했다.
“일단은 전직부터 할까요?”
“네!”
격하게 동의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웃어주었다. 참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또한 오페라 칭호의 소유자라고 했다.
직업은 테이머라 했고. 혹시 칭호도 직업과 관련이 있는 걸까. 희연은 그와 지나치게 친밀감을 올려 버린 에흐테를 보며 생각했다.
동물 관련 칭호이려나….
호감도 –3% 유니콘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려 볼 때 닉은 동물 친화 쪽 능력이 발달했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온실 정원에서 본 동물들도 그의 친구들일지도 몰랐다.
테이머…. 테이머도 괜찮지 않을까?
동물들과 함께하는 즐겁고 평화로운 힐링을 상상하던 희연은 곧이어 이어지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면 일단은 어디부터 가볼까요?”
적극적인 음성의 주인은 뉴비 없지였다. 희연이 그의 말에 막 전직관들이 있다는 건물을 살펴보려는 순간 눈앞에 예상 못 한 알림이 떠올랐다.
[사막여우의 호의 시작!]
“…사막여우의 호의?”
“악! 빨리 주변 살펴봐요, 오리 님!”
희연의 중얼거림을 들은 뉴비 없지가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킹스메이커의 얼굴에는 낭패가 서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리 님 여우 퀘로 유니콘 데리고 갔었죠.”
“어, 네….”
“여우의 호의는 캐릭터 성장 방향을 알려주는 특전이에요. 혹시 주변에 뭐 좀 이상한 거 안 보여요? 바닥이 사막화됐다든가 거대한 나무가 자랐다거나….”
희연은 다급한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런 희연의 시야에 남다른 것 하나가 포착되었다. 잘 포장된 길에 피어난 장미 덩굴이었다.
“저기 장미가 있는데….”
“여우가 주는 특전 힌트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아요. 혹시 장미가 이어져 있거나 하면 특전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따라가야 해요!”
킹스메이커의 말에 희연은 서둘러 장미를 따라 뛰었다. 시간제한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장미는 벌써 그 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벌써 사라지고 있는데 어떻게 해요?”
안타깝게도 희연의 민첩은 초보자 치고 높은 거지 평균적으로 따지면 그리 높지 않았다.
이렇게 떠먹여 주는 기회를 놓쳐야 한다니!
희연은 마지막 발악으로 외쳤다.
“에흐테!”
“도시에서 탈것 금지!”
발악은 발악으로 끝났다. 희연이 절망하며 숨을 몰아쉬고 특전을 포기하려는 찰나 누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낚아챘다.
“으어?”
“어느 방향이에요?”
발이 둥실 떠올랐다. 희연은 반사적으로 사라지는 장미의 끝을 가리키며 이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바람에 휘날리는 종이 인형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그런 희연을 붙잡은 건 닉이다. 그리고 그들은 볕뉘로 이루어진 것 같은 거대한 새를 타고 날고 있었다.
판단을 마치자마자 그녀의 시야가 180도로 돌아갔다. 가구가 밀집된 구역으로 들어서자 빛의 새가 몸을 틀며 빙글 돌았기 때문이다.
희연은 허리에 둘린 닉의 팔을 움켜쥐며 간절히 말했다.
“저 놓치지 말아주세요!”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저 초보! 레벨도 없는 초보! 싸움꾼 토끼한테 뒷발로 세 대 맞으면 피 18밖에 안 남는 뉴비!”
하찮기 그지없는 피통을 소유한 뉴비를 위해 닉은 친절한 어조로 말했다.
“힘 스텟 높아서 괜찮아요.”
그것참 안심되는 말이었다.
“근데 탈것 금지라고….”
“스킬이에요, 이거.”
“스킬은 써도 되는 거예요?”
“…….”
침묵이 답으로 돌아왔다. 이것도 불법이구나?
희연은 골목골목 사이로 사라져 가는 장미의 행방을 가리키며 뒤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도시보다는 숲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닉께서 말씀하셨다.
“괜찮을 거예요.”
퍽이나. 그러나 희연은 애써 그의 말마따나 괜찮을 거라 자신을 위로하며 장미를 쫓았다.
도시를 빙빙 돌고 벽을 타고 오르는 장미 탓에 아찔한 스카이다이빙까지 경험한 끝에 활짝 피어오른 장미 한 송이가 희연의 손에 잡혔다.
“여기는….”
“신전이네요.”
내내 잡혀서 오느라 욱신거리는 배를 문지르며 희연을 건물을 살펴보았다. 10% 정도 피가 닳았다는 알림은 덤이었다.
고아하고 성스러운 건물, 그 주변을 배회하는 많은 유저와 천천히 걸어오는 에흐테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
눈을 끔벅이는 희연을 보며 닉은 말했다.
“…….”
“…여우의 장난질에 걸렸네요.”
빙빙 돈 끝에 우리는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희연이 기념품처럼 들고 있던 장미 한 송이는 에흐테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신전이면 성기사, 아님 신관인가?”
킹스메이커가 분함에 발을 구르는 희연의 등을 쓸며 말했다. 닉이 소환했던 빛나는 새는 사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라진 뒤였다.
“낚이기는 했지만, 여우가 주는 특전은 정말로 좋아요. 꼭 그 특전을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부터 볼까요?”
“…네.”
달래는 어조에 희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뭐가 됐든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녀는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애당초 나쁘지 않다 생각했던 직업 중에 힐러도 있었으므로,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그렇게 자신을 달랜 희연의 인내심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게임의 신관들이 으레 그렇듯 아무것도 없는 신전의 입구를 빗자루로 쓸던 NPC가 그들의 출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죄지으신 분들께선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저 죄 안 지었는데….”
희연의 반박에도 신관은 단호했다.
“도시에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자행하셨지 않습니까. 죄를 부정하는 것은 더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닉에게로 향했다. 그는 슬쩍 뒤로 물러나 희연의 일행이 아닌 척을 했다. 그러나 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방조도 죄. 동조도 죄.”
같이 새를 타고 다닌 희연도 죄요, 그것을 지켜보다 못해 힘내라고 등 떠밀어준 부길마들도 죄라는 뜻이었다. 유일하게 죄가 없는 것은 에흐테였다.
잠시 고민하듯 눈을 굴리던 킹스메이커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인벤토리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신관의 손에 쥐여주었다. 신관은 동그래진 눈으로 외쳤다.
“아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를 뭘로 보시고, 뇌물 따위를 제가 받을 것 같습니까?”
희연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괘씸죄까지 더해지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괜한 걱정이었다.
신관은 신실한 얼굴과 그렇지 못한 손으로 주머니를 열어보고 있었다. 입으로는 이럴 수 없다, 없다, 외치면서 눈으로는 액수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형제님. 형제님의 불경함에 머리가 아파지는군요. 저는 이만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신관은 그대로 주머니를 꼭 끌어안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부패한 종교….”
희연의 말을 분명 들었음에도 킹스메이커는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자 이제 그만 들어가 볼까요?”
정말, 정말 괜찮은 걸까 이 게임?
킹스메이커는 에빌론의 NPC는 대부분 예의 있고 정의롭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주머니를 손에서 놓지 않는 모습 그 어디에서도 그녀가 말한 모습은 엿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당장에 중요한 것은 여우의 호의지 부패한 종교가 아니었으므로 희연은 그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신전 쪽 직업을 얻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런 희연의 상태를 아는 것인지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부길마들은 활짝 웃는 얼굴을 했다. 그녀 또한 일단은 그들을 따라 신전 안에 들어섰다.
흰색과 금색 일색인 신전은 따스하면서 신성한 기운을 품은 곳이었다.
붉은 융단과 하얀 석조. 육각형의 기둥이 가로수처럼 늘어진 고아한 신전은 벽에 걸린 테피스트리가 아름답고 수수해서 신전의 필수인 경건함과 겸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손수 만든 테피스트리 외에는 은근한 부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얗게 보이던 석조에는 섬세한 음각이 새겨져 있었고 애당초 금색은 그냥 금이었다.
희연은 조금 전의 모습과 레이와 함께 봤던 장인 거리의 풍경을 떠올리며 신전이 부를 유지하는 방법을 납득했다.
매번 그런 식으로 기부금을 벌어들였다면 이런 건물 수십 채를 뚝딱뚝딱 만들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저기 저 두 사람이 전직을 시켜주는 NPC예요.”
킹스메이커가 희연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흰색 일색의 복장을 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하얀 갑옷을 입은 자와 목까지 올라오는 조금은 갑갑해 보이는 하얀 옷을 입은 자. 성기사와 신관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위로 색색깔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 유리 천장을 통해 눈부신 햇살이 스며들었다. 하얀 옷이 색 있는 햇빛에 물들었다.
바로 옆에 있는 킹스메이커라든가 조금 전 신관이라 할지라도 저 장소에 서 있으면 타락 따위는 모르는 선한 자처럼 보일 정도로 성스러운 분위기였다.
뉴비 없지는 잽싸게 앞으로 튀어 나가더니 갑옷을 입은 자에게 친한 척을 했다.
“아이고, 선배님!”
성스러운 분위기는 그렇게 끝났다.
“아니, 이게 누군가! ‘느그 집에는 뉴비 없지’ 아닌가? 간만에 보는군! 그 이상한 이름도 여전해, 이 친구!”
신관은 떠들썩한 두 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기울였다. 눈에 떠오른 것은 의아함이었다. 성기사는 뉴비 없지의 어깨를 툭툭 치며 신관에게 인사시켜 주었다.
“이 친구가 바로 신성 무대 축전극의 주인공일세!”
“아! 형제님께서 바로 그분이셨군요.”
“아유, 제가 뭐 유명한 사람이라고요!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오리 님의 직업을 찾기 위해 왔는데 잘 좀 부탁드립니다.”
“그대의 부탁인데 당연하지!”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있다. 직업은 혈연, 지연, 학연. 그리고 눈앞에는 바로 그 지연의 결과물이 놓여 있었다.
희연은 게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실을 바라보며 그냥 웃었다. 왜 닉이 매번 그냥 웃음으로 모든 답을 넘겨 버리는 것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온화한 인상의 신관과 우직한 성기사는 희연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래. 그래서 그대는 둘 중 어디를 희망하지?”
“어… 저는….”
사실 생각 안 했는데.
내심 힐러 쪽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힐러로 결정지은 것은 아니었다. 성기사와 달리 힐러는 실제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희연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도움을 요청했다. 노련한 뉴비세스 메이커 뉴비 없지는 곧바로 세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우리 오리 님이 아직 직업에 대해 잘 몰라서요. 그래서 말인데 여기서 잠깐 구경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 보여줘도 될까요?”
“뭐… 안 될 것은 없다만.”
“역시 우리 선배님! 아주 호탕해! 멋있어! 크윽! 설렌다, 아주!”
“아부 그만 떨게. 이 친구도 참!”
뉴비 없지. 그는 참된 사회인이었다. 뭐가 됐든 희연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그들은 전직관들이 서 있는 곳이 아주 잘 보이는 구석에 앉아 누군가가 전직을 하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
다행히도 얼마 안 있어 두 명의 남자가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멀뚱멀뚱 앉아 있는 희연의 일행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다 곧바로 신관에게 말을 걸었다.
“힐러… 아니, 신관으로 전직하고 싶습니다.”
과정은 간단했다. 신관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이마에 손을 올릴 때 눈을 감고. 하얀빛의 문장이 머리 위에 피어오르는 것으로 전직은 완료되었다.
자동인지 그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장비가 저절로 가벼운 가죽 갑옷에서 어떻게 봐도 초보 신관을 위한 장비로 바뀌었다.
그러자 벽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신관들이 천이 덮여 내용물은 볼 수 없는 트레이를 쥐고 가까이 다가왔다.
“무기를 골라주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하얀 천이 걷어졌다. 그곳에는 온갖 무기들이 나열해 있었는데, 웬만한 종류의 것들은 다 있다 자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희연의 시선은 그중에서도 채찍이라던가, 도끼라던가 눈에 띄는 것을 향해 있었지만 이제 막 신관이 된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침착한 얼굴로 망설임 없이 지팡이를 선택했다. 그 모습을 본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가 말했다.
“클래식하네.”
“안정적이지.”
그리 작은 목소리는 아니었기에 다른 이들도 듣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물론 무기를 고르고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신관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은 왜 저기서 저를 구경하는 거예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돌아오는 답이 다소 차가웠다.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다 지팡이를 이리저리 휘젓기 시작했다. 함께 온 일행은 친구였는지 그런 남자를 보며 이것저것 말을 해주었다.
“힐이랑 축복 스킬 있을 거야. 대충 나한테 한 번씩 걸어봐.”
남자는 곧바로 지팡이를 들었다. 환한 빛이 폭죽처럼 퍼지는 것이 보였다.
“지팡이의 장점은 원거리라는 점이죠.”
킹스메이커가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고 꼭 원거리라는 건 아니지만.”
“…?”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얼마 안 있어 알 수 있었다. 남자가 제 지팡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제 친구의 머리를 후려친 것이다.
“야, 이거 때리는 것도 힐로 쳐줘!”
“그래? 잘됐네. 내가 그 지팡이로 너를 삐약, 짹짹 팰 거거든.”
두 사람은 사이좋게 신전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