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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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락시아에 미리 와있던 희연과 뉴비 없지는 뒤늦게 온 킹스메이커와 닉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밖으로 나오게 된 에흐테 또한 닉을 보며 반가움의 의미로 눈을 깜박였다.
뉴비 없지는 곧바로 달려나가 킹스메이커의 손을 붙잡더니 덩실덩실 춤추며 말했다.
“이건 되는 퀘스트야. 진짜 큰 건이야!”
“뭐 좋은 정보라도 얻었나 봐? 우리는 허탕이었는데.”
작은 키 때문에 뉴비 없지에 의해 반쯤 날아다니던 킹스메이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닉은 가까이 온 아타락시아의 주인에게 주문을 하고 있었다.
“릴리아 주교가 헬르벨의 이름을 듣자마자 기겁을 했어. 우리 보고 쓸데없이 힘 빼지 말라는 투로 협박까지 했다니까!”
“그래? 근데 이제 좀 내려놔. 어지럽다.”
“이렇게 쭉쭉 게임을 하다 보면 눈오리 님도 금세 자라고, 랭커 되고, 막 다른 유저들 목 썰고 다니고!”
말의 내용과 달리 그의 얼굴은 에빌론의 화창한 하늘처럼 밝았다. 킹스메이커는 여전히 그에게 들려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희연은 그의 말을 정정했다.
“PK하는 취미는 없는데요….”
“하…! 이렇게 교황 엔딩을 보는 건가.”
대체 어디까지의 미래를 내다보는 건지 모르겠다. 킹스메이커는 그런 뉴비 없지의 반응에 눈을 가늘게 뜨다 그의 손을 떨쳐내고는 땅에 내려왔다.
“잠시 진정시키고 올게요.”
그녀는 그대로 뉴비 없지의 뒷목을 붙잡고는 골목길로 사라졌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확 조용해졌다.
닉과 둘이 남게 된 희연은 에흐테의 갈기를 쓰다듬어 주며 연신 허공에 손을 놀리는 닉을 보았다. 고즈넉한 시간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차분함이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쪽은 그 뉴비세스 메이커에 관심 없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함께하고 도와주는 것이 내심 신기했다.
그와는 대조되는 분위기에 뉴비 없지를 떠올리던 희연은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질문했다.
“부길마님은 닉 님 때도 저랬나요?”
“그때는… 주저앉아서 울었어요.”
아. 한 번 경험해서 그나마 나아진 게 저거였던 거구나.
희연은 깨달은 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절한 킹스메이커와 주접떠는 뉴비 없지와 달리 닉은 좀 어려운 상대였다.
첫째로 그의 외모가 어려웠고, 둘째로 묘하게 고요한 그 분위기가. 셋째로는 그냥 본 지 몇 시간 안 된 사람이라 어려웠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희연을 도와주겠다고 따라온 것 자체가 놀라웠다. 어쩌면 그냥 에흐테랑 놀고 싶어서 따라온 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이나 닉은 에흐테를 예뻐했으니까. 물끄러미 바라보는 희연의 시선에 닉은 고개를 기울였다.
“궁금한 거라도 있나요?”
희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어색해서 그런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다시 말했다.
“아무거나 물어봐도 돼요. 두 사람이 오려면 좀 걸릴 것 같으니까.”
그가 어색하게는 느껴져도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이 고요한 배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희연은 나름 머리를 굴리다가 마침내 궁금한 것을 찾아냈다.
“혹시 칭호가 뭔지 물어봐도 되나요?”
희연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닉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칭호 이름은 ‘미인과 야수’예요.”
“…아.”
어울린다. 물론 후자 말고 전자 쪽이.
희연은 닉의 머리 위로 얼굴을 내리는 에흐테의 갈기를 잡아당겼다. 떽 하고 혼냈지만 에흐테의 눈은 연신 닉의 머리끝을 향하고 있었다.
닉은 익숙하니 괜찮다며 에흐테의 콧잔등을 도닥여 주었다. 정말 옆에만 있어도 묘하게 고요하고 평온해지는 사람이다.
그렇게 셋이 골목길로 사라진 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주문한 음료를 들고 아타락시아의 주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또 오셨네요.”
희연을 알아본 아타락시아의 주인이 서비스라며 머루 맛 사탕을 하나 주었다. 거절하려고 했지만 닉이 설레설레 고개 젓는 모습에 희연은 감사히 그 사탕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사탕의 정보를 보자마자 왜 닉이 받으라 한 건지 깨달았다.
[<머루머루 사탕> : 에빌론의 카페 아타락시아의 주인 레몬이 직접 만든 사탕은 언제나 먹는 이를 기쁘게 만들어준다. 대부분의 독을 해독시키는 효과가 있다.]
해독 아이템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희연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첫 만남에서는 디저트가 담긴 접시를 쌓는 모습에 홀려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그는 차분함으로 빚어진 것 같은 사람이었다.
뒤에서 누가 멱살 잡고 싸워도, 제 가게의 테이블을 박살 내도 신경 쓰지 않고 덤덤한 태도를 고수했다.
“…….”
아니, 저거는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닉 또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는 저게 일상인가 보다.
연신 눈을 굴리는 희연의 반응에 아타락시아의 주인, 레몬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테이블을 부수는 것 정도는 귀여운 수준입니다. 가끔은 뭐가 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가게 안 상자들을 부수고는 하니까요.”
“…….”
“부순 사람에게 피해 보상을 청구하니 괜찮습니다.”
아, 청구하는구나.
희연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에게서 음료를 받았다. 닉과 함께 머루 열매 주스를 먹던 희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혹시 신전의 전투 신관 헬르벨을 아시나요?”
어떤 기대를 갖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온종일 같은 질문을 하다 보니 반사적으로 한 질문에 가까웠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녀는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헬르벨이라는 사람은 모르지만, 전투 신관에 대해서는 알죠.”
“!”
역시 평범한 카페 주인이 아니었구나!
희연의 눈은 기대심으로 반짝거렸다. 그런 그녀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시간을 끌던 레몬은 톡톡, 테이블을 두들기다 입을 열었다.
“전투 신관은 신전 측에서, 정확히 말하면 신관들이 은밀하게 준비한 하나의 계획입니다.”
“계획이요?”
“신관들은 언제나 무력적 측면에서 부족함을 느꼈죠. 항상 무력을 가질 방법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답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전투 신관을 한번 육성해 보자, 라는 계획을 세웠죠.”
“…….”
“아쉽게도 실패로 끝났지만요. 지금에 와서 전투 신관이라고 불리는 일부의 사람들은 이미 무력을 가진 채 신관의 직위를 얻게 된 이들을 말한답니다.”
“그러면-.”
“여기까지, 가 아타락시아의 주인으로서 말씀드릴 수 있는 이야기고요. 나머지는 당신의 일행을 통해 알아내면 될 것 같군요.”
뭐라 더 묻기도 전에 그는 고개를 까닥이고는 물러났다. 얼마 안 있어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가 돌아왔다.
알프스 소녀에게 질질 끌려오는 성기사의 모습은 어찌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모습이었지만 희연은 거기에 큰 신경을 쏟지 못했다.
“닉 님. 아타락시아 주인은 그냥 카페 NPC가 아닌 거죠…?”
“네. 에빌론의 토박이라고 불리는 NPC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범한 NPC가 아니에요.”
이 정도면 자유도시가 아니라 힘숨찐의 도시로 이름 바꿔야 하는 거 아닐까.
희연이 짧은 고민을 하는 동안 킹스메이커는 닉에게서 대강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 여기서 한번 물어보고 돌아다닐 걸 그랬네.”
그녀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래도 이쪽도 나름 정보를 물어왔답니다, 오리 님!”
“새로운 정보요?”
“네네. 골목길에 갔다 오는 길에 정보 길드원을 만나서 물어봤는데, 헬르벨에 대한 정보는 극비 사항이라 자기들은 못 알려준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는 일단 정보가 있다는 소리거든요.”
언제 또 거기까지 준비한 걸까. 역시 고인물. 발이 참 빨랐다. 희연의 머릿속에서 고인물의 기본 노련함의 평균은 날로 상승하고 있었다.
“정보를 얻으려면 본거지로 가서 얻거나 해야 하는데….”
“?”
“정보 길드가 워낙에 험해서 레벨 1로 가기에는 좀 그렇거든요.”
여기서 레벨 1은 희연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없지를 통해 교황 혹은 대주교를 터는 방법이 있고요, 정보 길드에 쳐들어가서 정보를 얻어내는 방법이 있는데 어느 쪽이 더 좋아요?”
“음….”
“주의할 점은 인맥을 이용하면 교황이나 대주교를 만날 수는 있겠지만 썩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골목길은 가는 게 험하고.”
어느 쪽이 더 손해가 심한 걸까 생각해 보던 희연은 본인에게 가장 중요할 질문을 던졌다.
“나중에 신전과의 우호도가 저한테 필요할까요?”
“오리 님이 신관인 이상 매우 높은 확률로.”
“음… 그러면 정보 길드로 가요. 어차피 레벨 1이라 죽어도 상관없어요.”
조금은 슬픈 이유로 선택지가 정해졌다.
희연의 선택에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벤토리 안에서 제법 고급스러운 검은 망토를 꺼낸 그녀는 그것을 희연의 어깨에 걸친 뒤 후드까지 세심히 씌워주었다.
[<열흘 달밤의 꿈> : 꿈과 현실의 경계선 그 어딘가에서 요정이 만들어낸 장난이다. 그림자 속에 있을 시 공격을 무효화시킨다. 공격 무효 횟수 일일 3회.]
“골목길은 그림자가 져서 어두우니까 이거 하나면 그래도 제법 버틸 거예요. 에흐테는 너무 튀니까 즐거운 우리 집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아, 길마님도 존재 자체가 너무 튀니까 가려주세요.”
킹스메이커의 말에 따라 에흐테를 돌려보냈다. 닉은 기다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뒤 희연과 같은 까만 망토를 꺼내 몸에 둘렀다.
망토 밖으로 비쭉 튀어나와 있던 잎사귀 달린 그의 머리카락이 평범한 검은 색으로 바뀌었다.
“파티 걸었죠? 자, 그럼 이제 출발!”
발랄하게 외친 뉴비 없지는 스킬을 사용해 검은 갑옷과 창을 든 모습으로 바꾸고는 먼저 앞장을 섰다.
뉴비 없지, 킹스메이커, 희연, 닉. 차례로 골목길에 들어선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덤비는 이들이 있었다.
“약한 자는 이 골목길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니!”
“가진 것을 다 내놔라!”
“!”
뭐야. 뭔데. 원래 골목길에 숨어드는 빈민 NPC들이 이렇게 강한 건가?
웅크리고 앉아 빵 부스러기를 아껴 먹던 남자가 손을 휘두르자 벽에 움푹 팬 자국이 생겼다. 놀라는 희연과 달리 다른 이들은 순식간에 싸울 준비를 끝냈다.
“<마리아의 비단 천>!”
“<그대의 피는 성스러운 물과 같으니>!”
“<설원의 노래>”
차례로 킹스메이커, 뉴비 없지, 닉의 스킬이었다. 투명하고 기다란 비단 천이 차례로 일행의 몸을 훑고 사라졌다.
롱기누스의 까만 창에서 흘러나온 핏줄기가 뉴비 없지의 팔을 타고 올라가더니 깨끗한 물로 변화해 그의 팔을 휘감아 올랐다.
기후가 온화한 에빌론에서는 있을 수 없는 하얀 눈송이가 골목길 안으로 소복소복 쌓였다.
혹시 모른다며 골목길에 들어오기 전 파티를 맺었기에 희연의 눈앞에는 그들의 스킬에 대한 알림이 띠롱띠롱 올라오고 있었다.
[<마리아의 비단 천>! 방어력, 공격 속도, 면역이 오릅니다.]
[<그대의 피는 성스러운 물과 같으니>! 공격력, 크리티컬 확률, 크리티컬 대미지가 상승합니다.]
[<설원의 노래>! 지역의 일부를 변화시킵니다. 적에게 동상을 겁니다. 적의 이동 속도, 면역이 저하됩니다.]
덤벼든 자들의 발끝에 얼음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벽을 타듯이 날렵하게 움직이던 그들의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로 느려졌다.
킹스메이커는 거대한 낫을 휘두르고 뉴비 없지는 창을 적을 향해 쏘아냈다. 좁은 골목길에서 보기에는 너무나 현란한 움직임이었다.
골목길의 NPC의 상태를 행동 불가로 만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은 항복을 선언했다.
“훗. 네 녀석들 제법 하잖아.”
“어이어이 믿고 있었다고. 이 정도도 못 이겨내서야 이 험한 골목길에서 어떻게 살아남겠어.”
“뭐래. 비켜.”
킹스메이커는 자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