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두 남자는 민망함을 숨기며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주머니에서 다시 빵조각을 꺼내 부스러기를 살살 긁어내며 그것을 맛보았다.
“어, 아니다 잠깐. 이왕 있으니까 써먹으면 좋겠네. 오리 님, 아직 무기 안 써봤죠?”
상큼하게 웃는 알프스 소녀의 물음에 희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랫소리에 맞춰 산들바람을 헤집을 것 같은 손이 빵조각을 먹던 이들을 가리켰다.
“오리 님. 저 사람들한테 총 한번 갈겨봐요. 스킬은 말로 하거나 생각하면 발동돼요.”
참으로 친절한 제안이었다. 동의 없이 그녀의 스킬 도우미로 선발된 이들이 반발하려 했으나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희연은 아직은 어색한 기분으로 인벤토리에서 총을 꺼냈다. 힘 스텟이 딸려 한 손으로 드는 것은 무리였다. 두 손을 사용해 검은색 권총을 쥐니 들어 올리는 게 가능은 했다.
현실 근력이 이것보다 좋은데….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와 힘이 너프당할 줄은 몰랐다. 희연은 나름 신중함을 기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제법 큰 소리가 골목길을 울리며 벽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아, 맞다. 스킬.”
스킬 거는 것을 잊는 바람에 평타가 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총을 쏘는 게 어설프고 조준하는 법도 몰랐다는 것이다.
덕분에 골목길 NPC는 무사한 자신의 머리를 더듬을 수 있었다. 에흐테 때와는 달리 해당 스킬이 주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는 시무룩해진 희연을 위로해 주었다.
“지팡이도 그렇지만 총도 꼭 원거리 무기인 건 아니에요.”
어딘가 이상한 방향으로 괜찮다 괜찮다 해주는 그들의 위로에 힘입어 희연은 스킬을 발동한 채 총을 휘둘렀다.
딱딱한 권총에 머리를 맞은 자들은 비명을 질렀으나 놀랍게도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돌아갔다,
희연은 처음 써보는 스킬에 만족했고 고인물들은 잘했다고 박수를 쳐 주었다. 꺼지라고 욕하는 이들을 뒤로 한 채 그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왜 우리를 공격한 거예요?”
아직까지 총 이곳저곳을 만져보느라 걸음이 느린 희연의 등을 부드럽게 밀며 닉이 속삭이듯 말했다.
“정보 길드 말단들이에요. 처음 골목길에 들어오는 유저에게 신고식이랍시고 덤비죠.”
“아….”
뭐야. 나 때문에 덤빈 거였어?
괜히 미안해져 희연이 시무룩해 하자 닉은 다정히 말했다.
“길드 정보는 각 유저의 정보를 얻기 위해 덤비는 거예요. 원래 그런 거니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위로를 들으니 좀 마음이 편해졌다.
“참고로 골목길에서 갑자기 덤비는 건 정보 길드, 가만있으면 암살 길드, 도망가면 무해한 NPC예요.”
“암살자는 가만히 있나요?”
“네네! 전직 암살 길드 간부에게서 들었으니 확실한 정보예요!”
킹스메이커가 들려주는 소소한 팁을 머릿속에 저장하며 희연은 다시 힘차게 걸었다.
그렇게 마침내 도착한 곳은 중세 유럽을 기본 바탕으로 둔 게임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당히 현대적인 건물 방식으로 지어진 작은 빌딩이었다.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왜 골목길에 빌딩이 있어요?”
“저기가 정보 길드예요. 저기 길마가 주장하는 정보 길드 성공의 비결이 IT만큼 훌륭한 정보 수집 수단은 없다, 라서요.”
그치… 인터넷이 정보 수집하기에 좋기야 하지….
납득하는 것에 다소 익숙해진 희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1층은 은행 접수처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실제로도 대기 순번을 뽑는 기계가 놓여 있었다. 킹스메이커는 번호표를 뽑고 벽에 붙은 번호를 보더니, 종이를 던져 버리고 낫을 들었다.
“번호는 멀고 위협은 가깝다.”
킹스메이커는 자신의 지론을 남긴 채 앞으로 나갔다. 희연은 그녀가 버린 종이를 들고 번호를 확인했다.
“7042번.”
벽에 쓰여 있는 숫자는 6009. 확실히 위협이 더 가까울 숫자다. 얼마 안 있어 우리의 킹은 승리의 표정을 지으며 돌아왔다.
“바로 5층으로 올라가래요!”
희연은 손뼉을 쳐주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간 5층은 넓은 방에 어울리지 않게 중앙의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책상과 그 위의 컴퓨터 하나가 전부인 곳이었다.
푹신한 PC방 의자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던 남자가 그들을 발견하더니 짜증 서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테 안경에 신경질적일 것 같은 예민한 인상의 남자였다. 당장에라도 손등에 키스하고 춤을 신청해도 이상하지 않을 연미복 차림이라는 것이 특색 있었다.
그는 풀어놓았던 손목의 커프스단추를 다시 채우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막무가내인 인간들은 어쩌면 좋을까? 응? 현실이었으면 너희는 고소감이야.”
“오랜만이야, 마담.”
마… 담?
희연의 시선이 다시 남자에게로 향했다. 연미복 차림이야 그렇다 쳐도 키나 골격, 목울대로 볼 때 결코 마담은 아니었다. 메르헨 호라이즌에선 성별 변경이 불가능했다.
뉴비 없지는 눈을 동그랗게 뜬 희연에게 문제의 마담을 소개해 주었다.
“오리 님, 이쪽은 마담 크레이치아 2세예요. 여기서 2세는 묵음으로 처리예요.”
“‘이정보’입니다.”
“참고로 드레스를 입을 시 상대하는 NPC에게 20% 호감도를 먹고 시작하는 희한한 스킬이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정보상이죠.”
“남의 정보 마음대로 팔아치우지 마.”
마담 크레이치아 2세는 뉴비 없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물론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담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쥔 마우스를 책상 위로 탁 소리 나게 올렸다. 연미복 입고 PC방에서 볼 법한 장비를 끼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인지 부조화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왜 왔는데.”
“NPC 정보가 필요해서. 신전 NPC고 신관인데 총을 쓴대.”
마담은 킹스메이커의 설명에 다시 자리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더니 낯을 조금 찌푸렸다.
“신전 소속 전투 신관 헬르벨. 정보를 말할 때는 정확히 말해.”
“어, 맞아. 역시 너희가 정보 갖고 있었구나? 그래서 걔 지금 어디 있어?”
마담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는 손을 깍지 껴 그 위로 턱을 괴더니 나른히 말했다.
“앞서 말한 건 서비스. 지금부터는 적절한 대가를 치르셔야죠, 킹스메이커 씨.”
“우리가 얼마나 막역한 사이인데 치사하게 이러지 말자, 마담.”
“21세기에 정보가 얼마나 비싸게 팔리는 품목인지 공부하고 와. 정보화시대 몰라?”
“자판으로 타자만 치면서 무슨….”
“그리고 너희는 타자 칠 자판도 없지.”
투닥투닥 옥신각신. 그들의 말싸움은 계속되었다. 예상외로 먼저 백기를 든 것은 킹스메이커였다.
“얼마면 되는데?”
“돈은 나도 많아. 다른 거로 줘. 대법관에게 뇌물로 준 것 이상은 내놔야 할 거야.”
“변태네. 무슨 뇌물로 뭘 줬는지까지 알고 있어?”
“적어도 이 도시 에빌론에서 내가 모르는 정보는 없어.”
“그래봤자 정보상 컨셉충이면서….”
마담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킹스메이커는 어휴 소리 내며 한숨을 내쉬더니 다소 짜증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원하는 게 뭔데?”
마담은 그 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이번 시드론의 마스커레이드. 나도 동행해서 가.”
킹스메이커의 눈살이 곧바로 찌푸려졌다.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거기서 퍽이나 정보상 데리고 오는 걸 허락하겠다.”
“들여보내 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마담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킹스메이커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들어가서 목 따여도 우린 잘못 없고 우린 너인 줄 몰랐던 거고 아무 관계가 없다 못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이인 거다.”
마담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위잉- 하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숙여 프린터기에서 막 뽑은 따끈따끈한 A4용지를 건네주며 마담은 말했다.
“아, 그리고 이건 서비스. 5일 뒤에 시드론의 행정관들이 무 통보 세금 감사를 시작할 거야. 그 전에 먼저 서류 정리해 놓는 게 좋을걸.”
킹스메이커는 종이를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마담. 그리고 따로 조사 좀 해주면 하는 게 있는데.”
“서류 작성해.”
마담의 말에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내민 종이에 무언가를 작성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희연은 고개를 기울이며 뉴비 없지에게 물었다.
“세금도 내요?”
“아, 원래 유저들은 이 땅에 출생신고가 안 되어 있어서 못 걷지만, 길드 하우스를 가지고 있는 길드들은 모두 내요. 건물은 일단 신고가 되어 있어서….”
그런 것도 있구나. 이상한 데서 정말 현실적이다. 건수가 잡히면 잊지 않고 반드시 세금을 걷는다는 점이 특히나.
“그 외에도 대량 수입한 아이템이 있으면 세관까지 달려들어서… 미리 이것저것 정리를 해놓는 게 좋죠.”
그의 설명에 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볼일은 끝났다. 킹스메이커는 마담이 준 정보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얼굴을 하며 희연을 보았다.
“헬르벨에 대한 소식을 알고 있는 NPC가 이 근처에 있어요. 가는 김에 퀘스트 깨고 헬르벨에 대한 정보까지 얻으면 될 것 같아요.”
마담은 우량 고객에 대한 예우라며 건물의 입구까지 그들을 배웅해 주었다. 희연이 보기엔 들어올 때처럼 사고 치지 않는지 감시하기 위함인 것처럼 보였다.
“아, 맞다. 거기 뉴비님? 보호자들이랑 같이 다니는 거 아니면 에흐테흐 숲의 유니콘은 안 꺼내고 다니는 게 좋을 거예요.”
“…?”
“겪어봐서 알겠지만 유니콘은 언제나 수요가 좋은 상품 취급이거든요. 원래라면 그 주인이 됐을….”
그의 시선이 닉에게로 향했다.
“사람에게 감히 덤빌 생각을 못 했겠지만 뉴비님은 이제 막 전직했잖아요? 혼자 있다 유니콘을 꺼내면 괜한 일에 휘말릴 수 있으니 조심해요.”
“…어, 감사합니다. 마담.”
“이정보입니다.”
마담은 생각보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희연은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고 그는 가볍게 목을 까닥이고는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
그들은 골목길을 다시 빠져나오면서 정보 길드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마담께서 굳이 골목에 숨듯이 길드 하우스를 차린 이유가 미신고 된 건물을 차지해 세금 내기를 피하기 위해서라든가, 암살 길드도 같은 이유로 골목에 숨은 거라든가.
킹스메이커는 반쯤은 불법적인 두 길드가 성실하게 세금을 내면 그건 그것대로 모양 빠져 숨은 거라며 신랄하게 말했다.
솔직히 희연 또한 킹스메이커가 말한 이유가 주된 이유라 생각했다. 세금 잘 내는 암살 길드와 정보 길드는… 역시 좀 이상했다.
골목길을 빠져나오자마자 쓰고 있던 망토를 벗어 다시 킹스메이커에게 돌려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골목길에 또 오면 어차피 써야 하니까 오리 님이 갖고 있는 게 좋겠어요. 나- 중에 주세요!”
하긴. 매번 찾아서 뒤집어씌워 주는 것도 일이기는 할 것 같았다. 희연은 아직은 텅텅 빈 제 인벤토리 안에 망토를 집어넣으며 물었다.
“그러면, 일단 어디로 가는 거예요?”
“동문 쪽에 있는 언덕의 저택으로 갈 거예요. 거기서 퀘스트를 진행해야만 만날 수 있는 NPC가 헬르벨의 행방을 알고 있대요. 오리 님도 아는 퀘스트예요.”
“저도 아는 퀘스트요?”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벤토리에서 꺼낸 에빌론 상세 지도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눈을 굴리며 희연은 설명을 들었다.
“이쪽으로 가서 이 저택 주인의 부탁을 들어주면 되는데, 그렇게 어려운 퀘스트는 아니에요. 일단 노인의 딸을 만나서-”
“어!!”
“…?”
우렁차게 울린 목소리의 희연의 일행을 비롯한 에빌론의 광장 주변을 서성이던 모든 유저들의 이목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그곳에는 유난히 까만 천 뭉치 무리가 있었다. 그들 중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뉴비 없지를 삿대질 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그분?”
그리고 그는 희연도 아주, 까지는 아니어도 일단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놀 마을에서 말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뒤늦게 그 생각이 나 먼저 말을 걸려 했지만 상대가 먼저였다. 그는 제 일행의 만류를 뿌리쳐 버리더니 눈물을 질질 흘리며 희연에게 뛰어왔다.
“뉴비님, 어째서! 어째서 저 마귀 같은 것들이랑! 길드 생활을 하고 싶었다면 우리 길드도 있는데!”
“…안녕하세요.”
“뉴비님! 지금이라도흐억!”
“야! 작작해!”
천 뭉치 일행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망토를 입지 않은 남자가 뛰어와 이름 없는 그분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추하게 좀 굴지 말라고 삐로롱 새끼야!”
“이거 놔! 아직 희망은 있어! 뉴비님, 속지 마세요! 저놈들 상습범이에요! 뉴비 납치 상습범이라고!”
상습범….
희연은 슬그머니 킹스메이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그녀는 방긋 웃더니 일행이 아닌 척 멀어져 있던 닉을 끌고 와 희연의 앞에 놔두었다.
“이 얼굴을 보세요, 오리 님. 무해함 그 자체. 이런 사람이 있는 길드가 과연 범법을 저질렀을까요?”
그거랑 이거랑은 상관없는 것 같은데. 얼굴이 순진무구해도 법은 어긴다.
그러나 새하얗기 그지없고 머리에 나뭇잎이 달려있음으로써 속세에서 먼 존재 같은 무해한 얼굴의 요정 닉 효과는 대단했다.
요, 요정은 범법자가 아니에요….
비록 그 닉은 속세의 산물인 게임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런 커스터마이징의 천재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