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포기한 듯 그냥 웃고 마는 닉을 보는데 킹스메이커가 등에 메고 있던 낫을 풀어 이름 없는 그분의 목 앞으로 들이밀었다.
“꺼져. 오리 님은 우리를 선택했다!”
“너희가 중간에-.”
“오리 님 친구 목록에 네가 있어? 우리 길드원들은 다 있어! 오리 님이 너희 길드 가입했어? 우리 길드 가입했어!”
“…지호야!”
이름 없는 그분은 상처받은 얼굴로 제 목덜미를 잡고 있던 남자를 끌어안았다. 지호라 불린 남자는 질색하는 얼굴로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꼭 울려야 하냐. 먼저 상도덕 없이 군 건 너희면서.”
“꼬꼬마는 나와주세요.”
“…야, 무기 들어.”
꼬꼬마라는 호칭이 매우 불쾌했나 보다. 평화롭지는 않던 에빌론 광장에 묘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름 없는 그분을 마저 뒤로 던진 그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부엉이가 날개를 활짝 폈다.
희연은 그제야 그의 이마에 있는 번개 모양의 흉터라든가, 모 영화의 주인공이 머글 세계에서 입었을 것 같은 하이틴 스타일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 성질 긁는 데 탁월한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해리 포-.
“<난쟁이 노인의 수학 교실>!”
그가 그 말을 외치자마자 허공에서 튀어나온 난쟁이들이 희연을 비롯한 일행의 앞에 하나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난쟁이는 희연을 휙휙 살피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x^3+2/x)^5의 전개식에서 x^7의 계수는?”
“…네?”
[‘눈오리의 돌격’, ‘21세기 킹스메이커’, ‘느그 집에는 뉴비 없지’가 난쟁이 노인의 수학 교실 문제를 틀렸습니다!]
[3분 동안 공격력 저하! 이동 속도 저하! 면역 저하! 크리티컬 확률 저하!]
뭔, 문제 풀 시간도 안 줬으면서!
희연이 억울해하든 말든 그들의 싸움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름 없는 그분은 애처롭게 외쳤다.
“지호야! 도시에서 스킬 금지!”
지호께선 무시하셨다.
“<멍청한 개구리>! <박쥐의 원한>! <고양이의 울음>!”
그가 외침과 동시에 희연의 앞에 시스템 창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골목길에 들어서기 전 파티를 걸어 놓은 것 때문에 실시간으로 그들의 상태가 보이는 거였다.
[‘21세기 킹스메이커’ 님과 ‘느그 집에는 뉴비 없지’ 님이 스킬 <멍청한 개구리>에 당했습니다. 행동에 제한이 걸립니다.]
[‘21세기 킹스메이커’ 님과 ‘느그 집에는 뉴비 없지’ 님이 스킬 <박쥐의 원한>에 걸렸습니다. 10초간 암흑 상태.]
[‘21세기 킹스메이커’ 님과 ‘느그 집에는 뉴비 없지’ 님이 스킬 <고양이의 울음>에 당했습니다. 15초간 청각이 마비됩니다.]
유일하게 이 싸움에 별 흥미가 없던 닉이 불쌍한 레벨1 희연을 이끌어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주었다.
눈을 끔벅이며 화려하게 터지는 스킬 이펙트를 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호라는 유저. 그리고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를 제외하곤 모두가 강 건너 불구경 중이었다.
이름 없는 그분만이 애처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청각, 시각 모두 마비되고 행동 제한 저주까지 걸렸음에도 킹스메이커, 뉴비 없지 두 사람은 무척이나 잘 싸웠다.
주고받는 합이 자연스러운 것이 한두 번 싸운 것이 아닌 듯싶었다. 그런 희연의 생각이 맞는 듯 닉이 가벼운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저 셋은 게임 오픈 때부터 사이가 안 좋았어요.”
“아….”
혹여나 저 때문에 싸웠나 했던 희연은 빠르게 안도했다. 그녀는 나름 이 게임의 고인물들에게 빠르게 적응하는 중이었다.
얼마 안 있어 예의 치안대들이 오고 그들이 체포되는 것으로 싸움은 마무리되었다.
파티가 걸려 있었다는 죄로 함께 체포된 희연과 닉과 이름 없는 그분은 재판장에서 벌어지는 대범한 뇌물 찔러 넣기 과정을 구경하며 혀를 쯧쯧 찼다.
“대법관님! 술에는 뭐다? 안주다! 제 주머니에는-!”
이하 뉴비 없지의 외침이었고.
“저는 대법관님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정정했던 카랴흐가 갑자기 물러나고 양자에게 자리를 넘긴 이유. 여기서 말해도 되나요?”
이하 킹스메이커의 협박이었으며.
“…체포하세요. 저 말고 쟤네. 길드 뉴비세스 메이커에서 세금을 횡령했습니다.”
“길드 이름은 말할 수가 없어는 불법 부동산 투기 및 경매장 시세 조작을 했습니다!”
지호께서 외친 발언에 현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저것이 바로 물귀신 작전. 죽어도 나 혼자는 절대 안 죽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다.
카랴흐의 양자이자 현 대법관인 이의 있소는 콧수염 액세서리를 손끝으로 훑으며 말했다.
“21세기 킹스메이커. 느그 집에는 뉴비 없지. 마법 세계는 망했어요를 3일 동안 구금하도록. 이의 없소. 탕탕 끝!”
“우리는 가도 됨?”
이름 없는 그분이 슬쩍 손을 들어 물었다. 이의 있소는 귀찮다는 듯이 대충 손을 흔들어주었다.
세 사람은 치안대에게 끌려가면서 세상 서럽고 분하다는 듯이 소리쳤으나 대법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킹스메이커는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종이를 꺼내 희연의 손에 붙들려 주었다.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건네는 마지막 유서 같은 모양새인지라 괜히 가슴이 뭉클해지는 그런 장면이었다.
“오리 님, 밥 잘 먹고! 퀘스트 어려우면 언제든 다른 길드원 끌고 가고! 길마 님! 오리 님 잘 챙겨요! 초코 님도 데리고 다녀요! 귀농 님한테 플랜 S라고 전하고!”
그녀와 달리 뉴비 없지는 문이 닫히기 전까지 소리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닉은 그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혀를 끌끌 찬 이의 있소 마저 나가는 것으로 정신없던 상황이 대충은 정리되었다.
“음… 안녕히 가세요?”
“뉴비니이이이이이이임!”
이름 없는 그분은 같은 길드원 중 하나라는 Death를 Eat하는 자의 손에 끌려가면서도 희연에게 울먹이는 얼굴로 손을 뻗었다.
희연은 무해한 닉과 함께 멀뚱히 서 있다가 킹스메이커가 쥐여 주었던 종이를 펼쳐 그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동문 쪽에 있는 언덕 위의 저택. 그곳 주인의 외동딸 잉거를 만나 고민을 들어주라고 적혀 있었다. 그곳의 위치를 확인한 희연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어? 이거.”
에빌론 방문기가 끝났을 때 레이가 소개해 준 퀘스트랑 같은 거잖아?
이런 식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이번 퀘스트의 이름은….
『그리운 나의 이웃』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눈오리 님.”
희연의 인사에 초코는 살며시 웃는 낯으로 받아주었다. 급작스러운 부름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녀는 매우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킹이랑 부길마는 구금당했다면서요.”
그쪽이 흥미로웠나 보다.
“네… 다른 길드 사람이랑 같이….”
“뻔하네. 마법 세계 망함 맞죠?”
초코 또한 그들의 사이를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녀는 쯧쯧 혀를 차고는 희연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퀘스트 하시게요?”
“아, 일단 동문 쪽에 있다는 저택으로 가려고요.”
“톨러 퀘스트네. 초보자가 하기에 좋죠.”
위치를 말하는 것만으로 어떤 퀘스트인지 알아낸다는 점에서 그녀 또한 참된 고인물이었다.
초코는 지금까지 희연이 보았던 이들 중 가장 현대적인 차림새를 한 사람이었다. 검은 셔츠에 검은 정장. 냉한 느낌으로 커스터마이징 된 얼굴은 곧은 검은 머리와 함께하자 당장이라도 북부 대공님이라는 소리가 나오게 했다.
조금은 묵직한 것 같기도 한 외양. 그러나 그녀의 성격은 유쾌한 편에 가까웠고 말씨도 가벼운 편이었다.
희연이 초코를 관찰하는 동안 그녀는 연신 종이로 종이학을 접거나 종이비행기를 접곤 했는데 완성된 물건은 대충 쓱 훑어보고는 자신의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 과정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희연에게 웃어준 초코는 들고 있던 종이를 뒤로 홱 던져 버리며 말했다.
“자. 지금부터는 우리 눈오리 님 퀘스트에 집중해 볼까요? 대법관 마음 바뀌어서 괜히 우리까지 끌고 오라고 하기 전에 어서 언덕으로 이동해요.”
하핫 웃는 모습에선 구금당한 둘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먼저 앞서서 동문으로 가는 그녀를 따라 희연 또한 발걸음을 떼었다.
조금 전 싸움 구경을 위해 바글바글 모였던 유저들이 아직 떠나지 않았는지 광장에는 여전히 여러 유저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치안도 나쁨(?) 상태를 만들어낸 그들답게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에빌론의 치안대는 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동문으로 향하는 내내 별별 꼴을 다 보게 되었는데, 밑에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만 입고 훌라 춤을 추는 유저는 배경 정도로 보일 수준이었다.
“폭탄은 예술이다!”
“잡아라!”
광장 테러라든지, 소매치기라든지. 왜 치안대가 그리도 열심히 돌아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 스킬도 탈것도 왜 금지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거라 주장하며 케이크와 금화를 뿌리는 저 유저를 보라.
“길드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잡아라!”
희연은 날아오는 금화만 맞아도 피가 깎이는 스텟이었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의 실사는 생각보다 지저분한 결과물을 만들었다.
“마귀 굴이야, 마귀 굴.”
초코는 태연히 중얼거리며 희연의 입에 물약을 물렸다. 금화 맞느라 닳은 피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가끔 심심하다고 유저 한 대 치고 도망가는 놈들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요.”
하지만 아무리 조심한들 피해자가 방비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악!”
[체력이 5% 미만입니다. 빈혈, 기절 상태에 빠집니다.]
내, 내 피….
앞으로 고꾸라지는 그녀를 초코가 붙잡아주었다.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이 다시 물약을 꺼내 희연의 입에 물렸다.
자연스럽게 초코에서 닉으로 운송된 희연은 간신히 차오르기 시작하는 피 통을 바라보다 초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는 훌라 춤을 추다 말고 달려와 희연을 머리에 꽂고 있던 커다란 꽃으로 후려쳐 버린 유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니까 그냥 후려쳐 버리네.”
“울라울라~ 예압쓰!”
그는 약 올리듯 한 바퀴 빙글 돌며 제 춤사위를 자랑했다. 암흑 일색의 초코는 예의 종이비행기를 꺼내 손안에서 더듬더니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치안대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오리 님, 아무리 그래도 하루 세 번 재판에 서는 건 좀 그렇죠?”
상태 이상 빈혈이 끝나지 않아 닉의 팔 위에 널브러져 있던 희연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초코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생긋 웃음을 지어주었다.
“길마 님, 눈오리 님 업어.”
닉은 예상했다는 듯이 곧바로 희연을 안아 들었다. 새 물약을 입에 물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살인 사건이다! 잡아라!”
오늘로 세 번째 만나는 치안대의 목소리.
상큼한 미소를 흘리며 훌라 춤 유저의 목을 잡아 바닥으로 찍어 누르는 초코, 눈을 땡그랗게 뜬 채 당황하는 희연을 후려친 훌라 춤을 춘 그놈.
그녀가 손을 드는 것과 동시에 인벤토리에서 꺼내진 종이비행기 수십 개가 광장 위로 쌓였다. 초코가 그중 하나를 들어 종이비행기의 앞코로 목을 베자 그는 순식간에 로그아웃당했다.
“하하! 튀어요!”
초코는 즐거워 보였다. 희연은 혼란스러웠다. 종이비행기로 유저를 PK시켰다는 점이. 남은 종이비행기가 광장에서 폭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조금의 놀란 기색도 없이 익숙하다는 듯이 희연을 챙겨 내달리는 닉이.
뉴비세스 메이커. 그 길드에서 가장 정상적으로 보였던 초코와 닉도 사실 비범한 고인물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호칭을 다시 정해야 할 듯싶었다. 초코 말고 청산가리로. 사람을 죽이는 솜씨와 아주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뉴비 없지가 왜 닉에게 그녀를 부르라고 한 건지 알 것 같았다. 일단 그녀가 있는 이상 억울하게 죽거나 PK당할 일은 없을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