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보석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저택을 나오자마자 그들을 안내했다.
보석에서 흘러나온 게 명백한, 반짝이는 가루가 그녀의 앞에 늘어졌다. 저것만 따라가면 산골 요정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많이 걸어야 하니까 에흐테를 꺼내는 게 좋을 거예요.”
닉의 조언을 따라 희연은 에흐테를 꺼냈다. 아름다운 유니콘은 희연에게 가벼운 친애를 표현했다. 희연이 에흐테 위로 올라타자 청산가리와 닉 또한 탈것을 꺼냈다.
청산가리의 탈 것은 예의 종이학이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지던 자그마한 그것은 바닥에 닿자 순식간에 커지더니 꼴에 본인도 학이라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닉이 꺼낸 것은 새하얗고 커다란 늑대였다. 풍성한 꼬리를 살랑이던 늑대는 닉에게 한참을 엉겨 붙은 끝에야 그를 제 위에 태워줬다.
닉이 살살 어르며 하는 말로 보아 이름은 ‘녜디아’인 듯했다.
“출발할까요?”
“네.”
그녀의 대답에 닉도 청산가리도 거리낌 없이 곧바로 속도를 내었다. 그런 그들을 따라가는 에흐테의 속도 또한 뒤처지지 않았다.
앞서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희연은 제 손에 들린 보석을 보았다. 길을 안내하는 물건이 제게 있음에도 둘은 망설임이 없었다.
아마도 저 둘은 이미 이 퀘스트를 진행해 봤을 것이다. 그러니 희연에게 사과를 먹으라 권유하고 낯선 이를 집에 들이는 잉거의 행동에도 경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
그런데 원래… 했던 퀘스트를 다시 할 수 있는 거였나?
가벼운 고민을 하며 희연은 에흐테의 갈기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산골 요정은 뭐예요? 그냥 요정이랑은 다른가?”
“아. 그걸 설명 안 해줬네. 산골 요정은 꼬마 요정족 중 하나예요. 여기는 별별 요정들이 다 있거든요. 산골 요정은… 반짝반짝한 타입은 아니고… 진짜 산에 사는 애들이구나, 싶게 생겼어요.”
청산가리는 열심히 날고 있는 제 종이학의 머리를 툭툭 두들기며 희연에게 가볍게 설명해 주었다. 닉 또한 그녀의 설명을 이어 희연에게 간단한 정보를 읊어주었다.
“싸움과 분쟁을 싫어하는 온순한 성격이 특징이에요. 가능하다면 공존을 택하고, 불가하다면 본인들이 떠나는 걸 최선이라 생각하죠.”
“…….”
“그리고… 아까 봐서 알겠지만, 보석을 만드는 능력이 있고요.”
그것참… 중세 유럽이 기본 배경인 이 게임에서 노려지기 딱 좋은 재능이 아닐 수 없었다. 성격도 그렇고.
그리고 그런 희연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
산골 꼬마 요정 티티의 흰자 없이 새까만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무줄기와도 같은 그의 다리가 열심히 움직였으나 결국 그는 꼬마 요정.
꼬마라는 이름이 붙은 요정들이 으레 그렇듯 그는 자그마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이곳이 산속이고 그가 산골의 요정이라 해도 달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잡아!”
목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티티는 주변을 둘러보며 도망칠 곳을 찾았지만 이런 산속에 숨을 곳이 어디 있으랴.
유일한 보금자리로는 갈 수 없었다. 저 사냥꾼들에게 보금자리의 위치마저 알릴 수는 없었다.
“히익!”
머리 위로 날카로운 화살이 지나갔다. 잘려 나간 제 머리의 나뭇가지에 신경 쓸 틈도 없이 티티는 제 다리를 재촉해야만 했다. 그는 달리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무성한 수풀의 가지를 베어내며 가까이 다가오는 사냥꾼들이 보였다. 저들에게 잡히면 끝이다.
사라진 친구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또한 그리될 것이다.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나 그 끝이 좋지 않다는 것 하나는 명확했다.
티티는 가까이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간절히 빌었다. 살려달라고, 보내 달라고.
함께 빌던 친구들이 먼저 잡혔고, 티티는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과는 결국 이것. 그는 도망치고 저들을 그런 티티를 쫓는다.
그렇게 다다른 절벽. 절벽 아래 펼쳐진 숲은 넓기만 한데 티티가 밟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의 도망은 끝을 맺었다. 아무리 산골 꼬마 요정이라 할지라도 절벽에서 뛰어내려 안 다치는 방법 따윈 모른다.
그리고….
“여기 하나 더 있네.”
“오늘은 수확이 좋아. 이걸로 세 마리째다.”
그들이 어깨에 멘 자루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앞서 잡힌 티티의 친구들이 분명했다. 저들을 두고 어떻게 그 혼자 도망간단 말인가.
티티는 다시 간절히 빌었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들을 귀찮게 하지 않아요. 우리는, 방해하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는….”
“아, 뭐라는 거야.”
티티의 진심 어린 호소는 상대에게 먹히지 않았다.
왜일까. 왜 저들은 티티를, 그의 친구들을 이다지도 괴롭히고 위협하는 걸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태생이 유순한 종족. 분함은 사그라들고 억울함은 묻혔다. 남은 것은 두려움뿐이었다.
티티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발에 챈 작은 돌멩이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로 물러나는 티티를 보며 사냥꾼들은 저들끼리 킬킬 웃고 떠들었다.
“저거 저러다 떨어지는 거 아니야?”
“됐어. 꼬마 요정 주제에 그딴 용기나 있을까 봐. 가서 잡아 와.”
그들의 말대로였다. 티티는 저들에게 대항할 용기도 없었고 뛰어내릴 용기도 없었다. 그건 태생적인 한계였다.
훌쩍거리며 울고 불쌍한 제 동족들과 서로를 끌어안는 것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것. 화낼 줄 모르고 분노하는 마음도 오래 간직하지 못하는 유약한 꼬마 요정.
결국은 또 빌고, 돌아오지 않을 답을 기다리며 훌쩍인다.
“왜,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건가요? 보석이 필요한 거면 우리에게 달라고 하면 되는 건데 왜….”
티티의 말을 끊고 한 사냥꾼이 말했다.
“귀찮게 뭘 달라고 해? 그냥 잡아가서 보석 생산기로 써먹으면 되는 건데.”
“생산기? 그게 뭔데?”
“어… 그런 게 있어요. 형님!”
저들끼리 낄낄. 즐겁다는 듯이.
티티의 발이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났다. 발끝이 허공에서 조금 휘청거렸다.
티티는 용기 없는 꼬마 요정. 싸움이 싫고 분쟁도 싫은 산골 꼬마 요정. 이것은 그의 용기인지 실수인지 모를 결과물이었다.
“그러면… 어? 야! 저 새끼 잡아!”
티티는 힘껏 뛰었다.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느낌이 끔찍했다. 하지만 이걸로, 적어도 그의 입에서 보금자리를 읊어내는 실수는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이제 동굴 안에 숨죽이고 있을 다른 친구들은 안전해질 것이다.
미안해 티토. 보고 싶을 거야, 로로. 부디 무사히 돌아가기를 바라, 키키와 비-.
“악!”
“으악!”
그리운 친구들의 이름을 속으로 읊던 티티는 빽 소리를 질렀다. 흙바닥보다는 말랑한 것과 부딪혔다. 그것도 티티처럼 소리를 내는 무언가와.
“피… 피, 빈혈… 낙하, 추가 대미지….”
“…요새 산골 요정들은 하늘도 날든가?”
누군가의 손이 그를 들어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티티는 정신이 없었다. 떨어지면서 받은 충격인지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길마님, 일단 그 요정한테도 물약 좀 먹여요. 눈오리 님은 내가 먹일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차갑고 매끄러운 병의 입구가 그의 입가에 들이밀어졌다.
티티는 반사적으로 입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삼켰다. 생명수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안 먹으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본능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으어…?”
“정신이 드니?”
퍽 다정스러운 어조였다. 산골 꼬마 요정 티티는 어지러운 머리를 짚으며 눈을 떴다. 그의 새까만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웬 하얀 남자였다.
무해하고도 그리운 냄새가 났다. 그 향의 근원지는 남자의 머리끝이었다. 살랑거리는 여리고 작은 잎사귀들.
티티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요정?”
요정에게 요정 취급당한 ‘종족 : 인간’ 유저 닉은 그저 웃었고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본 청산가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가만있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꼬마 요정과 부딪혀 사망 직전까지 갔다 온 눈오리의 입에 다시 물약을 물려주는 것을 잊지 않고서.
“요정도 인정한 요정 외모.”
“인간이에요.”
“물, 물약 하나만 더… 상태 이상 해제… 빈혈, 어지러….”
티티는 혼란스러웠다.
***
죽, 죽을 뻔했네… 진짜.
남은 피가 0.2%밖에 없다는 알림이 떴을 때는 정말 심장이 철렁했다. 물약을 먹어야 하는데 상태 이상 빈혈을 벗어날 수 있는 스킬도, 칭호도, 아이템도 없었다.
같이 온 그들이 물약을 입에 물려주지 않았다면 인적 드문 이 산속에서 머리 위로 떨어진 산골 요정과 함께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통각 수치를 그리 높이지 않았기에 깎인 피에 비해 실제 고통은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희연은 부딪혔던 머리를 살살 더듬으며 훌쩍이는 꼬마 요정을 보았다.
“흑,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기회가, 끄흡 올, 히익! 줄 알았어!”
“…요정 아니라니까.”
“다들 우리를 안 도와줬는데에 흐어엉! 고마워, 훌쩍. 어디 요정인지는 모르겠지마아안 흐어엉!”
요정 NPC도 인정한 요정 닉께서는 반쯤 포기한 얼굴이었다. 희연은 그녀를 로그아웃시킬 뻔했던 꼬마 요정을 보며 정말 그 이름값을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무와 진흙, 작은 돌조각으로 구성된 몸. 언뜻 보면 단단해 보이나 실상은 연약하기 그지없는 외양이었다.
힝힝 우는 눈물을 닦느라 연신 움직이는 팔에서 돌조각들이 툭툭 떨어졌다. 저러다 몸을 구성하는 것들이 전부 흩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꼬마 요정은 한참을 울다 말고 자신을 훑어보던 희연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새까만 눈을 마주한 희연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흰자 없는 눈이 조금 낯설었다. 티티는 그런 희연을 보며 열심히 걸어오더니 나무의 뿌리 같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쥐었다.
“나 때문에 크게 다쳤지요, 이방인 친구. 미안합니다. 고의는 아니었으나 당신에게 피해를 주었어요. 하지만 알아주세요. 우리와 당신은 친구가 될 수 있어요.”
“…….”
“우리는, 우리는… 친구….”
희연은 묘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쫓는 사냥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도망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당신을 다치게 했어요. 나를 쫓던 자들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을 다치게 한 것은 명백한 나의 잘못-.”
“잠깐, 잠깐만.”
“…?”
“네 잘못은 아니지 않아?”
“…….”
작은 입이 말을 삼켰다. 입을 다물었다. 진흙으로 이루어진 그의 몸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티티는 머뭇거리다 땅에 떨어진 돌 하나를 쥐어 꼭 끌어안더니 그것을 다시 희연에게 내밀었다. 차마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일종에 사과의 의미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그의 눈 색을 꼭 닮은 검은 보석이었다. 돌을 보석으로 만드는 요정들. 싸움을 싫어하는 유순한 요정들.
굳이 따지면 제 잘못이 아님에도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몸에 밴 처절한 약자의 입장인 그들.
희연이 해줄 수 있는 건 간절히 바라보는 눈에 마지못해 그 보석을 받아들이고 티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방인 친구들을 이 숲에 어인 일로 온 거지요?”
“아, 부탁을 받아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티티에게 희연은 손에 쥐고 있던 다른 보석을 내밀었다. 그 보석을 발견한 티티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톨러와 잉거가 그리운 이웃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어.”
떨리는 뿌리 손이 희연의 손에 들린 보석을 소중히 어루만졌다. 희연은 그것을 티티에게 완전히 넘겼다.
연신 보석을 살피고 높게 들어 보석에 투과되는 햇빛까지 살펴본 다음에야 티티는 활짝 웃었다. 울음기가 완전히 가신 얼굴이었다.
순식간에 감정이 변화했다. 경계심 따위는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티티는 친구가 되어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걸음을 뗄 때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