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갑자기 공격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허둥대는 희연을 청산가리가 붙잡았다. 그녀는 희연의 어깨를 꾹 쥐며 말했다.
“일단 진정해요. 상황 파악부터 해야죠.”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종이학이….”
“아. 슬프게도 종이학 2087호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죠. 하지만 그 뒤를 이을 종이학들이 많으니까 괜찮아요.”
“…….”
“자, 그럼 이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좀 알아보죠.”
그녀가 손을 들어 가리키는 방향에는 닉이 있었다. 그의 눈가에 하얀색의 꽃과 넝쿨무늬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 그림이 뺨 언저리까지 넘실거리는 순간 희연은 왜 그녀가 닉을 가리켰는지 알 수 있었다.
[‘Nick’이 <시야 공유>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파티원에게도 시야가 공유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빈 도화지처럼 변했다가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돌아온 게 아니었다. 보이는 것은 그들이 있는 동굴이 아닌 푸릇한 숲의 배경. 에흐테가 앞발을 들어 누군가에게 발길질하는 모습이었다.
타닥거리는 소리의 근원지에는 불에 타고 있는 종이학이 있었다. 희연은 얼마 안 있어 이것이 누구의 시야인지 깨달았다. 닉의 하얀 늑대 녜디아의 시야였다.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는 녜디아를 향해 가죽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유니콘은 무조건 상처 하나 없이 생포해. 피, 갈기, 뿔 전부 다 최고급 재료니까.”
“이 늑대는 어떻게 하죠?”
“늑대는 적당히 잡아다가 묶어놔. 투기장으로 보내 버릴 테니까. 신입 너도 빨리빨리 움직여! 꾸물대면 저 늑대 밥이 될 줄 알아!”
“어… 음… 네에….”
신입이라 불린 남자는 녜디아를 보며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굳은 얼굴이 무언가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 입구가 있습니다!”
“아하! 우리 꼬마 요정들은 여기들 숨어 계셨군. 신입이 일을 참 잘해? 이런 데를 잘도 찾아내고 말이야.”
“아, 그냥 어쩌다가 알게 된 건데요….”
“뭘 그리 소심하게 말해! 잘한 일인데! 으하하하!”
즐겁다는 듯이 웃은 남자는 다른 이들을 향해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다른 입구가 없는지 샅샅이 뒤져. 안에 든 것들이 도망 못 가게 하란 말이야! 이번에도 놓치면 그 손해를 너희가 몸소 갚아야 할 줄 알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제법 노련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녜디아의 시야로 그들의 얼굴을 익히던 그때, 가까이 다가온 신입이라 불린 남자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속닥였다.
“늑, 늑대야… 너 혹시 아니지? 그냥 우연히 유니콘이랑 같이 있던 지나가는 늑대지? 그, 테이머의… 아니지?”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 답한 것은 바로 옆에 있던 차분한 닉의 목소리였다.
“[물어].”
순식간에 상대에게 달려든 녜디아는 입을 쩍 벌려 감히 제게 밧줄을 들이민 신입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으악!”
공격당한 남자가 소리 지르는 것과 동시에 에흐테의 주변을 서성이던 다른 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 머저리가! 늑대 하나를 제압 못 해?”
“아니, 저 늑대가 저보다 레벨이 높은 것 같은데….”
“비켜!”
녜디아에게 물린 신입을 밀어낸 남자가 거대한 도끼를 꺼냈다. 신입은 상처가 아프지도 않은지 꽁알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녜디아. 에흐테와 함께 숲속으로 숨어.]”
닉의 말소리를 끝으로 녜디아의 시야가 끊기며 다시 동굴의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제야 좀 알겠네.”
눈을 비비는 희연을 보며 청산가리가 말했다. 그녀는 언뜻 재밌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냥꾼들이 요정들의 보금자리까지 찾아낸 거죠?”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
그녀가 그 말의 의미를 캐물으려고 했지만, 동굴 안쪽에서부터 울리는 소란스러움에 실천하지 못했다.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산골 꼬마 요정 중에서도 희연에게 가장 익숙한 검은 눈을 가진 요정. 티티가 그들에게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편에는 차마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고개만 내미는 요정들이 있었다. 색색깔의 눈은 경계심을 담아 그들을 보았다. 마냥 반기기만 하던 전과 다른 눈빛이었다.
“이, 이방인 친구!”
“…티티.”
티티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나 곧은 시선으로 희연을 보았다. 걸음은 조심스러웠고, 툭툭 흙 알갱이가 떨어질 정도로 호흡은 거칠었다. 새까만 눈에는 두려움이 얼핏 보이는 듯했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물었다.
“밖에 무슨 일이 생긴 거지요?”
“…사냥꾼이 여기를 찾아냈어.”
그를 비롯한 훔쳐보던 요정들 모두의 얼굴에 절망의 기색이 서렸다. 그들은 저들끼리 웅성거리며 대화를 나눴다.
“떠나자. 새 보금자리를 찾아야 해.”
“하지만 어디로 가지?”
그들 중 유일하게 말이 없는 것은 티티뿐이었다. 희연은 소곤거리는 요정들과 입을 다문 요정을 번갈아 보다 몸을 낮추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티티?”
“무엇을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대로 떠날 거야?”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자그마한 그의 고개가 숙여졌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꼬마 요정은 뿌리 손을 조심스레 내밀어 희연의 손등에 얹었다.
“사냥꾼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고 했지요?”
“응. 아니야.”
“그러면 당신은 친구인가요? 우리의 친구가 되어줄 건가요?”
희연은 그 물음에 곧바로 그러겠노라 답하지는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친구의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답은 내려줄 수 있었다.
“티티. 일단 친구는 말이야… 약탈, 납치, 감금 같은 거 안 해.”
사냥꾼들은 그 전부를 다 한다. 티티는 희연의 말에 멍한 얼굴을 했다. 무언가 생각이 많은 듯한 얼굴이었다.
[60% 달성했습니다.]
“?”
뭐가?
갑자기 나타난 알림에 희연은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 기다려 봤지만 그 이상 추가로 뜨는 알림은 없었다. 희연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다른 요정들이 티티에게 말을 걸었다.
“티티. 우리는 떠날 준비를 해야 해.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꼭, 우리가 떠나야 하는 거야?”
“…이상한 생각하지 마. 우리는… 우린, 사냥꾼을 못 이기잖아, 바보야. 그러니까 티티….”
친구가 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고 그렇지 못하면 떠나는 것이 맞는 거야.
저 정도면 세뇌다. 그것이 희연의 감상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연은 걸음을 내디뎠다. 요정들에게 붙잡혀 있던 티티의 작은 몸을 안아 들며 그를 붙잡은 뿌리 손들을 가볍게 내쳤다. 마주 본 티티의 눈에는 눈물이 말라 있었다.
“티티.”
그를 부르자 까만 눈이 희연을 돌아보았다.
“네가 싫으면 그냥 친구 하지 마. 다른 요정들이 다 사냥꾼이랑 친구 하겠다고 해서 너까지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되는 걸까요, 이방인 친구?”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더불어 여전히 어수선하게 굴고 있는 다른 요정들 또한 불안한 얼굴을 했다. 희연과 티티의 대화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분홍색 눈을 가진 꼬마 요정 하나가 슬며시 희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방인 친구시여. 부디 티티에게 헛된 망상을 이야기하지 말아요. 그 애는 어려요. 나쁜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건 아주아주 오랫동안 티티를 괴롭힐 거랍니다.”
“사냥꾼이랑은 친구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거 너희도 알잖아.”
“하지만….”
“하지만!”
반박하려고 입을 뗀 꼬마 요정의 말을 티티가 가로챘다. 그는 서글픈 노래를 하듯 느릿느릿 말했다.
“…정말로요? 우리는 약하고, 보석을 만들어요. 순하고 대들 줄 모르죠. 우리는 평화에 안주하고 싸우는 게 아닌 도망을 택해요. 이런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나요?”
뭐라고 답해야 할까. 솔직히 말하면 희연은 그들이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무릎까지는 올까 싶은 자그마한 몸에, 무기라곤 돌멩이나 간신히 쥘 것 같은 뿌리 손. 땅에 뿌리 내리지나 않으면 다행인 다리와…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인 것은 순한 성격이다.
티티의 용기는 가상했으나, 말 그대로 가상하기만 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용기였다. 그의 동족들도 알아주지 않을 용기.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냥꾼이라는 위협이 있음에도 유저들이 톨러의 퀘스트를 하러 올 때면 군말 없이 따라갔던 산골 꼬마 요정들.
갈 때야 유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도 다시 돌아올 때는 저들끼리 산속으로 도망 와야 했을 존재. 이들에게 톨러와 잉거의 부름을 거절할 힘이나마 있었을까?
잉거는 왜 희연에게 부탁할 때 그런 얼굴을 했던 걸까. 정말로 이들이 이런 생활을 한다는 것을 몰랐을까.
희연은 퀘스트 창을 보았다. 그리운 이웃을 보고 싶다는 톨러. 그 작은 바람에 목숨 걸고 움직여야 하는 요정들. 톨러는 이기적인 낙천주의자다.
[그리운 나의 이웃 : 언덕 위 저택의 주인 톨러에게는 언제나 그리우며 지금도 사랑하는 이웃이 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자.
‘세상은 얼마든지 크고, 그러니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괴롭힐 필요가 없지.’]
“…세상은 얼마든지 크고, 그러니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괴롭힐 필요가 없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톨러가 꼬마 요정들과 같은 약자가 아니기에 가능한 거였다. 그리고 그 약자 아닌 이가 이들의 유일한 친구였다.
“…톨러가 우리에게 해준 이야기예요. 하지만, 괴롭힐 필요가 없어도 괴롭히는걸요. 이유를 만들어서 괴롭혀요. 사실 우리도 알고 있어요.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티티는 서글프게 웃었다. 희연에게 들린 몸은 처량할 정도로 가볍고 부실했다. 그녀는 여전히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말해줄 수 있었다.
“티티. 너희를 괴롭히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야.”
“…….”
희연은 다시 티티를 내려주었다. 나름 진지한 상황임에도 빈약한 힘 스텟이 팔을 떨리게 하고 있었다.
[72% 달성했습니다.]
“이건 진짜 뭐지…?”
뭘 자꾸 달성했다는 건지 모르겠다. 희연이 다시 나타난 알림에 고민에 빠진 사이 티티는 그 까만 눈을 깜박이며 제 친구들에게 말했다.
“친구가 아니래.”
“티티….”
“사냥꾼은 우리 친구가 아니래….”
티티의 말에 보석을 눈에 담은 꼬마 요정들은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느새 동굴 안쪽에 숨어 있던 다른 요정들도 나온 상태였다.
그의 말을 대부분이 부정했다. 일부는 침묵했고 나머지는 눈치를 보았다. 제 말을 조금도 받아들여 주지 않는 그 모습에 티티는 울먹였다.
“혹시 모르는 거잖아. 우, 우리도 싸울 수 있을지도….”
아, 그건 아니다.
티티의 모습이 애처롭고 한편으로 대견하기는 했으나 희연은 현실을 알았다. 산골 꼬마 요정들은 사냥꾼들과 싸울 수 없다. 그건 마치 눈오리 100명이 있어도 청산가리의 피 5%도 깎지 못하는 것과 같은 불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다만 희연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슬금슬금 티티의 말에 동의하는 이들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사냥꾼이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는 말은 나도 맞다고 생각해….”
“나, 나도….”
“사냥꾼은 무서워. 치, 친, 친구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만큼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괜히 이상한 말 하지 마, 티티! 정말로 우리가 맞서 싸우기라도 해야 한다는 뜻이니!”
“싸우면 되는 거잖아! 우리도 할 수 있어!”
아니, 아니 그거 아니라니까….
“어….”
차마 서럽게 외치는 티티를 말리지 못한 희연은 어정쩡하게 서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아야 했다.
아니야, 얘들아…. 티티, 그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