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빠르게 수긍하는 희연을 보며 청산가리는 말을 이었다.
“고인물들이 웬만큼 좋은 칭호나 아이템을 선독점해서 새로 시작하는 유저들은 불리하다고 하는데….”
“…….”
“그 후발 주자들은 선발대가 쌓아놓은 것을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뭐 우리가 개입하는 바람에 가끔 이상한 결과물이 나올 때도 있는 것 같지만.”
솔직히 그건 부정 못 하겠다. 당장에 에흐테만 해도 닉의 중간 개입으로 인해 희연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 덕에 여우가 대만족을 했지만.
“…….”
유저라는 존재 자체가 과정과 결과면…. 비옌의 사과에서 봤던 그 이상한 몬스터도 어떤 상호작용으로 인한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건가?
문득 든 생각에 입을 떼려는 순간 노쇠한 호통 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지금 뭣들 하는 거냐!”
그 목소리의 주인은 히딘이었다. 불안정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그의 새까만 눈은 자신과 똑 닮은 티티의 검은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소란을 일으키는 주동자를 노려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의외였던 것은 히딘의 눈을 피하는 다른 꼬마 요정들과 달리 티티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어요.”
티티는 제 친구들에게 하던 말을 히딘에게도 말했다. 히딘은 당연하게도 그 말을 부정했다.
“티티! 그들은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어.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적대하고 미워하면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받아들이겠느냐.”
“우리를 먼저 싫어한 건 사냥꾼들이에요! 왜 우리만 그들을 사랑해야 하지요? 왜 우리는 미워하면 안 돼요? 그들은 우리 친구가 아니야!”
“티티!”
다른 꼬마 요정들은 티티와 히딘을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히딘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닉이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사냥꾼들이 에흐테와 녜디아를 잡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어요.”
“아….”
망했다. 내부 분열 난 지금 사냥꾼들이 동굴로 쳐들어오면 전멸이다. 닉과 청산가리가 있다지만 이 둘은 NPC를 상대하지 못하는 최고급 잉여 인력이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데, 아까 왜 톨러와 잉거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한 거예요?”
“일단은 법대로 굴러가기는 하니까요. 이 나라의 법은… 인간을 위한 법이지 요정을 위한 법이 아니에요.”
아, 그러니까. 산골 꼬마 요정들에게는 사냥꾼들을 신고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거다. 그들을 대신해 신고해 줄 수 있는 게 톨러와 잉거고.
“톨러와 잉거가 뭐라고 증언해야 하는 건데요?”
“그들이 사냥꾼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 라고만 하면 나머지는 대법관이 알아서 엮어서 결론 내려 줄 거예요.”
“그렇게 쉽게요?”
그러면 왜 지금까지 톨러와 잉거는 가만히 있었던 거지?
그에 대해 더 물어보려는 순간 동굴 안이 크게 흔들렸다. 그 떨림에 파르르 날아오른 탄자냐들 덕분에 시야가 전부 가려지다시피 했다.
티티와 히딘의 설전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노려보던 희연은 탄자냐들을 손으로 걷으며 그들에게로 뛰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들의 목소리가 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서러운 자와 참으라고만 하는 자의 목소리였다.
“톨러와 잉거도 결국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티티-! 톨러와 잉거는-”
“그만!”
두 요정의 사이에 끼어든 희연은 히딘을 잡아 들어 올렸다. 장유유서 따윈 찾아볼 수 없는 희연의 행동에 히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멧돼지 고기를 양보받아 희연을 손녀 삼고 싶다고 했던 파브넷도 깜짝 놀라 말을 철회할 무례함이었다.
“이방인 친구, 이게 지금 무슨 짓인가!”
“그놈의 친구, 친구 거리다가 다 죽게 생겼거든요! 사냥꾼들이 당장 우리를 생매장할지 납치 감금할지 고민하는 와중에 뭔 소리를 하는 건데요!”
“이방인 친구, 자네가 뭘 안다고!”
“아, 몰라 몰라 몰라! 티티!”
희연의 부름에 티티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다른 꼬마 요정들 역시 희연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탄자냐의 푸른빛이 그들을 감싸 안았다. 그 차가운 불빛 아래 산골 꼬마 요정들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너희 원래 어디서 살았어?”
“…언덕, 우리는 언덕에서 살았어요. 숲에 살았어요. 숲과 산과 함께 살았어요.”
“맞아. 그런데 너희는 지금 동굴에 살지. 동굴 안에 숨어 사는 게 좋아?”
희연의 물음에 티티는 울컥한 얼굴을 했다. 꼭꼭 숨겨둔 바람이 드러났다.
“…싫어요. 우리도 햇볕을 쬐는 게 좋아요. 파란 하늘을 보는 게 좋고 변해가는 계절을 즐기는 것이 좋은 게… 당연하잖아요.”
메말랐던 새까만 눈에 다시 눈물이 어렸다. 티티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꼬마 요정들 역시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였다. 심지어 희연에게 붙들린 히딘마저. 희연은 침착하게 숨을 내쉬었다.
“닉 님.”
“?”
“길드 들어오면… 드래곤 태워준다고 했죠?”
물론 그 말을 한 것은 뉴비 없지였지만 희연은 답지 않게 뻔뻔스럽게 굴었다. 닉은 희연의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색깔별로요?”
“색깔별까지는 필요 없는데…. 대신 지금 당장 가능한가요?”
요정 닉께선 희연의 물음에 예의 퍽 다정스러운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
“야. 하나 더 갖고 와.”
“…….”
“신입!”
“앗, 네, 네!”
사냥꾼 대장 투른에게 신입이라 불린 유저 ‘딕톤’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그는 서둘러 그가 시킨 물건을 끌고 동굴의 입구로 이동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마폭탄. 일부의 마법사들만 만들어낼 수 있는 초소형 폭탄이었다. 지금 사냥꾼들은 그 마폭탄으로 동굴의 입구를 부수는 중이었다. 동굴의 유일한 입구인 그곳을.
저 자그마한 입구가 성인 서넛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지면 안에서 벌벌 떨고 있을 산골 요정들은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이다.
퀘스트 때문에 사냥꾼의 신입으로 들어오기는 했으나 솔직히 딕톤은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양심에 찔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양심 때문에 퀘스트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톨러 퀘 했던 걸 이렇게 써 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혀를 찬 딕톤은 열심히 손을 놀렸지만, 점점 그 속도가 느려졌다. 이번에는 양심 때문이 아니었다. 도저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 때문이었다.
유니콘과 하얀 늑대와 종이학. 그의 직업이 비록 테이머는 아니었으나 그는 제법 게임을 오래 한 유저였다. 나름 이 게임에서 이름 좀 날린다 싶은 일명 랭커들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다는 뜻이다.
집채만 한 하얀 늑대. 탈것으로 탈바꿈된 종이학. 그리고… 최근 말이 많이 나왔던 에흐테흐 숲의 유니콘.
조금 전 봤던 유니콘의 갈기 색이라든가, 전체적인 인상이라는 게 어째 에흐테흐의 숲을 생각나게 했다. 더 문제인 것은 그 하얀 늑대와 종이학이다. 이 게임에서 그런 것들을 데리고 다니는 건….
[스킬 ‘아쉬운 삶의 비애(디버프)’에 당했습니다. 저항 의지가 상실됩니다. 모든 스텟이 30초간 절반으로 떨어집니다. 절망, 무기력 상태에 빠집니다.]
“…아?”
잠깐만 이 스킬….
그가 무어라 반응하기 전에 검은 무언가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그의 입을 틀어막은 상대는 재밌다는 듯 말했다.
“역시… 너, 유저구나?”
“…….”
그 말과 동시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폭탄을 들고 동굴 앞에 서성이던 사냥꾼들이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딕톤은 눈만 굴려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이 최하급 마폭탄으로 찔끔찔끔 부수던 동굴의 입구는 이미 박살 난 지 오래.
지진과 함께 금이 간 동굴을 품고 있던 절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해 위에서 떨어지는 바위 조각들을 피해야 할 사냥꾼들은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딕톤 또한 그들의 시선을 따라 눈을 굴렸다.
절벽을 부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거대한 하얀 무언가가 보였다. 푸른 탄자냐를 흩뿌리며 날개를 펼치는 그 하얀 것은 분명….
“드, 드래곤이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모두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검은 정장의 암살자에게 붙잡힌 그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법적으로도 자연재해 취급인 드래곤. 그중에서 저렇게 새하얀 색을 품은 드래곤을 제 상징처럼 쓰는 유저는….
“아이, 삐약…!”
아. X됐다.
***
드래곤을 탄다는 것은 생각보다 가슴 설레고 사람을 들뜨게 했다. 너무 들떠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다는 약간의 문제 빼고는 정말 멋있는 경험이었다.
“끄아악!”
“끼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건 희연도 마찬가지였다. 무서움에 덜덜 떨며 꼬마 요정들은 저들끼리 똘똘 뭉쳐 우리는 하나! 를 주장했다.
그들과 달리 희연은 가장 안전한 안전벨트를 붙잡았다. 물론 그 안전벨트는 닉이었다. 쥐어뜯는 것이 옷인지 옆구리인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희연은 얼마 되지도 않는 힘 스텟을 쥐어짜 그를 붙잡았다.
그의 사랑스러운 하얀 드래곤 루로가 몸을 틀 때면 닉을 제외한 모두가 내리막길을 굴러가는 도토리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악!”
끊이지 않는 통곡과 비명에 결국 닉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울어요?”
“안 울어어어요으으그!”
대답하던 희연은 다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몸이 허공에 들렸기 때문이다. 닉의 루로는 살아 있는 자연재해답게 안전 운전이라는 개념을 몰랐다.
희연은 에흐테가 보고 싶었다. 안전한 1인용 맞춤 탈것인 사랑스러운 유니콘 에흐테가 너무 보고 싶었다.
저 멀리까지 굴러갔던 도토리 뭉치 꼬마 요정들이 살기 위해 흩어져 하나씩 다시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노인 공경의 의미로 가장 안전한 닉의 품을 차지한 히딘은 저 혼자 널따란 하늘을 보며 감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중이었다.
“그래… 이런 하늘이 있었지.”
“닉 님, 우리 저공비행으로 날면 안 돼요?”
“음….”
“우리가 햇살 아래 이리 당당히 서 있던 것이 얼마 만인지.”
“에흐테가 보고 싶어요!”
“녜디아랑 같이 오는 중이에요.”
제대로 된 대화는 물론 이어지지 않았다. 보다 못한 닉이 인벤토리에서 기다란 끈을 꺼내 희연을 비롯한 꼬마 요정들에게 내밀었다.
툭하면 굴러가던 도토리 형제들은 그것을 자신의 허리에 꽉 묶는 것으로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언뜻 보면 웃기기 그지없는 그 장면에 닉은 웃지 않았으나 뒤늦게 새로운 종이학을 타고 등장한 청산가리는 바들거리는 입꼬리를 차마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크흠, 지금 이게 다 무슨 꼴이에요?”
“…살려주세요.”
희연의 말에 청산가리는 결국 쁘하하핫 웃었다. 참으로 재미나게 웃어 희연은 솔직히 빈정 상했다. 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청산가리는 간신히 사람의 발음으로 말했다.
“길마님, 운전 잘해요. 눈오리 님 기절하겠다.”
“그쪽은 이미 기절한 것 같은데….”
“이쪽은 기절해도 상관없고. 어차피 얻을 정보는 다 얻었으니까.”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희연이 할 수 있는 건 하느작거리는 재질의 옷이 찢어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닉을 간절하게 붙잡는 거였다.
“저기까지만 가면 되니까 조금만 참아요.”
다행히도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닉이 가리키는 곳을 슬쩍 내다보니 제법 우거진 숲속 사이로 빼꼼 튀어나온 건물의 지붕이 눈에 띄었다.
“저기가 어디예요?”
“사냥꾼의 본거지요.”
님들이 그걸 어떻게 아나요, 라는 질문이 절로 나올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였다.
슬그머니 청산가리 쪽으로 시선을 돌린 희연은 그제야 그녀의 손에 붙들린 남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익숙한 얼굴이었다. 닉의 스킬을 통해 봤던 녜디아에게 물렸던 남자.
왜 청산가리 혼자 동굴 밖으로 나가나 했더니 저 남자를 잡기 위해서였나 보다. 탈탈 털려 이미 희게 질린 존재를 바라보다 밑을 내려다보았다.
루로의 날갯짓이 느려지고 있어 무리 없이 고개를 내밀 수 있었다.
“에흐테!”
제법 커다란 사냥꾼들의 본거지 앞에 서 있는 것은 에흐테였다. 영리한 에흐테는 녜디아와 함께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납치당했던 산골 요정들을 옆에 끼고서.
“키키! 비브! 폐폐! 얘들아!”
희연의 다리를 꼭 붙들고 있던 티티가 눈물을 흩뿌리며 외쳤다. 유니콘과 늑대의 보호 아래 꼼질 거리고 있던 산골 꼬마 요정들 또한 그리 다르지 않았다.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기나 할까 싶은 거리. 당연하게도 서로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울었고, 서로를 불렀으며 서러운 재회의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