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정말로 신의 곁으로 가버린 딕톤의 흔적을 눈으로 훑으니 작은 주머니와 배지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1230골드를 주웠습니다!]
[<어느 결사단의 수상한 배지>를 주웠습니다!]
짤랑거리는 돈주머니를 들고 슬쩍 청산가리와 닉을 바라보자 그들은 별 관심이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희연은 방긋 웃는 얼굴로 그것을 챙겼다.
주머니가 제법 두둑해졌다.
돈과 함께 주운 배지는 진한 녹빛의 뱀이 새겨져 있었는데, 장비 템은 아니었는지 착용할 수 없다는 알림이 떠올랐다.
“퀘스트 아이템인가?”
희연의 손에 들린 물건을 대충 훑어본 청산가리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희연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딕톤은 본인의 퀘스트 때문에 사냥꾼 노릇을 한다고 말했다.
그에 대해 말하자 청산가리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겨우 사냥꾼 집단의 상징 배지가 이렇게 멋스럽게 생기지는 않을 텐데.”
확실히 그녀의 말마따나 배지는 고급스러운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냥꾼들한테도 배지가 있는지 확인해 보면 되지 않을까요?”
“털어봐야 알겠지만….”
희연의 손에서 배지를 가져간 청산가리는 몇 번 더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마 높은 확률로 사냥꾼들 것은 아닐 거예요. 혹시 모르는 거지만요. 길마님이 보기에는 어때요?”
“이 근처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물건이에요. 확실히 사냥꾼들 거는 아닐 것 같네요.”
산골 꼬마 요정들은 나름 진중한 분위기의 인간들이 궁금하다는 듯 주변을 기웃거렸다. 조금은 정신없는 작은 꼬마들을 흘겨본 청산가리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궁금하면 털면 되죠. 귀찮아서 대충 묶어두고 왔는데…. 길마님이 여기서 얘들 지키는 동안 눈오리 님은 저랑 같이 사냥꾼들한테 갔다 올까요?”
“네!”
힘찬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청산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정 닉과 드래곤에게 산골 꼬마 요정들의 안전을 위임한 뒤 희연은 에흐테를, 청산가리는 예의 종이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빽빽한 나무 가득한 밑을 바라보며 희연은 탈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안전한 1인 맞춤! 땅을 달리는 건 물론이고 하늘도 날 수 있는 유니콘 에흐테를 만난 것이 희연의 짧은 겜 생 중 가장 운 좋은 일일 것이다.
짧은 비행 끝에 지금은 박살 난 산골 꼬마 요정들의 보금자리에 도착했다. 드래곤 루로의 날갯짓에 힘입어 무너진 절벽 아래 꿈틀거리는 인영들이 언뜻 보였다.
희연과 닉이 드래곤을 타고 꼬마 요정들을 데리고 나가는 사이 뒤늦게 합류했던 청산가리는 암살자라는 그 직업에 알맞게 뒤처리가 확실했다.
나무에 모조리 묶어놓은 사냥꾼 잔당들의 모습을 직접 확인한 희연은 앞으로도 청산가리에게는 절대 개기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까요?”
청산가리의 물음에 희연은 나무에 꽁꽁 묶여 있는 그들을 흘겨보다 손을 들었다.
“오….”
거침없이 그들의 주머니를 뒤지는 희연을 보며 청산가리는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팁은 덤이었다.
“NPC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은 눈오리 님 거.”
희연은 열심히 주머니를 털었다. 그러나.
“…돈밖에 없어.”
딕톤에게서 얻은 배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눈 뜨고 주머니를 털려 눈물 흘리는 사냥꾼들에게 배지를 들이밀어 봤지만, 그들은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 신입 녀석은 급전이 필요하다고 우리 밑에 들어온 거라고! 그딴 배지 모른다니까! 그러니까 일단 이 밧줄을 풀고 우리 대화로….”
딕톤의 배지와 사냥꾼들은 연관성이 없는 건가?
청산가리가 사냥꾼들과 주먹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 희연은 배지의 정체에 대해 고민했다. 딕톤은 퀘스트 때문에 사냥꾼 짓을 했다고 했지 사냥꾼들이 그 문제의 퀘스트를 주었다고는 하지 않았다.
“음… 모르겠다.”
수상한 결사단이니 뭐니 게임 2일 차 뉴비가 알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래서 희연은 간단한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일단 내버려 두자.
어차피 눈앞에 사냥꾼들은 톨러와 잉거의 증언만 있으면 곧바로 감옥으로 보낼 수 있었다. 딕톤의 퀘스트와 상관이 없다고 해도 나쁜 짓을 한 것은 맞으니까. 어차피 이들은 감옥행이니까!
“돈도 다 챙겼고. 이제 꼬마 요정들 데리고 톨러의 저택으로 가면 될 것 같네요.”
“그럼 이만 가볼까요?”
톨러와 잉거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사냥꾼을 신고하는 그 쉬운 방법으로 요정들을 왜 도와주지 않았는지에 대해 들을 시간이었다.
***
에빌론의 동문. 어둑하고 안개 낀 언덕 위 관리되지 못한 저택이 보일 때가 되자 티티가 희연의 팔을 톡톡 쳤다.
“저기예요! 저기! 우리는 원래 저기에서 살았어요.”
루로의 등에 매달려서 굴러가는 도토리가 된 제 친구들과 달리 티티는 희연과 함께 에흐테를 타고 있었다.
“저기는 무덤 아니야?”
티티는 희연의 물음에 긍정했다.
“우리는 원래 저 무덤에 숨어 살았어요. 이 주위는 안개가 많이 끼고 특히나 무덤가는 그 안개가 짙어 햇볕을 쬐려면 언덕으로 나와야 했지요.”
“…그 언덕으로 톨러 부부가 이사 왔던 거구나.”
“맞아요. 그래서 우리는 정중히 찾아가 물었어요. 부탁했죠. 톨러는…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지요.”
그렇게 완전히 다른 존재들은 친구가 되었다.
“그 당시 우리의 왕은 히딘 님이 아니었어요. 히딘 님은 왕의 명령을 받고 톨러를 가장 먼저 만나러 간 우리들이었지요. 그건 아주 많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요.”
“왜?”
“그때의 사람들은 많이, 아주 많이 상처받고 예민해져 있었으니까요. 큰 전쟁을 겪었고, 전사이자 영웅이었던 이들은 잠들었어요. 우리는 영웅들의 쉼터에 숨어들어 살았죠.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했어요.”
“…….”
“우리도 어쩔 수 없었는데 말이죠. 사람들이 싸우던 곳은 산이었고 우리의 터전에서는 날붙이 소리가 끊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티티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희연은 그의 말을 들으며 대강 이 주변에서 있었던 일을 짐작했다.
전쟁. 그 중심은 산골 꼬마 요정들이 살던 산. 꼬마 요정들은 사람들의 분쟁을 피해 보금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추모할 장소로 이 언덕을 골랐고, 꼬마 요정들 또한 보금자리로 택할 수 있는 곳이 이곳밖에 없었다.
두 종족 모두가 안전한 곳으로 고른 장소가 이곳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당시의 싸움이 치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언덕이 보이지 않게 될 때쯤에서야 티티는 다시 입을 열었다.
“톨러는, 무덤지기였어요. 그의 주인이 그에게 언덕 근처에 살 수 있는 오두막을 지어주었죠. 그리고 우리는 친구가 된 거예요. 톨러가 우리를 받아주었으니까요.”
“…….”
“우리 중 가장 톨러를 친애하는 건 왕이실 거예요. 하지만 톨러는 우리도 잊지 않았어요. 모든 걸 다 잊어가는 와중에도 우리를 찾고 또 찾아줘서… 정말, 우리는 기뻤지요.”
“…아.”
“…앞으로도 영원히 기쁠 거예요. 그래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는데… 결국 기다리지 못했지요. 우리는 그걸 미안해해야 해요. 나는, 나쁜 꼬마 요정이에요.”
티티는 희연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바스락거리며 잎사귀가 뭉개지는 소리가 조금은 슬프게 느껴졌다.
낡은 저택의 문을 열고 나오는 잉거가 보였다. 그녀는 하늘을 날아오는 그들을 보며 놀란 듯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녀는 희연에게 부탁했다. 산골 꼬마 요정들에게 친절하고도 다정하게 대해달라고. 존중해 달라고. 그건… 죄책감이 서린 부탁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웃들을 비롯해 모든 것을 잊어가는 제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그리움에 못 이겨 위험을 감수해야 할 요정들. 관리되지 못한 정원에 발을 들인 히딘을 본 잉거의 눈에 담긴 것은 슬픔과 미안함, 고마움이었다.
“아아, 히딘….”
“잉거. 우리 사랑스러운 꼬마. 톨러가 나를 찾았다지. 늦게 와서 미안하단다, 얘야.”
잉거는 고개를 저었다. 웅크리듯 주저앉아 작은 꼬마 요정과 눈을 마주치려 했다. 히딘은 그런 잉거를 짧은 팔로 최선을 다해 끌어안아 주었다.
***
히딘은 제 모습만큼이나 노쇠한 톨러의 손을 소중하게 붙잡았다. 훈훈한 공기가 감도는 톨러의 방은 처음 왔을 때와는 달리 제법 떠들썩했다.
침대 맡에 옹기종기 모여 톨러를 바라보는 꼬마 요정들과 한 발자국 물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잉거. 그리고 문가에 선 희연의 일행까지.
방이 그리 좁은 편이 아님에도 꽉 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타닥거리며 장작이 타오르는 방 안에 말소리가 울린 것은 티티를 비롯한 어린 꼬마 요정들이 바스락거리는 제 몸들을 가만 놔두었을 때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히딘이었다.
“안녕… 잘 지냈나, 톨러?”
“…아?”
톨러는 제 오래된 친구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히딘은 그런 톨러의 하얗게 센 머리를, 주름진 손을 그렁그렁한 눈으로 보았다. 노쇠한 꼬마 요정은 노래하듯 그들의 이야기를 읊었다.
“자… 들어보게나, 톨러. 우리는 가진 거라곤 하나 없는 언덕바지에 사는 산골 꼬마 요정인데, 사람들이 우리한테 남겨놓은 터전이라곤 전사들의 무덤과 언덕밖에 없다네.”
“아아.”
톨러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히딘의 말에 긍정을 뜻한다기보다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기억난다 답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주위는 워낙 안개가 많이 낀 황무지인지라 햇볕을 쬘 때도 마땅치가 않아. 따스한 햇볕 한 줌이나마 쐬기에는 언덕밖에 답이 없어. 한데 듣자 하니 당신들이 이 언덕바지에서 살기로 했다지?”
“맞아, 나랑 우리 부인이랑….”
“우리들의 왕이 행여나… 행여나, 톨러… 우리가 친구가 되지 못할까 두려워해. 그래서 이리 왔지. 자네가 우리를 찾아 이리 왔어.”
“내가, 내가 찾았나?”
톨러는 자신의 그리운 이웃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자신에게 딸이 있다는 것도, 그 딸이 한 발자국 물러나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자신과 함께 정원을 돌보던 부인이 더 이상 곁에 없고, 자신처럼 늙어가는 딸의 고생을 모르고. 저를 처음 찾았던 꼬마 요정도 처음 본 것처럼.
그럼에도 그리운 자신의 이웃을 찾는다.
“…톨러, 우리는 자네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고, 무엇을 추구하든 방해하지 않을걸세. 이 저택을 지키고 싶어 하는 자네를 위해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아아.”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네, 톨러. 언제까지고.”
톨러가 제대로 된 말을 한 것은 그때였다. 그는 여태껏 제 손을 간절히 붙잡고 있던 뿌리 손을 살살 쓰다듬으며, 다정히 웃었다.
“세상은 얼마든지 크고, 그러니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괴롭힐 필요가 없지.”
히딘은 제 친구에게 말했다. 그의 까만 눈을 메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아니 정말 잘 되었… 아니, 톨러…. 우리는 자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걸 줄 거야….”
“아, 그 전에 함께 저녁을… 부인이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하네.”
“그래, 자네 부인은 너무나 친절해 키 작은 나를 배려해 창가 의자에 우유죽이 든 그릇을 놔주고는 했지.”
“맞아. 그녀는 다정해. 태어날 우리 아이도 다정할 거야.”
“아주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이 태어날 걸세.”
“응, 맞아. 그럴 거야.”
“그 딸의 이름은 잉거고.”
“응. 잉거… 우리 딸….”
침대 맡에 앉아 있던 꼬마 요정들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색색깔 다양한 그들의 눈에도 눈물방울이 차올라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톨러와 잉거도 도와주지 않았다며 결국 원망을 터트렸던 티티가 가장 서럽게 울고 있었다.
요정들과 함께 눈물 흘리던 잉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희연을 비롯한 일행들을 이끌고 톨러의 방을 나섰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연신 이야기를 나누는 오래된 이웃이자 친구인 한 인간과 요정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으며 희연은 물었다.
“…만약에 당신이나 톨러가 사냥꾼에 대해 신고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희가 도시 밖 저택에 살기에 피해를 받은 것으로 처리될 겁니다.”
“…….”
“이미 오래전에 공문이 내려왔었죠. 에빌론으로 들어오라고. 이 일대는 더 이상 사람이 살기에 적절하지 않으니 안전한 도시로 들어오라고.”
하지만 잉거는 제 아버지와 함께 도시로 들어가는 것을 택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