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비세스 메이커 (31)화 (31/251)

31화

“우리가 떠나면 이 저택은 없어지겠죠. 안전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로 진작 도시로 들어가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

“아버지의 저택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에빌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모두를 위한 선택이라는 걸 아는데, 저택을 지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어요.”

“…요정들은-”

잉거는 희연의 말을 끊으며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알아요! 압니다! 나와 아버지가 사냥꾼을 신고해 주지 않는 이상 영원히 고통받아야 할 그들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어쩔 수가….”

“…….”

“나에게는… 아버지가 더….”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히딘을 비롯한 몇몇 꼬마 요정들이 문틈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히딘은 물끄러미 희연을 바라보다 텁텁한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만하게나. 우리가 먼저 말했어. 우리가 먼저 그리하자 했네.”

“…뭐를요?”

“이방인 친구. 우리는 아주 오래 살아.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꽤나 오래 산다네. 그러니 얼마든 기다릴 수 있어. 친구가 그리 지키고 싶어 하는 이 저택을….”

“…….”

“적어도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볼 수 있게 해주고 싶네.”

그러니까 합의하에 일방적인 불행을 묵인했다 이건가?

복잡했다. 톨러와 잉거의 도움이 있어야만 사냥꾼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요정들. 톨러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괴로움을 감내하기로 한 요정들.

그 사정을 뻔히 알면서 훗날 있을 그 약간의 도움을 빌미로 기다려 달라 부탁하며 요정들의 괴로움을 못 본 체하는 잉거.

그 상황에서 잉거가 죄책감을 못 느끼는 건 또 아니었다.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타인에 불과한 희연의 일행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상황이 꼬이네요.”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요?”

“꼬마 요정들이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는다거나 하는 건….”

희연 또한 말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내심 불가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희연의 생각이 맞다는 듯 청산가리가 말했다.

“아무래도 불가능에 가깝죠. 최소한 본인들의 부당함을 알아주고 언젠가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인간과 공존하는 최선의 선택이 지금이니까.”

아예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해서 사냥꾼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새로운 터전에서 잉거처럼 그들의 불행을 인지라도 하고 있을 사람을 만난다는 확률도 없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톨러가 저택을 포기하는 것.

자신의 딸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 저택의 소중함만은 기억하는 그가 남은 전부라 생각하는 이곳을 떠나는 것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게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꼬마 요정들이 톨러와 잉거와 함께 이 저택에서 사는 건 안 되나요?”

“요정족은 본인들의 터전인 산에 주기적으로 돌아가야 해요. 안 그러면 몸을 유지하는 힘이 사라지거든요. 톨러의 저택에서 산까지는 거리가 머니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하죠.”

“옛날에는 여기서 살았다고….”

“그때는 도시 에빌론이 지어지기 전. 에빌론은 산을 밀어내고 그 부지 위에 지어진 곳이에요.”

전쟁의 중심이었다는 그 산을 말하는 거였다. 희연은 청산가리의 말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건 해결법이 없다. 산골 요정들이 좀 더 욕심을 내거나 잉거가 아버지가 아닌 저들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혹은….

희연은 꼬마 요정들에 의해 조금 열려 있던 문을 확 열어젖혔다. 문에 매달려 있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요정들을 지나쳐 침대로 간 희연은 멍하니 자신을 보는 톨러에게 말했다.

“왜 이 저택이 중요하죠?”

“…….”

“말해주세요.”

“여기는….”

서둘러 달려온 잉거가 희연의 팔을 붙잡았다.

“중요한 것이 당연하잖아요! 어머니와 함께 평생을 살았던 곳인데!”

“정확히 말하면 그건 아니죠. 여기 원래 저택이 아니었다면서요. 중요한 게 이 저택인지, 아니면 과거에 살았던 오두막인지도 확실하지 않잖아요.”

“…아.”

청산가리는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로 희연을 보았다. 저택이 원래 오두막이었다는 것을 알려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걸 여기서 걸고넘어질 줄은 그녀도 몰랐다.

산골 요정들도 닉과 청산가리도, 희연을 말리던 잉거도 뒤로 물러났다. 톨러는 새삼스레 낯선 얼굴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이곳이 저택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런 톨러에게 희연은 말했다.

“다시 물을게요. 왜 이 저택이 중요하죠? 이곳을 저택과 오두막 중 무엇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과 저택을 지키겠다고 고생하는 딸과, 위협을 버티며 당신이 보고 싶다 할 때마다 찾아오는 친구들보다 이 저택이 중요한가요?”

“우리 딸?”

“네, 당신의 딸. 그리고 당신의 이웃이자 친구.”

톨러의 얼굴에 혼란이 가중되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붙잡는 톨러의 모습을 참을 수 없던 히딘은 결국 희연을 붙잡고 애원하듯 말했다.

“그만… 그만하게, 이방인 친구. 우리는 괜찮아! 우리는-”

“우리가 아니라 당신 하나만 괜찮은 거겠죠! 잡혀간 요정은 당신이 아닌 다른 요정들이잖아요! 걔들이 괜찮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왕이라고 혼자 괜찮다 하지 말아요!”

“…….”

머뭇거리는 히딘을 티티가 붙잡았다. 티티의 까만 눈 위로 장작의 불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일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숨겨진 마음을 이끌어내는 것을 80% 성공했습니다. 특성이 발동합니다.]

[헤매는 자 : 우리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특성의 대상자는 산골 꼬마 요정 티티입니다.]

“특성?”

그러고 보니 처음 캐릭터를 생성할 때 그런 게 있기는 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특성에 희연이 당황하는 사이 티티는 떨리는 목소리로 제 왕에게 자신의 심정을 고했다.

“저는 하나도 괜찮지 않아요. 키키도 비브도 폐폐도, 우리는 모두 무서웠어요.”

“…티티.”

“기다리는 게 힘들어요. 우리에겐 남은 보금자리도 없는걸요.”

그 보금자리를 부수는 데 가장 큰 일조를 한 희연은 양심이 찔려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티티는 희연을 원망하지 않았다.

“보금자리를 버리고, 잡혀간 친구들을 구했어요. 바뀌는 건 없지만 우리를 괴롭힌 사냥꾼에게 복수할 때는 기분이 좋았어요.”

“…….”

떨리던 목소리가 점점 고요해지고 있었다. 흔들리던 눈은 저들의 왕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같은 색의 눈이었지만 서로가 담은 이상이 달랐다.

“저는 톨러가 미워요. 잉거가 미워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미워요. 맞아요, 저는 그들을 사랑하지만, 사랑해야 하지만 미워요. 마음껏 미워하고 싶어요.”

희연의 특성에 이끌려 삐져나온 감정이 그 부피를 점차 키워가고 있었다.

“사냥꾼이 밉고, 다 알면서 외면하는 잉거가 밉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미워요!”

“티티…. 이러지 말아라.”

“우리가 오래 살면 뭐 하지요? 이런 식으로 오래 사는 게 의미가 있나요? 말해봐, 비브. 너는 사냥꾼들에게 끌려간 그 상태로 오래 사는 게 좋아? 너희 모두 말해봐! 이렇게 사는 게 좋아?”

꼬마 요정들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답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속내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왕이시여, 당신은 왜! 왜 잉거처럼 못 하시는 거죠? 잉거는 톨러의 편이에요. 그런데 당신마저 톨러의 편이면… 우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잉거는 티티의 말을 들으며 울었다. 톨러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티티의 까만 눈을 보았다. 또 다른 까만 눈인 히딘은 아연한 얼굴을 했다.

“톨러는, 톨러와 잉거는 우리에게도 소중한 이웃이지만…. 이번만큼은 우리를 선택해 주세요. 톨러에게는 잉거가 있으니까, 우리의 편이 되어주세요.”

“…….”

“우리는… 너무 약해서 남들의 도움 없인 살아갈 방도가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을 그 도움만 바라며 살 수도 없어요. 친절한 이웃과 친구를 찾는 것은 세상이 넓은 만큼 어렵고, 굳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 자들을 찾기는 더더욱 어렵지요.”

“…….”

“하지만 그래도 톨러가 아닌, 우리를 선택해 주세요. 이제는 당장에 돌아갈 곳도 없는 우리들을요.”

톨러가 입을 연 것은 티티가 말을 맺는 것과 동시였다. 똑같은 검은 눈을 가진 티티와 히딘을 보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딘, 자네로군.”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가 조금 흐트러졌다. 티티는 당황한 얼굴로 톨러를 보았다. 히딘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힘없이 기대어 앉아 있던 톨러는 몸을 일으켜 티티를 안아 제 다리에 앉혔다. 제 친우를, 오래된 이웃인 히딘을 보는 눈으로 티티를 보았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나. 목에 그 낡은 손수건은 뭐고. 아내에게 말해둘 테니 다른 깨끗한 것으로 받아 가게. 이런, 너무 꽉 매여 풀리지 않는군. 목이 졸리지는 않았나?”

“토, 톨러…. 나는 히딘 님이 아니에요….”

“이런… 영 풀리지 않는군. 이걸 어쩌나. 왜 이렇게 손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는 건지.”

톨러의 말에 숨죽여 울던 잉거가 나섰다. 그녀는 어린 시절 제가 묶은 손수건을 손수 풀었다. 티티는 제 목을 더듬으며 낯선 얼굴을 했다.

“히딘?”

“나… 나는 티티예요, 톨러.”

“…티티?”

톨러는 고개를 기울였다. 흐릿한 눈이 티티의 까만 눈을 바라보다 이내 흐려졌다. 또다시 많은 것을 잊은 톨러가 유일하게 선명한 검은색과 함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티티. 그래, 내 얘기를 좀 듣겠니, 얘야? 옛날에, 이곳이 자그마한 오두막이었던 적이 있었지. 나는 읍내로 갈 때 타야 할 말에게 박아줄 편자 하나 살 돈이 없었어.”

갑작스러운 그의 말을 모두가 집중했다. 가장 놀란 얼굴을 하는 것은 평생을 그의 옆에 있었을 잉거였다.

“아내가 아팠고, 이유를 알 수가 없었지. 똑똑하다는 사람들을 다 만나봤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어.”

“…….”

“그때마다 도와준 친구가, 이웃이 있는데 말이야. 지친 내가 잠이 든 사이에 딸을 얼러주고 아내에게 약초를 먹여 준 이들이 있었는데…. 너처럼 검은 눈을 가진, 히딘.”

히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리를 자신들이 사는 동굴로 데려간 적이 있어. 미나리아재비가 생각나. 그날 친구는 참 섦게도 울었지. 그런데 나는 마지막인 줄 몰랐어. 그들은 떠났지. 나는 슬펐어.”

“…톨러.”

“미안하고 슬퍼서… 자꾸만 생각이 났지. 아이는 자라고 나는 늙고, 아내는 떠났지. 친구는 울었어. 이별이 아쉬웠어, 우리는. 그래서 나는 불을 켜고 기다렸지.”

톨러의 말에 희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유저인 청산가리와 닉도, 그의 딸인 잉거도 조금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톨러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연은 생각했다.

설마 이거….

[숨겨진 마음을 이끌어내는 것을 92% 성공했습니다. 특성이 발동합니다.]

[헤매는 자 : 우리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특성의 대상자는 동문 저택의 주인 톨러입니다.]

뒤늦은 알림을 증명하듯 톨러의 입에서는 낡고도 소중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항상 몰래 오던 친구들이었으니까. 밤중에 찾아와 놓고 혹여나 내가 눈을 뜨면 숨고는 했으니까. 길을 잃지 말라고…. 혹여나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없어 실망하고 울까 싶어서….”

“…….”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곳을 떠나. 길 잃은 친구들이 또 울 텐데. 저택을 지켜야지. 그래야, 그래야 또 만나지 않겠어.”

“톨, 러….”

“내가 여기를 지키고 있어야 그들이 또 아무 걱정 없이 햇볕을 쬘 거 아냐. 사람들은 상처받아 다른 이들에게도 쉽게 상처를 주고는 하니까. 그러니 이렇게 내가 있어야지.”

“톨러, 톨러-.”

이미, 그는 만났다. 저택을 지키는 이유를 찾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기억하지를 못해서. 자신의 딸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처럼 수십 번, 수백 번 찾아온 그리운 이웃을 알아보지를 못해서….

히딘은 주저앉아 울었다. 잉거 또한 울었고 우는 그들을 꼬마 요정들이 안아주었다. 톨러의 품에 안긴 티티는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차마 닦지 못했다.

왜 아무도 이 간단한 이유를 찾지 못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딕톤이 개입하면서 사냥꾼들은 더 지독해졌다. 티티는 용기를 냈고 요정들은 보금자리를 잃었다. 티티가 희연의 특성에 이끌려 제 속내를 말했다. 그 말에 톨러 또한 희연의 특성에 따라 말을 했다.

긴 시간 동안 이 모든 조건이 부합한 것이 지금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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