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비세스 메이커 (33)화 (33/251)

33화

그 질문에 그렇노라 확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령 그가 제 친우가 아닌 제 종족을 더 우선했다고 크게 바뀌는 것이 없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티티와 설전을 벌일 때는 다급한 상황에 약간의 짜증이 더해져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이지 희연이 진실로 히딘의 상황을 고려 못 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잘못된 것들을 가르친 건가?”

하지만 히딘에게 있어 희연의 말이 크게 다가온 것 역시 사실이었다.

히딘은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산골 꼬마 요정이었다. 그는 산과 숲과 들에서 눈을 뜨는 새로운 요정들에게 종족의 삶을 가르쳤다. 전의 왕, 그 전의 왕, 또 그 전의 왕에게서부터 대대로 내려온 수긍하고 수그리는 삶의 방식을.

“…우리를 보게나. 우리는 작고 힘이 없어.”

눈은 보석이요, 재주도 반짝이는 돌멩이를 만드는 것이니. 그러나 가진 힘은 단단한 돌멩이보다 못하다.

“언덕에 살 적엔 무덤에 숨어 살고 가끔 햇볕 쬐러 나오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낙이었지.”

히딘은 그리 말하며 사냥꾼들을 보았다. 이제는 산지기가 되어 죽을 때까지 산골 꼬마 요정들의 위해 살아야 할 그들을.

“우리는 오래 사네. 사냥꾼들에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보호받겠지. 그리고 다시 돌아갈 거야.”

“…….”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필요한 거네. 그래서 나는 또 그릇된 선택을 하겠지. 나는, 우리는… 친구를 사귈걸세.”

그들에게 보호를 받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

“가망 없는 자들에게도 다시 친구가 되자 손을 뻗게 되겠지. 그것이 우리가 지금껏 살아남은 방식이야.”

히딘은 희연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그 조금의 움직임에도 생기가 사라진 그의 손끝은 바스러졌다. 희연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 반응에 히딘은 결국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 방식을 바꿀 수가 없네. 그게 내가 아는 가장 이상적이고, 성공적이고,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걸 나한테 얘기하는 이유가….”

“…자네는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히딘은 희연에게 묻는 것이다.

“희망이나마 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가망 없는 것은 버리는 게 옳다 믿는가?”

“…솔직한 답을 원하나요?”

희연의 물음에 히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무어라 말하든 받아들이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히딘을 안아 들었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 위로 흙과 작은 돌멩이들이 툭툭 떨어지는 것을 보며 희연은 솔직하게 말했다.

“히딘. 이런 건 나한테 물어보는 게 아니에요.”

“…….”

“내가 아니라 티티나 다른 요정들에게 물어봐야 하는 거예요. 나랑 평생 사는 게 아니잖아요? 슬프지만 평생 함께 사는 건 이웃이나 친구가 아니에요.”

희연은 천천히 안고 있던 히딘을 내려주었다. 히딘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자네 그거 아나. 전사들의 무덤에 숨어 살 적, 톨러를 찾아가는 내게 우리들의 왕이 말했지. 그러지 말라고, 그리고 이제는 티티에게 내가 그리 말하는군.”

“…….”

“티티와 좋은 친구가 되어주게나.”

산지기들을 둘러싸고 툭툭 뿌리 발로 차보고 있던 꼬마 요정들이 히딘을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달려 온 것은 티티였다. 티티는 방긋 웃으며 히딘에게 말했다.

“왕이시여! 인제 그만 우리의 산으로 돌아가요!”

“그래…. 그래야지, 가야지….”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불안하게 걷는 노쇠한 요정과 그를 꼭 붙잡는 어린 요정,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다른 요정들을 보며 희연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톨러의 소중한 이웃들은 산지기들을 이끌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

산골 꼬마 요정들이 떠난 뒤 그만 법정에서 나가라는 어느 NPC의 말에 희연의 일행은 에빌론의 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 희연은 뒤늦게 생각난 의문점을 킹스메이커에게 물었다.

“그런데 유저는 NPC를 공격 못 한다고 했잖아요.”

“아. 초코 님한테 들었어요?”

“네. 근데 아까 레이를 봐서 생각난 건데. 제가 처음 에빌론에 왔을 때 분명 유저가 행정지구 직원이 힘을 숨김! 하면서 덤볐거든요.”

그 유저는 어떻게 NPC인 레이를 공격한 것일까. 그런 희연의 의문을 킹스메이커는 깔끔하게 풀어주었다.

“그건 레이가 죄인이라 그런 거예요.”

“…네?”

“자유도시 에빌론의 별명은 좌천의 도시죠.”

별명이 너무하다. 그런 희연의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족한 설명을 채워주었다. 그건 희연이 이미 아는 이곳 에빌론의 옛 모습과도 얽혀 있는 이야기였다.

“지금의 에빌론은 도시라고 불릴 만큼 커다랗지만 예전에는 산 옆에 있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어요. 전쟁 중이었고 산은 싸움터였죠. 에빌론은 민간인들이 사는 곳인 만큼 직접적인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징집되고 마을은 수탈당했다나 봐요.”

“…….”

“그때 많은 주민들이 죽었기에 지금의 에빌론에는 토박이라고 불릴 만한 NPC가 별로 없는 거고요.”

“아. 그래서 전에 헬르벨을 알 만한 NPC를 찾을 때 물어볼 NPC가 별로 없었던 거예요?”

희연의 말에 킹스메이커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시드론의 왕은 폐허와 황무지밖에 남지 않은 이 일대를 살려야 한다는 의무가 생겼지만, 전쟁의 피해가 심한 곳은 이곳만이 아니었어요. 왕은 실익을 따져야 했고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이 드는 땅이 아닌 그래도 살릴 수 있는 땅을 선택했죠.”

“그러면 여기는….”

“에빌론은 버려진 땅이 된 거죠. 원래라면 그렇게 끝났어야 하는 땅이었지만, 시드론에서 유배지 취급하는 순간 그 미래는 바뀐 거예요.”

“유배지요?”

그들의 대화를 줄곧 듣고 있던 청산가리가 가벼운 어조로 끼어들었다.

“정치적 유배지죠.”

“?”

“정치 싸움에서 진 인재들이 버려진 땅을 되살리라는 명목하에 여기로 쫓겨났거든요.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에빌론이고요.”

“그러면 레이가 죄인이라는 건….”

“유저가 NPC를 공격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시는 토벌 명령이 떨어질 때. 이곳 NPC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곳으로 발령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반쯤은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의미가 되는 거거든요.”

너무하네, 진짜.

희연의 머릿속에서 시드론의 왕에 대한 평가는 이번에도 뚝뚝 떨어졌다. 정치싸움이라는 점에서 그 혼자 벌인 일은 아니겠지만 죽은 땅을 도시로 만들 인재들을 유배시켰다는 점에서 안목 없는 왕인 건 맞았다.

“자! 의문이 풀렸다면 이제 우리 아주 중요한 문제를 이야기해 볼까요?”

“?”

“바로바로! 오리 님의 성장 방향!”

“아.”

정작 본인은 아무 생각 없었는데 두 부길마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진심이었다.

“사냥이나 던전보다는 퀘스트 위주로 캐릭터 키우는 게 나으려나?”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나중에 가면 몬스터 뿌셔뿌셔 하고 다니는 게 더 재밌다니까.”

“그러다가 지나가던 고렙 유저가 심심하다고 죽이면 어떻게 해!”

이미 꽃으로 맞아서 죽을 뻔했다. 희연은 딴짓하던 것을 멈추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열심히 경청했다. 그런 희연의 태도 변화에 킹스메이커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판단했는지 곧이어 그녀는 지금 당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보를 희연에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특수 스텟의 경우 따로 주어지는 스텟이 아니면 올리지 못해요. 그래서 힘, 민첩, 마력 이 세 개를 레벨 업으로 얻은 스텟을 사용해 올리는 거예요.”

킹스메이커의 말에 스텟 창에 떠올랐던 포인트가 떠올랐다. 미사용 포인트 15. 레벨 하나당 5포인트를 주는 듯했다.

“민첩 아니면 마력을 올리는 걸 추천할게요. 총을 사용하니까 힘은 크게 필요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면 일단 모아뒀다가 나중에 한 번에 몰아서 쓰는 게 좋으려나….”

뉴비 없지가 킹스메이커의 말을 이어 말했다. 희연의 공격 스타일이 확실하게 잡히지 않아 고민이 많은 듯했다.

두 부길마가 주입하는 지식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뉴비를 지켜보던 청산가리는 다 접은 종이배를 분수에 띄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향했다. 청산가리는 선물이라며 당장에라도 삐약, 하고 울 것 같은 노란 종이로 접은 병아리를 희연의 손에 쥐여 주고는 말했다.

“그러면 킹도 왔으니 난 이만 가볼게요.”

“초코 님, 벌써 가게요?”

킹스메이커가 아쉽다는 듯이 말하자 청산가리는 제 까만 머리를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는 있었는데 역시 나는 뭐 키우는 건 적성에 안 맞아요.”

그런 것치곤 되게 재미난다는 듯이 웃었었는데.

특히 희연이 딕톤을 때리고 미스 났을 때 청산가리는 숨도 못 쉬고 웃었다. 희연의 묘한 시선에도 청산가리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미련이 남는다는 듯이 킹스메이커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참에 같이 뉴비세스 메이커….”

“놉.”

청산가리는 단호했다.

섭섭함을 감출 생각 없는 킹스메이커의 얼굴에 결국 청산가리는 함께할 수 없는 이유를 소상히 이야기해 주었다.

“시간 남으면 더 놀았을 것 같긴 한데…. 퀘스트하다가 중간에 온 거라서요. 이제 슬슬 가봐야죠.”

“암살 퀘?”

“직업 퀘라고 해주세요.”

둘이 거기서 거기 아닌가.

두 사람의 대화에 희연이 애매한 표정을 짓자 청산가리는 그마저도 재밌다고 웃어주었다.

“그래도 나름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기회 되면 또 같이 게임해요.”

“네!”

“다음에는 안 놀릴게요.”

“네에….”

별로 믿음 가는 말은 아니었다.

청산가리가 떠나고, 투른이 말한 곳을 어림짐작하기 위해 지도를 꺼낸 희연은 이들 중 가장 설명을 잘 해주는 상대를 붙잡고 말을 걸었다.

“투른이 말한 게 어디쯤인가요?”

닉의 설명은 이번에도 친절했다. 그는 손을 들어 어느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이에요. 하지만 가기 전에 신전에 들러야 해요. 지금부터 갈 숲은 신전에서 파는 정화석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에요.”

“정화석이요?”

고개를 끄덕이며 닉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양손에 각기 쥐더니 희연의 앞에 내밀었다.

“왼쪽에 있는 게 마법사들이 만드는 마폭탄이에요. 초소형 폭탄이라고 보면 되죠.”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예쁜 붉은색 혹은 요사스러운 보랏빛을 품은 마름모꼴의 보석이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은 아름다웠으나 손을 내미니 무언가 따끔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닉은 그것이 희연의 방어력이 부족해 그런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게 정화석이에요. 색이 다르니 구별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의 말대로 정화석은 마폭탄과 생김새는 같았으나 은은히 빛나는 우유색이었다.

“정화석은 신관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돌인데, 언데드나 악마를 사냥하러 갈 때는 꼭 필요한 물건이에요. 신관으로 전직했으니 나중에는 직접 만들 수도 있어요.”

“그러면 헬르벨이 있는 숲은 언데드나 악마가 나와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킹스메이커가 해주었다.

“굳이 따지면 그쪽 계열은 아니죠. 따지자면 고스트?”

“거기 진짜 뭐 하는 곳이에요?”

“괜찮아요, 괜찮아!”

“…….”

희연이 알 수 없는 장소에 대해 걱정하고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는 괜찮다며 웃는 동안 닉은 혼자 신전에 가 한 상자 가득 정화석을 사 왔다.

이제 헬르벨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