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풋낯의 죄인』
해의 동쪽, 달의 서쪽에 있는 성이라던 사냥꾼의 말은 과장이나 비유가 아니었다. 희연은 눈앞에 펼쳐진 어처구니없도록 신비한 풍경에 결국 눈을 비볐다.
루로의 등에 타 하늘을 날던 희연을 놀라게 한 것은 하늘에 걸린 두 구체였다. 해와 달이 수평을 맞추며 함께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성은 기이한 배경에 제 몸을 맞춘 것처럼 일반적인 성의 모습을 하지 않았다.
희연은 처음 그 성을 봤을 때 그것이 거대한 산맥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산맥으로 착각할 만큼 거칠게 지어진 고성이었다. 울룩불룩한 산맥을 닮은 그 성은 이미 자연에 침식당한 지 오래인 듯 이끼가 낀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사람보다는 사람 아닌 것들이 살았을 것 같은, 일종의 던전을 생각나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모든 것이 기묘했지만 그중 가장 이상한 것을 고르자면 해와 달이 함께함에도 불구하고 어둑한 하늘이라 할 수 있었다. 하늘은 해와 달, 둘 중 선택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애매한 새벽빛을 띠었다.
희연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 부근의 하늘만 그랬다. 시야에 잡히는 그들이 지나쳐 온 곳의 하늘은 여전히 밝은 낮으로, 새파란 빛을 띠었다.
한참을 이곳저곳 둘러보던 희연은 옆에서 책을 읽던 킹스메이커에게 물었다.
“킹 님, 킹 님. 저기에 있는 저 성도 퀘스트 지역이에요?”
이상한 기호가 가득한 책 위로 무언가를 끄적이던 킹스메이커가 고개를 들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저기는 사냥터예요. 따로 퀘스트를 주거나 하지는 않고, 그냥 알아서 가서 층별로 공략하면 되는 곳이에요. 그래서 원래는 던전으로 분류되어야 하는데….”
“?”
“버그인지 일부러인지 시스템상으로는 마을로 구별돼요.”
저게 마을이라고?
그녀의 말에 희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다시 문제의 성으로 움직였다. 몇 초간 응시하니 설명을 하는 시스템 창이 떠오르기는 했다.
[<햇님의 동쪽, 달님의 서쪽에 있는 성>]
그게 끝이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도시나 마을처럼 시스템 창에 정보가 뜨는데 사냥터라는 게 흔한 건 아니지 않아요? 막 숨겨진 비밀이 있다든가.”
희연의 말에 루로의 위에서 제 성배를 데굴데굴 굴리던 뉴비 없지가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여러 명이 도전해서 온갖 방법으로 최고층까지 공략했었는데 결국은 그냥 보스몹이랑 나머지들이 무한 리젠되는 사냥터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아하….”
“오리 님 레벨 50? 정도 되면 데리고 가줄게요! 레벨 업하기엔 제법 쏠쏠할 거예요.”
그 얘기는 렙 4인 지금은 가까이 갈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의미다. 희연은 부드럽게 하늘을 선회하는 루로가 해를 등지고 달이 있는 방향으로 날 때까지 산맥을 닮은 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응?”
방금 창문 쪽으로 뭔가 보인 것 같았는데? 잘못 본 건가?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내미는 순간 익숙한 손길이 어깨를 잡았다.
“오리 님, 이거 입에 물어요.”
“?”
환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시야에 잡았다. 내밀었던 고개를 물리고 킹스메이커의 손에 들린 것을 보니 닉이 사왔던 정화석이었다.
“이거 먹는 거였어요?”
킹스메이커는 혹여나 그녀가 돌멩이를 씹을까 싶어 서둘러 말했다.
“아뇨, 아뇨 먹는 거 아니에요. 삼키지 말고 입안에 물고만 있어야 해요.”
희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화석을 입에 물었다. 딱딱한 보석을 물고 있다는 게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뉴비 없지가 둘러업을 때만 해도.
“…??”
“으리 이즈 미트러 뜨르지그니끄 늘르지 마르요.”
“므르그여?”
“미트러 미트러.”
뭐라고 하는 거야?
희연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정화석을 입에 물고 있었다. 그녀는 딱딱한 하얀 갑옷에 찰싹 달라붙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하늘에 걸려 있던 해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환하게 빛나고 있는 달뿐. 그리고 그 아래 유난히 달빛이 쏟아지는 부근이 있었다. 잎이 무성해 어둡게 느껴지는 숲임에도 그 부근만 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즌비해여, 으르 님!”
뉴비 없지가 요상한 발음으로 준비하라 말한 것과 동시에 닉이 정화석이 담겨 있던 상자를 뒤집었다. 정화석 수십 개가 달빛을 반사하며 숲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제법 장관이었다.
정화석이 숲에 닿자마자 퍼져 나가는 빛만 아니었다면 달빛으로 빚은 보석이 숲을 장식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마치 땅에서 하늘로 뻗어져 나가는 하얀 벼락처럼 빛이 퍼져나갔다. 벼락은 거인이 벽을 부수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희연은 여전히 지금 이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정화석을 뱉고 물어볼까 고민하는 사이 킹스메이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웃으면서 희연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것까지 완벽하게 한 그녀는 무서운 속도로 추락했다.
“!”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녀의 힘 스텟으로는 성기사 뉴비 없지의 팔을 들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희연이 그의 팔을 들려고 한 것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결국 온갖 손짓 발짓 다 한 뒤에야 희연의 말을 이해한 뉴비 없지가 그녀를 든 상태로 루로의 등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저건….
희연이 뉴비 없지에게 매달려 보게 된 풍경은 추락하면서 검은 낫을 휘두르는 킹스메이커의 모습이었다. 검은 새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낫에서 빠져나와 숲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에도 본 적 있는 스킬이었다.
검은 새가 번쩍이는 빛의 벼락이 시작되는 곳에 닿는 순간 둥근 막의 결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연이 당황하는 사이 닉은 뉴비 없지에게 손을 들어 손가락 세 개를 피더니 킹스메이커처럼 밑으로 뛰어내렸다.
“???”
그때까지만 해도 희연은 설마설마했다.
살아 있는 자연재해 드래곤 루로가 녜디아가 사라질 때와 똑같은 이펙트를 뿌리며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으므자므브브!”
“즌비즌비!”
뉴비 없지가 손을 들어 희연의 입가를 막았다. 혹여나 소리를 지르다가 정화석을 뱉을까 싶어 사전에 예방한 것이다. 무거운 갑옷과 두 명분의 무게 탓에 그들의 추락 속도는 다른 이들보다도 훨씬 빨랐다.
앞서 떨어졌던 닉을 제칠 정도였다. 부릅뜬 눈으로 고스란히 추락의 과정을 느껴야 했던 희연은 빛을 흩뿌리던 정화석과 함께 결계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죽는다!
그러나 희연이 예상했던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다. 꾹 감은 눈꺼풀 아래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특수지역 <이름 없는 달빛의 요람>으로 입장합니다.]
희연은 먼저 추락했던 킹스메이커가 안 보인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
이름 없는 달빛의 요람은 희연이 하늘에서 보았던 숲과는 달랐다. 분명 루로의 등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숲은 청록으로 물들고 밤을 얹은 숲이었다.
그러나 현재 그녀의 눈에 들어온 곳은 밤의 숲이 아니었다. 아니 밤은 맞으나 숲이 밤을 거부하는 듯했다.
“…….”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지 못하는 희연을 두고 닉과 킹스메이커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뉴비 없지는 잉잉거리며 미안하다고 옆에서 종알거렸다. 그를 무시한 채 희연은 주변을 살피는 것에 더 집중했다.
조심히 손을 뻗어 굵은 나무의 뿌리를 더듬어 보았다. 옆에서 제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만진다고 죽지는 않는 듯했다.
“나무가….”
나무가 자체 발광이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 떠 있는 것은 밤을 빛으로 물들이는 달. 그러나 달빛은 이 땅에 닿지 않는다. 그 대신 숲이 달빛을 빚었다.
“이름 없는 달빛의 요람….”
그 이름에 어울리는 곳이었다.
“오리 님, 오리 님! 괜찮은 거 맞죠? 많이 놀랐어요? 미안해요! 오리 님, 오리 님!”
“…….”
감상 시간이 끝났다. 희연은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비록 뉴비 없지가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심장을 폭행하기는 했으나 이해할 수 있었다.
떨어지는 와중에 뱉은 기억은 없지만 물고 있던 정화석은 사라진 뒤였다. 아마도 정화석을 입에 무는 것 또한 이곳에 들어오는 조건 중 하나였을 것이다.
누가 뭘 하다가 찾은 방법인지 모르겠으나 이곳에 들어오는 과정이 제법 험난했다.
궁금증을 뒤로하고 희연은 아직도 놀라 쿵쾅거리는 심장을 꾹꾹 눌러 진정시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쁘네요. 여기.”
에흐테흐 숲의 나무가 독 빛을 띠는 회색의 숲이었다면 이곳은 평온 그 자체였다. 하얀 나무와 색이 여린 풀잎들. 나뭇잎의 색 또한 풀잎과 같은 옅은 색이다. 어찌 보면 검은 무늬 없는 자작나무에 빛나는 기능이 탑재된 것 같기도 했다.
구경을 끝낸 희연은 킹스메이커에게로 쫄랑쫄랑 걸어갔다. 이상하게도 낯선 숲에만 들어오면 그녀가 가장 믿음직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마도 카나리아 광산의 몬스터로부터 구해줬기 때문일 것이다.
이래서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하나 보다.
“아, 오리 님! 숲이 넓어서 헬르벨을 찾는 게 어려운데 불 지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첫인상 그거 사실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가는 거 아니더라.
“불 지르는 건 좀….”
“역시 그렇죠? 안 그래도 좀 고민이었던 게 마담이 옛날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거든요. 이 숲을 훼손하면 영원히 빛나지 않는 달이 뜰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불 지를까 말까 고민이라도 해준 거구나.
사고 칠 뻔한 스케일이 너무 크다. 희연은 진심으로 킹스메이커를 사전 방지하고자 했던 마담의 지혜에 감탄했다.
그녀는 예비 방화범 킹스메이커를 뒤로하고 가장 안전해 보이는 닉에게로 갔다.
“닉 님. 설명 좀 해주실 수 있나요?”
힘없는 그녀의 말에 나뭇잎 하나를 뜯어 살펴보고 있던 닉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희연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비록 드래곤 위에서 안전 장비 없는 스카이다이빙을 했다지만 그것을 감안하고 봐도 희연의 얼굴이 피로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다쳐서 피가 닳았나 싶어 파티창에 떠오른 그녀의 상태를 보았지만, HP가 닳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는 시선을 멀리해 아직도 힝힝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니는 뉴비 없지와 낫을 들고 방화 각을 재는 듯한 킹스메이커를 보았다.
“아.”
그는 납득했다. 때로는 존재 자체만으로 많은 것을 납득시킬 수 있는 법이다. 닉은 희연에게 대강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현재 그들이 있는 장소는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만 입장이 가능한 특수 지역으로 그 조건은 정화석, 그리고 킹스메이커와 같은 고급 인력의 드높은 딜량이다.
이름 없는 달빛의 요람이 정확히 어떤 장소인지 밝혀진 바 없으며 추측상 달과 깊게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 그리고 평온한 숲의 분위기와 달리 고스트 타입의 몬스터가 나타난다.
입장 조건 자체가 다량의 정화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이 숲은 언데드가 나오는 무덤과 비슷하다는 게 그의 사견이었다.
“고스트 타입이면 저한테는 유리한 건가요?”
그녀의 직업은 신관. 패시브 스킬인 어둠 저항은 언데드나 악 타입에게 추가 대미지를 입힐 수 있었다.
원래 게임에서 빛과 어둠은 대대로 서로에게 크나큰 대미지를 주는 법. 그러나 사람 인식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묘하게 악 타입이 빛 타입에게 주는 대미지보다 빛 타입이 악 타입에게 주는 대미지가 셀 것 같다는 편견이 있었다.
희연은 자신이 총을 쏘면 몬스터들이 우수수 쓰러지는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닉은 그런 희연의 기대를 무너트렸다.
“고스트 타입은 악이나 언데드로 쳐주지 않아요.”
“…왜요?”
“자기가 죽었는지 모르고 계속 떠도는 영혼 상태가 고스트 타입이라 그래요. 어둠 저항이 제대로 통하려면 속성 악을 품은 고스트 타입이어야 해요.”
조금 실망스럽긴 했지만 희연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헬르벨을 찾아야 한다는 거네요.”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이 유령 숲에서 헬르벨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킹스메이커처럼 극단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나 일일이 돌아다니며 찾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