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비세스 메이커 (35)화 (35/251)

35화

“역시 불을-.”

“그건 아니에요.”

킹스메이커의 발언을 저지한 후, 그들은 숲을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하얗게 빛나는 것은 나무뿐만이 아니었는데, 허공을 뛰어다니는 소동물이나 바위, 열매 같은 것들도 희었다.

희연은 돌아다니면서 그중 빛나는 돌멩이나 열매를 주웠다. 달빛을 머금은 듯 은은히 빛나는 것이 제법 예뻤기 때문이다.

돌멩이를 열심히 줍줍하는 그 모습을 본 킹스메이커가 보석을 갖고 싶냐 물으며 번쩍이는 보석 목걸이를 꺼내는 해프닝이 있었으나 한마디로 가볍게 해결할 수 있었다.

“저는 힘 스텟이 부족해 그런 무거운 목걸이는 못 해요.”

“아….”

조금 슬픈 이유였다.

“그나저나 여기 진짜 넓네요.”

여전히 헬르벨은 머리카락 한 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름답던 숲의 풍경도 슬슬 질릴 정도였다. 그런 희연에게 킹스메이커가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숲 말고 나무 하나에만 불 지르는 건 괜찮지 않을까요, 오리 님?”

“그….”

나무 하나는 괜찮나…?

순간적으로 흔들렸으나 다행히도 킹스메이커에겐 그 이상 희연을 설득시킬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사람?”

하얀 로브를 입은 인영이 나무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눌러 쓴 두건 탓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드러난 하관을 통해 피부가 창백하게 흰 사람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저기, 잠깐만요!”

희연이 손을 뻗어 그를 불렀지만, 상대는 슬며시 미소 짓고는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왜, 왜 도망가세요! 우리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간절한 부름에도 하얀 로브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열심히 뜀박질하던 희연은 이 추격전에 크나큰 애로 사항을 깨달았다. 그녀의 민첩이 부족했던 것이다.

“왜 저렇게 빨라…!”

옷까지 흰색이라 잘 보이지도 않았다. 상대와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희연은 불안해졌다. 겨우 찾은 저 사람을 놓칠 경우 킹스메이커가 방화범이 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각에는 한 가지 오류가 있었다. 킹스메이커가 눈앞에서 상대를 놓칠 거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쾅-!

“아, 아니….”

희연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입을 열었으나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거대한 검은 낫이 나무에 직각으로 박혀 있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제 눈을 의심했다.

그 낫이 꿰뚫은 나무의 바로 옆에 하얀 로브로 꽁꽁 싸맨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더. 태연하게 낫을 날린 킹스메이커는 방긋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짠! 잡았어요!”

“…….”

어쨌든 잡은 건 잡은 거였으므로 희연은 대화를 시도했다.

“혹시 헬르벨이세요?”

상대는 희연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도 퀘스트의 주역을 위협한 건 아닌 듯했다.

그런데 NPC가 맞나?

뒤늦게 다른 NPC를 볼 때처럼 이름을 비롯한 기본 정보가 뜨지 않음을 눈치챈 희연은 질문을 바꿔 다시 물었다.

“혹시 유저세요?”

가능성은 높았다. 해괴한 방법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는 특수 지역. 그 방법을 알고 실행했다는 점에서 신원 미상 씨는 고인물이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옷이 너무 평범하다. 유저가 아닌 걸까. 상대에게서 반응이 나온 것은 다소 인내심 짧은 킹께서 나무에 박힌 낫을 붙잡았을 때였다.

“사랑과 명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목소리를 통해 상대가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요? 어, 사랑은… 그, 사랑이…죠?”

“그것참 성의 없는 대답인데.”

신원 미상 씨의 목소리에 언짢음이 가미되었다.

“사랑과 명예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뇌와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의 이름이지. 너 또한 사람인 이상 그 둘에 대한 욕망이 있을 거다.”

“그렇게 거창하게는 없는데요.”

물질적 욕심이라면 모를까 명예욕은 없었다.

“그냥 들어라.”

“?”

“대대로 인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에 목매는 존재로, 사랑과 명예는 그중에서도 가장 애타하는 것들의 이름이요, 또한 가장 빛바래기 쉽고 무너지기 쉬운 것들이지.”

“그렇구나…?”

“너는 이 숲을 돌아다니는 망령들을 보았나? 그것들은 생전의 집착과 욕심으로 이루어진 집합체, 아집으로 똘똘 뭉친 존재야.”

망령도 있나?

희연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하다 슬그머니 인벤토리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상대는 그런 희연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리며 행동을 멈췄다. 분명 두건을 뒤집어써 눈을 가렸는데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목 뒤로 소름이 끼쳤다.

지금껏 가벼웠던 태도는 모두 장난이라는 듯 날카롭게 벼린 듯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갑자기 뭐 하자는 거지?”

상대의 질문에 희연은 잠시 망설였지만, 시스템 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했다.

“그게요….”

조심스레 운을 떼며 그녀는 제 옆에 떠오른 창을 힐끔 보았다.

“몬스터시죠?”

[어둠 저항(패시브) : 악, 언데드 타입의 적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패시브 스킬이 활성화됐다는 알림.

묘한 침묵이 주변을 감쌌다. 몬스터로 추정되는 신원 미상 씨는 조용히 손을 들어 제 두건을 더듬었다. 바로 앞에서 희연이 들이민 총 따위 신경도 안 쓰다는 듯한 태도로. 정확히 말하면 희연의 위협을 비웃는다는 표현이 알맞았다.

“웃기는군. 날 이길 수나 있고?”

그의 물음에 희연은 솔직히 답했다.

“아뇨. 공격 미스가 날 것 같다고 생각은 하는데요….”

슬프게도 희연은 본인의 스텟을 아주 잘 알았다. 그 절망적인 딜량도 말이다.

원래 게임에선 인간의 모습을 닮을수록 몬스터는 강한 것이고 인류 현지인처럼 말을 잘할수록 센 것이 법칙이었다. 흰 두건은 말하는 몬스터니까 희연이 힘껏 쳐도 고작 공격 미스가 났던 딕톤보다도 강할 것이다.

그러나 희연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몬스터의 뚝배기 정도는 가볍게 깰 수 있을 것 같은 성배를 든 성기사 뉴비 없지!

그 또한 성 속성인 만큼 희연과 같은 어둠 저항 패시브 스킬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의 타입은 악 혹은 언데드. 즉, 뉴비 없지에게 매우 유리하다는 뜻이다.

“내가 네 뒤에 있는 것들보다도 더 강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

“아….”

희연은 그 말에 슬그머니 총을 내렸다. 그 모습에 혀를 찬 그는 늘어지듯 나무에 기대며 말했다.

“됐다. 흥이 깨졌어. 나는 할 말을 했고, 살아 있는 망령의 아집이 꺾일 때도 되었지. 그놈에게 전하도록. 희생자가 왔다. 그러니 머지않은 시간에 우리는 곧, 지옥에서 재회하리라.”

희생자? 그놈?

지금, 이 순간 나올 이름은 하나밖에 없었다. 희연은 성배를 높게 치켜드는 뉴비 없지를 대충 말리며 말했다.

“그놈이 헬르벨인가요?”

“그러면 여기 다른 놈이 더 있나?”

희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 숲의 인구밀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유령 숲에 헬르벨의 이웃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쪽은 누구신가요?”

몬스터라고 해도 종족명이 있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지성체라면 개별적인 이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이번에도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본인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너.”

그는 손을 들어 희연에게 삿대질했다. 길고 곧게 뻗은 그의 손은 고운 편이었으나 손톱이 검게 물들고 뾰족해 닿는 순간 상태 이상에 걸릴 것 같았다.

“너 또한 부디 잘 기억하기를. 유혹에 약한 자는 후회하고 절망하지.”

“…….”

“열심히 쌓은 신뢰도 사랑도 명예도 모두 빛바래고 남는 것은 우짖는 자의 설움뿐. 비난과 원망. 원색적인 그 감정에 둘러싸일 것이다.”

저주인가?

희연은 곧바로 상태 창을 살펴보았다. 따로 상태 이상에 걸렸다는 알림은 없었다. 말뿐인 저주였나 보다.

잠시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희연은 금세 마음이 평온해졌다. 흰 두건은 그런 모습에 또다시 혀를 찼지만 볼일은 여기까지라는 듯이 황금색의 불티를 흩뿌리며 모습을 감췄다.

“…와.”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본 희연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가 서 있던 부근의 숲이 꺼멓게 죽었다. 풀잎과 야생화가 거무죽죽하게 시들었고, 나무의 뿌리는 썩은 채 묘한 악취를 풍겼다.

까맣게 물든 뿌리를 기준으로 서서히 잎이 시들고 몸통이 썩어가는 나무를 바라보며 희연은 물었다.

“…방금 그 몬스터, 세요?”

“솔직히 말하면 세봤자 얼마나 세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예상보다 더 강할 것 같기는 하네요.”

역시 그런가. 혹시 모르니 당분간 혼자 다니지 말아야지.

희연이 홀로 결심을 하는 사이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는 손짓 눈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방금 본 악 타입 몬스터에 관해서였다.

낫 날릴 때에도 얌전하길래 낮잡아 보았는데 지금 눈앞에서 날리는 재를 보니 그 생각이 틀린 듯했다. 자신이 방심했다는 점에 속으로 혀를 차며 킹스메이커는 손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여차하면 미리 찾아내서 죽여 버리라는 뜻이었다.

행복한 오리 님의 겜생을 위해서!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가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사이 희연은 쭈그려 앉아 검게 변한 숲을 살펴보았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친절한 설명가 닉이 함께했다.

“이거 식물이 시든 건가요?”

“정확히 말하면 생기를 뺏겼다, 가 맞을 거예요.”

닉의 말에 희연은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조금 전과는 달리 아무런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원래라면 무슨 무슨 풀, 꽃, 나무라고 떠올랐는데 말이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야생화를 툭 건드렸다. 까맣게 변한 꽃은 희연의 손길이 닿자마자 바스러져 사라졌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죽음이 왔다 간 것 같은 풍경이다.

진짜 엄청난 몬스터인가 보다. 그런데 그 몬스터가 말뿐이지만 저주도 걸었는데.

그가 말한 희생자는 아무래도 퀘스트 진행자인 희연을 뜻하는 것 같았다. 희생이라 하면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그녀의 목숨밖에 없었다.

죽음밖에 안 남은 미래에 대해 빠른 포기를 했던 딕톤의 마음이 이랬을까. 뭔가 엄청난 것 같은 존재가 제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긴장이 안 된다.

희연은 검은 가루가 묻어난 손을 탈탈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몸을 일으키던 그녀를 닉이 붙잡아 다시 주저앉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탕!

“!”

그녀의 착각이 아니다. 분명 총소리였다.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몸을 틀자 보인 것은 땅을 헤집고 튀어나온 굵은 나무줄기였다. 그것을 소환한 것으로 추정되는 닉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무슨 상황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의 입이 열렸다.

“<장미의 저주>”

콰드득-!

땅을 헤집으며 튀어나오던 나무줄기의 수가 늘었다. 그것들은 서로 얽히더니 그들을 중심으로 둥글게 피어올라 돔의 형태를 취했다.

희연은 빽빽하게 얽힌 나무줄기 틈새로 조심스레 밖을 살펴보았다. 시끄러운 총소리가 숲을 울리고 있었다. 총을 쏘는 상대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명이 아닌가?”

적이 한 명이라고 하기엔 사방에서 총소리가 울리는 중이었다. 킹스메이커는 낫을 들고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고 뉴비 없지의 손에서는 성배가 빛나고 있었다. 둘 중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불투명한 막이 그들에게 향하는 총격을 막아주었다.

희연은 초조함에 총을 들었다. 뭐라도 해보기 위해서였다.

힐러니까 일단 버프를 걸어줘야 하나? 그런데 이 거리에서 저 두 사람에게 버프를 걸어 줄 수 있나?

그녀가 내다보던 줄기 사이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튀어나온 것은 그때였다. 반투명한 그것이 반갑다며 손을 흔들었다.

“악!”

놀라 뒤로 물러나던 희연은 실수로 닉의 발을 밟았지만, 너무 놀라 사과하는 것도 잊었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희끄무레한 것이 다시 손을 흔들었다.

“어린… 애?”

빼꼼 고개를 내민 어린 여자아이. 정확히 말하면 여자아이 유령. 고스트니, 유령이니, 심지어 망령이 있다는 소리도 듣기는 했지만 정말로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총격전이 벌어지는 이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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