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단발머리의 여자애는 거꾸로 뒤집힌 채 줄기 안에 숨은 희연을 보더니 무어라 말하듯이 뻐끔뻐끔 입을 열었다. 그러나 대화가 전달된 방식은 말이 아니었다.
[??? : 내가 도와줄까?]
마치 번역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알림창이 떠올랐다. 자신과 옆에 뜬 알림창을 번갈아 보는 희연에게 아이는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어!”
찾았다!
하얀색 일색인 옷차림. 닉과는 달리 완연한 흰색인 긴 머리카락.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에 들린 기다란 장총은 나무의 빛을 받아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
아니. 하얀색 머리가 아니다. 하얗다고 생각했던 머리가 검게 물들었다. 금색으로 물들었다. 붉은색으로, 연둣빛으로, 남색으로 모래색으로.
길어졌다, 짧아지고 다시 길어졌다. 그 모든 것이 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변화한 것들이었다.
그 많은 신관들이 왜 헬르벨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심지어 머리카락 색도 눈 색도 모두가 다르게 말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희연은 왜 그들이 그렇게밖에 기억할 수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흐릿하게 보이는 얼굴. 바뀌는 머리색.
눈은 무슨 색이지? 바다 빛, 달빛, 불꽃의 색과 초목. 아니 하얀색, 이번에는 검정.
정확하게 보이는 것은 남자가 들어 올리는 총구의 방향. 그것이 향하는 곳은 눈이 마주친 희연이었다.
탕-!
“…엄마야.”
희연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눈앞에 화사하게 피어난 자그마한 꽃송이가 오므렸던 꽃잎을 활짝 펼쳤다. 그 안에 담겨 있던 총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간신히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줄기 사이를 저 거리에서 정확히 겨냥해 총을 쏜 인간이 대단한 걸까, 그걸 또 작은 꽃 한 송이로 맞받아친 요정닉이 대단한 걸까.
한 방에 헤드샷, 원 킬, 로그아웃당할 뻔했던 희연은 아연해진 기분으로 깔깔 웃는 낯을 한 아이를 보았다.
[??? : 바보! 바보! 그것도 못 피한대요!]
아이는 한참을 그렇게 웃더니 춤추듯 날아올라 사라졌다.
총격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헬르벨로 추정되는 남자가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밑으로 늘어트리자 사방에서 울리던 총소리가 멎었다.
닉은 천천히 나무줄기를 거두었고, 두 부길마를 감싸던 방어막도 사라졌다.
“너희는 누구지?”
천천히 걸어오는 남자에게선 경계가 느껴졌으나 또다시 공격을 할 기세는 아니었다. 희연은 그가 가까이 오자마자 서둘러 정보를 확인했다.
[전투 신관, ??? ?? ‘헬르벨’]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에 희연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 닉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임드 NPC….”
“네?”
희연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NPC 등급 감별 스킬을 패시브로 장착하고 있던 고인물들에게는 헬르벨의 또 다른 정보가 떠올랐다. NPC 주변을 떠도는 기류의 색으로 구별하는 정도였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황금색 기류. 헬르벨이 이 게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이 나라의 왕과 비슷하다는 의미였다. 직함으로 인해 황금빛 기류를 얻은 왕과 달리 그는 신관.
그 이야기는 개인의 무력이 그만큼 대단하거나 그와 관련된 퀘스트의 영향력이 넓다는 의미였다. 왕이라고 해도 일단 개기고 봤던 킹스메이커조차 공격하지 않고 텀을 두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킹스메이커는 싸울 의지가 없다는 의미로 낫을 내리며 운을 뗐다.
“미리 말하자면 우리는 싸울 생각이 없어요, 신관님.”
“…….”
“신관님도 우리랑 싸우는 것을 꺼리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 위협사격만 했던 거라고 생각하는데.”
일단 전투 불능으로 만들고 자신에게만 원활한 소통을 하는 것이 킹스메이커의 방식이었으나 이것은 그녀의 것이 아닌 오리 님의 퀘스트였다.
최대한 평화로운 방식을 지향해야 했다. 그러나 상대가 응해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법.
“그 총의 이름이 대화인가요, 신관님?”
헬르벨은 다시 총구를 들어 그들을 겨냥했다. 냉각된 분위기의 침묵을 뚫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우, 우리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
“…요.”
뒤늦게 공손함을 찾는 말에 순간이지만 헬르벨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희연은 그 모습에 대화가 통하는 건가 싶어 희망을 품었다.
비록 킹스메이커가 숲이나 나무를 태워 숲속 생활을 하고 있을 헬르벨의 이목을 끌어보자 라고 제안하기는 했으나 불발이었다.
에빌론에서 하지 말라는 짓을 했을 때와는 달리 말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정말로 아무 잘못이 없었다!
다행히 묘하게 일렁거리던 킹스메이커의 주위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헬르벨의 손끝 또한 얌전히 총의 방아쇠에서 떨어졌다. 싸우지 않겠다는 무언의 눈치가 오갔다.
닉의 뒤에 숨어 안전을 챙기던 희연은 슬그머니 앞으로 나와 헬르벨을 관찰했다. 딱 기본 장비에 불과한 그녀의 것과 달리 그의 장총은 멋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총을 잡은 손은 희었고 관절이 크고 손가락이 길었다. 잦은 화상을 입었는지 자세히 보니 손이 얼룩덜룩했다. 그러나 워낙 타고난 모양새가 예뻐서 그런지 곱다는 생각이 드는 손이었다.
확실한 인상을 주는 손과 달리 그의 얼굴을 여전히 인식되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낯설어지고 마는 얼굴.
죄를 지은 자의 후손. 영원히 그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할 이방인이 되는 저주를 받은 풋낯의 사제와의 만남이었다.
***
“그러니까 우리는 신전의 부탁을 받고-.”
“나가라.”
“아니, 일단 대화 좀….”
“필요 없다. 이 숲을 나가라.”
“…되게 단호하시네요.”
헬르벨의 경계를 푼 것은 좋다. 헬르벨이 희연을 경계하는 것을 바보 같은 일이라고 판단한 것도 좋은 일이다. 다만 이렇듯 대화 불가능 상태를 바란 적은 없었다.
“못됐다. 우리 오리 님이 저렇게 말을 거는데 모른 척하고.”
“그러니까 말이야 수군수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소곤소곤.”
“…수군수군 소곤소곤 소리 내서 말하지 마.”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가 바로 뒤에서 뭐라 하든 말든 헬르벨은 아랑곳하지 않고 까맣게 변한 숲을 정화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빛이 스며들자 시들었던 것들이 천천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위협이 되지 못하는 희연과 제멋대로인 어린 소녀 유령이었다.
[??? : 우와 우와! 예쁘다! 한 번만 더 보여달라고 하자!]
“싫어.”
단호한 희연의 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름 모를 유령은 주먹을 꼭 쥐고 희연을 투닥투닥 때리는 모션을 취했으나 실제로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본능이 공격인 고스트 타입 몬스터들과 달리 소녀 유령은 죽은 NPC였기에 물리적인 무언가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소녀 유령 본인이 모를 리가 없음에도 이러는 건 그저 투정일 뿐이었다.
헬르벨은 희연과 소녀 유령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예의 빛을 흩뿌려 주었다. 소녀 유령은 좋다고 끼악끼악 소리를 내며 허공을 날아다녔다.
그 해맑은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얼굴에 흐릿하나마 은은한 평온이 맺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얼굴을 보며 판단할 수 있는 건 그가 천성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은근히 유한 구석이 있었다.
“숲을 까맣게 만든 게 누군지 아시나요?”
“…….”
“…말을 전해달라고 했어요. 머지않은 시간에 우리는 곧, 지옥에서 재회할 거라고.”
곧게 뻗어 있던 손끝이 희연의 말에 움찔거렸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 희연의 입장에서 그의 심리 상태를 훔쳐볼 수 있는 것은 손끝과 눈빛, 목소리 정도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정하고 느릿했던 그의 어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어디 있지?”
“네?”
“그자.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다.”
목소리의 결에 맺힌 것은 명백한 분노, 회환. 그리고… 두려움.
희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그녀의 몸짓에 헬르벨은 이를 악물었으나 금세 침착한 낯으로 돌아왔다.
분명 얼굴은 안 보이는데 그런 표정들이 확실히 느껴진다는 게 기이했다. 신전의 사람들이 헬르벨을 멀리한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이질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숲을 나가도록. 너와 같은 어린 신관은 그자의 숨결 한 줌으로도 타락하고, 죽고, 무너질 것이다.”
“괜찮아요. 저는 이방인이라서 안 죽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안 죽는 거 뻔히 알면서도 걱정한다. 손에 턱을 기댄 희연을 따라 소녀 유령 또한 옆에 앉아 헬르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두 쌍의 시선을 잠시간 마주 보던 헬르벨은 생기 잃은 숲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선을 그었다. 희연이 여기서 취해야 할 올바른 방법은 무엇일까.
당연히 배 째라 우기는 것이다.
“못 나가요.”
“?”
“사실 신전 부탁은 핑계였고요. 제가 개인적으로 당신을 만나러 온 이유가 더 커요.”
[낭만의 악의 : 죄인의 후손 헬르벨….
‘낭만과 악의는 한 끗 차이’]
[퀘스트 조건 : (1) 헬르벨에게 인정받기 (2) 헬르벨의 제자 되기 (3) ???(선행조건을 달성해야 완료할 수 있습니다.)]
[보상 : ?????
(실패 시 당신은 영원히 ?????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희연이 게임을 잘 알지는 못한다고 해도 고인물 셋에게 공증받은 네임드 NPC가 주는 퀘스트를 말 몇 마디에 포기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또한 복잡한 사정이 있어 보이는 그를 두고 이대로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헬르벨. 참고로 저는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라서요.”
헬르벨이 포기하고 희연을 제대로 상대할 때까지 매일매일 이곳에 올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그가 그 정성에 감복하던 귀찮아서 받아들이든 간에 결국 승리하는 것은 희연일 것이다.
희연은 슬그머니 손을 뻗어 그가 한 것처럼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등불의 빛>을 사용합니다. ‘빛 아래 사라지는 것은 없으니’]
헬르벨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환하고 따스한 빛이 꽃 한 송이를 살려냈다.
희연이 하는 꼴을 옆에서 지켜보던 헬르벨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희연이 옆에 놔두었던 그녀의 총을 들어 손에 쥐여 주었다.
“?”
“다시 해보도록.”
“아, 지금은 못 하는데. 쿨타임이….”
“…….”
다행히 헬르벨이 버프를 걸어주어 스킬 쿨타임이 리셋되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스킬을 사용하니 조금 전과는 달리 빛이 총구로 응축되었다.
헬르벨은 그녀의 손을 움직여 나무의 밑동으로 총구가 향하도록 만들었다.
“지금.”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들리는 그 말에 희연은 무의식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정확히 나무의 밑동에 박혔고 빛으로 구성된 총탄이 깨지며 빛을 흩뿌리자 나무가 완전히 살아났다.
조금 전 희연이 스킬을 썼을 때와는 다른 효과였다.
“…….”
죽은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경이롭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희연은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회복이랑 버프 스킬도 총으로 쏴야 효과 있던 거였어?
그러면 이제 누군가를 치료할 때나 버프를 걸어줄 때면 나 믿지, 믿지? 한 다음에 총으로 쏴야 한다는 건가?
딕톤을 처치할 때도 버프 스킬을 사용했었다. 스킬을 사용하기는 했는데….
그때도 제대로 된 버프가 들어오지 않은 건가?
청산가리나 닉이 그때 별말 안 했던 것을 보아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힐이나 버프를 걸 때는 총만 들고 있어도 되는 것 같았다.
무기가 아예 없으면 스킬 효과가 미약하게 발동되는 것 같고.
희연이 나름 생각의 정리를 하는 동안 세 고인물은 멀리서 두 신관의 모습을 지켜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가장 열정적으로 대화에 임하는 것은 뉴비 없지였다.
“아니, 진짜 몰랐다니까? 신전에서도 저런 네임드 NPC가 있다는 사실을 나한테 알려준 적이 없어. 전투 신관이라는 직책도 난 이번에 처음 들었다고.”
“네가 모르면 누가 아는데. 너 교황이랑 쎄쎄쎄할 정도로 친하다고 했잖아.”
“그래. 그렇게 친한데도 안 알려줬다고! 아니, 그리고 교황이 나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라니까? 난 성기사지 신관이 아니야.”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닉은 눈을 굴려 다시 희연과 헬르벨을 보았다.
몇 번 더 헬르벨의 도움을 받아 스킬을 써보다 이번에는 마나가 떨어져 물약을 마시고 있는 희연의 모습이 보였다.
그 짧은 마나통과 사격이 아닌 총 자체를 휘두르는 걸 더 선호하는 모습에 허무한 얼굴을 하는 헬르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