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뉴비를 애지중지하는 둘이 괜히 시선을 떼고 말싸움을 하는 게 아니었다. 헬르벨에게는 적의가 없었다.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닉의 물음에 킹스메이커는 낯을 찌푸렸다. 그녀의 고민은 하나였다. 여차할 때 본인이 헬르벨을 손쉽게 이길 수 있는가 없는가.
물론 이기는 거야 자신이 있지만, 문제는 그 방식.
킹스메이커는 그녀의 소듕한 눈오리에게 친절하고, 멋있고, 지성적이며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치사할 정도로 수단 방법 안 가리는 원래 방식을 보여주기에는 지금껏 노력한 이미지 메이킹이 다소 아쉬웠다.
여차하면 일단 다 죽이거나 행동 불능으로 만든 다음에 원만한 합의를 볼 거지만, 다행히도 지금 당장은 그런 막 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을 듯했다.
“일단은 두고 보는 쪽으로 생각해야겠죠. 우리 오리 님의 퀘스트는 소중하니까.”
킹스메이커의 말에 뉴비 없지는 고개를 끄덕였고 닉은 한숨을 내쉬었다.
***
큼직큼직한 고기와 자잘한 야채가 들어간 수프를 떠먹으며 희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름 없는 달빛의 요람에 들어온 지 오늘로 벌써 삼 일째였다. 게임 시간 기준으로는 거의 일주일을 머물고 있다고 보면 된다.
본인의 오두막으로 돌아가던 헬르벨을 쫄랑쫄랑 따라간 희연은 그의 집 바로 앞에 살림을 차렸다.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희연에게 남아도는 것이 시간!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을 정도의 헬르벨과의 호감도 쌓기가 최우선 사항이라고 봤을 때 이는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
맨날 보면 결국 정이 쌓이니까! 나중에 불쌍해서라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니까! 끈질기고 귀찮아서라도 말 한 번 걸 테니까!
물론 그 일주일이 쉬웠다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문제됐던 것은 공복도. 게임 시작하자마자 이곳저곳 바쁘게 돌아다닌 희연의 인벤토리에는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신나게 돌아다니느라 상점 같은 곳 한 번 간 적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튜토리얼 보상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가 있었지만 금세 동이 났다.
아타락시아에서 샀던 간식은 뱁새한테 뺏긴 지 오래였다. 자연의 섭리대로 그녀에게는 아사의 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는 인벤토리 꽉꽉 채워서 돌아다니던 세 고인물 덕분에 해결되었다. 식재료부터 완제품까지. 길드에 요리사를 둔 그들은 다양한 요리로 희연에게 숲속 피크닉을 즐기게 해주었다.
두 번째 위기는 추위였다.
해가 없는 이 숲은 자체 발광 달빛 나무들이 있다 해도 온기는 없었다. 항상 깜깜해 구별되지는 않으나 분명 낮과 밤의 경계가 있었고 밤이 될 시 급격하게 기온이 낮아졌다.
이 숲의 식물이 죄다 색이 여리고 비실비실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위와 같은 방법으로 해결됐다. 고인물이 셋이나 있으니 웬만한 건 다 해결되더라. 희연은 마법사와 성기사와 테이머가 그렇게 집을 뚝딱뚝딱 잘 짓는 직업인지 몰랐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나무를 땅에 박고 그 위에 비단 천을 걸어 지붕과 벽을 만들더니 푹신푹신한 카펫과 쿠션을 까는 것으로 임시 거처를 완성했다.
빨간색의 훈기가 도는 자갈을 밑에 까는 것으로 온도조절까지 끝냈다. 그렇게 희연은 제법 풍족한 숲속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맛있는 거 먹으며 숲속에서 폭신한 카펫 위를 뒹구는 지금 이 상황은 느긋하게 게임하며 힐링해야지, 라고 생각했던 초기의 결심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이곳에서는 동글뽀쟉 나비보벳따우가 성립되었다. 닉이 제 무기인 리라를 꺼내 연주를 할 때면 하얗게 빛나는 동물들이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힐링의 시간을 보낼 때면 희연은 때때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열심히, 그리고 바쁘게 게임을 하게 됐더라…?
잠시간 지난 행적을 생각해 볼 때면 그냥 처음부터 그녀의 계획은 삐걱거렸다는 결론만 나왔다. 이게 다 백희준 탓이다. 다만 지금 게임을 하는 방식이 크게 나쁜 것도 아니고. 고인물들이 어이구야 놀아주는 것이 솔직히 재밌기는 했다.
결국은 희연이 하겠다는 방식에 다 맞춰주기도 하고. 심지어 숲속에서 헬르벨이 포기할 때까지 버티겠다는 희연을 위해 그들 또한 이곳에 머물러 주기로 했다.
물론 그 고인물들도 본인들이 개인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있어 이따금 숲을 나가고는 했다. 예를 들면 일퀘라든가, 보스돌이라든가 하는 것들.
그럴 때면 가끔은 희연 혼자 숲에 남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가 유일하게 헬르벨과 대화를 할 만할 때라 보면 되었다. 그는 홀로 있는 희연을 볼 때면 한겨울 성냥 하나에 의지하는 성냥팔이를 보는 듯한 눈으로 보고는 했다.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세 명을 동물 유기자를 보는 듯한 눈으로 보기도 했다. 졸지에 유기당한 뉴비가 된 희연은 본의 아니게 그에게 알 수 없는 동정심을 사기도 했다.
짐작하건대, 업적으로 인한 과한 감정 부여일 것이다.
“좋게 작용해서 상관은 없지만….”
현재 먹고 있는 수프 또한 지나가던 헬르벨이 적선해 주고 간 것이었다. 물론 그는 희연이 그릇을 받자마자 본인의 오두막으로 들어간 뒤였다.
[??? : ㄴr 랑 ㄴ아 줘!]
숲속 자취 경력이 긴 헬르벨은 상당히 요리를 잘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희연은 그가 주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 재료들을 어디서 구해왔나 싶었다.
달빛의 요람 숲에 동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동물 모두가 일종의 고스트 타입이었다. 물리적인 몸이 없다는 뜻이었다.
또한 채소나 과일을 구할 수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해가 없다는 것은 곧 식물이 영양소를 흡수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 되고 이렇게 농장에서 갓 따온 것 같은 채소는 자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오두막 안에서 고기와 채소를 자체 생산해 내는 게 아닌 이상에야 어디선가 생필품들을 구해 온다는 뜻이다.
[??? : 모ㄹ척 하ㅈ마! ㄱ기서 ㄴ ㅏ오란 말이ㅑ!]
어쨌든 희연은 일주일 동안 달빛 요람 숲에서 지내면서 알게 된 것들도 제법 많았다.
그중에는 킹스메이커조차 흥미로워하는 내용도 있었다. 첫째로 이곳은 달빛이 생성되는 장소라는 것.
말 그대로 달의 달빛을 숲이 흡수한 것이 아닌 오히려 반대로 이곳에서 생성된 달빛을 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가져다 쓰는 거라는 것이다.
지역의 이름대로 이곳은 달빛이 만들어지는 요람이었던 것이다. 숲을 훼손하면 빛나지 않는 달이 뜰 거라던 마담의 예측이 사실이었던 것으로 판명 났다.
또한 이 숲에는 제법 많은 수의 유령들이 돌아다녔는데, 그중 동물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사람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경우 대부분은 아이였다. 헬르벨은 순수하고 죄 없는 자들만이 이곳에 머물렀다 갈 수 있다고 했다.
고스트 타입은 태양 아래 존재하지 못하고 밤을 헤맨다. 밤을 무서워하는 어린아이들, 어둠을 모르는 동물들이 달빛에 홀려 이곳에 들어오고 위협 없는 이 평온의 숲에서 자신의 죽음을 천천히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여기 있는 유령들이 마냥 착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괜히 순수악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이 아닌 게 너무 순수해서 제 행동이 악의인지도 모르는 이들이 있었다.
너무 어린애인 경우가 특히 그랬다.
[??? : 너 나빠!]
물론 저 멀리서 말을 거는 소녀 유령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었다. 희연은 손을 들어 대충 흔들어 주었다. 그 모습에 약 올라 악을 쓰는 소녀 유령의 곁으로 땅에 박힌 정화석이 보였다.
헬르벨의 거처 주변에는 제법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정화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닉이 사왔던 자잘 자잘한 것이 아닌 바위만 한 크기의 정화석은 뉴비 없지의 말에 따르면 교황의 방에나 있을 법한 크기라 했다.
어쨌든 그 정화석의 주변으론 유령들이 다가오지 못했다. 만일 악의를 품은 유령이 나타나면 희연은 그대로 로그아웃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화석 결계 안에 있다면 안심이었다. 불안한 눈빛은 하되 고인물 세 사람이 희연을 여기 두고 바깥을 오고 갈 수 있는 것도 이 정화석 덕분이었다.
마지막 남은 수프 한 숟갈을 입에 넣은 희연에게 어느새 다시 오두막에서 나온 헬르벨이 손을 내밀었다. 희연은 자연스럽게 손에 쥐고 있던 나무 그릇을 그에게 넘겼다.
“다 먹었으면 이만 나가도록.”
그는 오늘도 덤덤한 말씨로 했던 말을 반복했다. 희연 또한 똑같은 답을 들려주었다.
“안 돼요!”
“…….”
헬르벨의 오늘의 머리색은 달콤 폭신할 것 같은 옅은 분홍색으로 현실의 희연과 비슷한 색이었다.
[??? : 으에에에엥!]
“…….”
“…하아.”
헬르벨은 한숨을 내쉬었고 희연은 어깨만 으쓱였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정화석 때문에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소녀 유령이 주저앉아 잉잉거리고 있었다.
슬쩍 손을 들어 다시 흔들어 주니 더 난리를 피웠다. 희연은 손을 내렸다.
“저 여기서 나가면 바로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다시 살아난다는 걸 안다만?”
“그래도….”
“저 아이에게 악의는 없으니 죽지 않아.”
“그쪽을 말한 게 아닌데….”
물론 헬르벨의 나가라는 의미는 이 숲을 완전히 나가 버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로만 그랬다. 정말 쫓아내고 싶었다면 희연이 혼자 있을 때 죽이는 것으로 해결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희연에게 총을 들이밀지 않았다. 오히려 일주일이라는 그 시간 동안 두어 번 정도 희연의 사격 자세를 봐줬다. 욕만 먹었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첫 만남을 생각해 본다면 나름 발전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곳은 사람이 그리워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그녀를 못 본 척 무시하던 헬르벨이 시간이 지날수록 유해지는 것이 어쩔 수 없을 만큼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얼굴만 보면 숲에서 나가라고 하는 그가 조금 이해되지 않았지만, 희연은 나름 이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또 숲 정화하러 가요? 아니면… 사냥 나가는 거예요?”
희연은 헬르벨의 행색을 훑어보며 물었다. 그녀가 괜히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헬르벨은 숲을 떠돈다. 까맣게 변해 시든 곳을 돌보고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을 일생의 업으로 삼았다는 듯이 굴었다. 달빛 요람의 숲의 숲지기인 것처럼.
또한 숲을 그렇게 만든 범인을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보고는 했는데, 그럴 때면 이전에도 보았던 두려움, 분노와 같은 표정들을 엿볼 수 있었다.
“…….”
이 퀘스트의 조건은 세 가지. 헬르벨의 인정, 그의 제자가 되기. 나머지 하나는 그 둘을 충족시켜야지만 알 수 있다.
희연은 말없이 정화석의 범위 밖으로 나가는 헬르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더 이상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화석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멈추어 입을 뗐다.
“나랑 뭐 하고 놀고 싶은데?”
[??? : 나랑 놀아주게?]
정화석의 영향으로 인해 가까이 있지 않으면 유령인 그녀의 말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는다. 멀쩡하게 전달되는 글을 읽으며 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 밖으로는 못 나가.”
[??? : 왜?]
“잘못하면 죽으니까.”
숲에는 악령이 있고 그 악령을 희연은 이기지 못한다. 지금도 정화석의 경계선에 그녀가 서 있는 것이 느껴지자마자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 유령이 슬그머니 뒤를 돌았다. 오늘로 나흘째다. 숲에 숨어 이쪽을 바라보는 텅 빈 눈구멍을 보는 것이. 산골 꼬마 요정 정도 되어 보이는 크기의 작은 무언가가 나무 뒤쪽에 달라붙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해진 형체는 없다. 소녀 유령처럼 희끄무레하면서도 검었고 액체 괴물처럼 흐느적거리다가도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처럼 모양을 갖췄다.
헬르벨이나 다른 세 사람이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다가 희연만 있으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유령 친구는 오늘도 입맛을 다시듯 검은 눈구멍으로 이쪽을 보았다.
“나 나가면 저거한테 바로 끌려가 죽을걸.”
[??? : 그건 그래! 너 무지 약해!]
사실이긴 했지만 솔직히 상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