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나 너랑 안 놀래.”
[??? : 가지 마! 나랑 놀아줘! 나 심심해! 잘못했어!]
한숨을 내쉰 희연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사실 희연 또한 할 일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소녀 유령은 그녀가 자리를 잡자 안심해서 방긋 웃었다.
소리 없이 히히 웃는 유령에게 같이 웃어준 희연은 말을 시작했다. 유령 하나와 사람 하나가 할 수 있는 놀이라고 해봤자 대화밖에 없었다.
“헬르벨이 여기서 지낸 지는 얼마나 된 거야?”
[??? : 너는 또 그 신관에 대한 것만 물어보는구나?]
“그거 말고 우리가 딱히 할 얘기가 없으니까?”
소녀 유령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그에 대해 반박은 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희연이 소녀 유령과 대화 놀이를 한 지 제법 되었다. 상대는 기껏해야 아홉 살배기 어린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건 이틀 만에 끝났다.
춤을 좋아했던 꼬마. 자신과 똑 닮은 여동생이 있었고, 집이 가난해 나무껍질로 만든 신발을 신었다. 예쁘고 튼튼한 가죽 신발이 갖고 싶었다.
그것이 끝.
소녀 유령보다 더 할 말이 없는 것이 희연이었다. 그녀는 카나리아 숲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산골 꼬마 요정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고 나니 더 이상 할 만한 대화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한 유령과 한 인간은 대화 주제로 헬르벨을 잡았다.
그 대화에서 희연이 알게 된 것은 유령에게는 헬르벨의 진짜 모습이 보인다는 것. 그리고 헬르벨이 이 숲에 들어와 사는 이유는 신전의 압박이나 인간관계로 인한 문제 같은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
탕탕탕-!
[??? : 시작됐네.]
“그러게.”
오늘도 총소리가 울렸다. 이곳저곳에서 울리는 총소리를 들으며 희연과 소녀 유령은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해괴한 방법 없이는 들어올 수 없는 특수 지역. 나가는 방식 역시 비범하다. 그나마 나갈 수 있는 건 사람뿐.
유령들은 달빛을 타고 들어왔으나 다시 나갈 수는 없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이름 없는 달빛의 요람은 거대한 감옥이었고 거대한 사냥터였다.
어느 신관과 그 신관을 죄인으로 만든 한 악마의.
[낭만의 악의 : 죄인의 후손 헬르벨. 그는 자신의 죄악을 경멸하고 씻어내려 했으나 그의 재능은 그것을 거부했다. 잊히지 않는 죄악에 절망한 그에게 평온을 가져다주자.
‘낭만과 악의는 한 끗 차이’]
그의 평온은 그 악마를 사냥하는 것이다.
“그때 봤던 신원 미상 흰 두건이 악마인 것 같기는 한데….”
정황상 악마로 추정되는 건 하나뿐이었다. 문제는 악마 사냥을 도울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유는 많았지만 그중 가장 비중을 차지했던 이유는 헬르벨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악마 사냥을 도와주겠다던 킹스메이커의 말을 거절했다. 뉴비 없지에게는 신전에 알리지 말라는 경고까지 했다. 잘은 모르겠으나 무언가 복잡한 사정이 있는 듯했다. 닉은 애초에 부러 먼저 돕겠다 나서지를 않았고.
그리고 희연은… 퍽이나 돕겠다. 그녀는 스스로의 경지를 알았다. 공격 미스의 충격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깊게 남은 상태였다.
[??? : 그 신관한테 주는 관심만큼 나한테도 관심 좀 줘봐!]
“너는 알아서 그 관심을 받아 내잖아.”
희연의 말에 소녀 유령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상처받은 얼굴이 아닌 깨달았다는 뜻의 충격이었다. 과장된 표정을 지은 그 얼굴을 보면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장난기 많고 조금 제멋대로이기는 했지만, 성정이 그리 나쁜 유령은 아니었다. 그래, 확실히 나무 뒤에서 입맛 다시는 애보다는 성격이 매우 좋아 보인다.
일단 그녀를 먹으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
먹이로 안 보고 있는 거 맞겠지? 우리는 친구 친구 하다가 돌변해서 너는 내 먹이일 뿐이얏! 하면 어떻게 하지…?
희연은 다소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뗐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도 날 먹잇감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니지?”
희연의 질문에 소녀 유령은 짓궂게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희연도 웃어 보았다. 뉴비 없지가 돌아오면 유령 퇴치하는 법이나 물어봐야겠다.
“우리 다른 얘기나 하자.”
[??? : 무슨 얘기를 할 건데?]
“…그러게. 이참에 유령에 대해서나 배워볼까?”
희연은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소녀 유령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희연이 조금 더 본인에게 신경을 써보겠다는 의미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달빛의 요람은 어린 영혼을 위한 위로의 장소였으나 그만큼 고요하고 재미없는 곳이었다. 유일한 산 자인 헬르벨은 유령들과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소녀 유령에게 있어 희연은 좋은 놀림거리였고 대화 상대였다. 그 유일한 대상이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심층적으로 알고 싶다고 하다니!
물론 희연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소녀 유령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 : 좋아! 내가 유령에 관하여 알려줄게!]
“…?”
그러나 힘차게 주먹 쥔 손의 힘을 다시 풀 때까지 소녀 유령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본인이 일단 유령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령을 잘 아는 것이 아니었다.
아는 거라곤 유령은 공중에 뜹니다. 본능이 공격인 몬스터 유령이 아닌 이상 물리력도 없습니다. 말을 하지 못합니다, 정도.
입을 꾹 다문 소녀 유령의 모습을 지켜보던 희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사실 잘 모르지?”
[??? : 아닌데. 나 완전 잘 아는데? 네가 무서워서 벌벌 떨까 봐 배려해 주는 거야!]
허세 부리는 모습이 안쓰러워 희연은 소녀 유령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유령이라고 해서 유령의 구조에 대해 잘 알면 희연은 사람이니 사람의 구조에 관하여 잘 알고 있어야 했다.
물론 그녀에게는 인간은 영장류, 이족보행,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도의 지식만 있었다.
끝까지 고집 어린 얼굴을 하는 소녀 유령과 시간을 보내다 희연은 나름 궁금한 것을 생각해 냈다. NPC는 죽으면 모두 귀신이 되는지. 이곳에 오지 못한 다른 귀신들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여전히 나무 뒤에 숨어 나올 생각도 갈 생각도 없는 저 유령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말이다.
소녀 유령은 희연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의외로 명쾌하게 답을 들려주었다.
첫째로, NPC 모두가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한이 많은 자, 본인이 죽었는지도 모르는 자. 무언가 이유가 있어 차마 떠날 수 없는 자와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강제로 남아 있는 자들만이 유령이 된다.
둘째로, 이곳에 오지 못한 귀신은 몸을 유지하는 힘이 사라지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힘을 얻어내 살아있는 자들의 앞에도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가 유저의 입장에선 특별한 퀘스트를 주는 유령 NPC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어떻게 보면 지금 당장 희연에게는 가장 중요할지도 모를 정보였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저 유령 친구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일종에 힘 싸움의 최종 승리자다, 뭐 이런 거네?”
[??? : 그렇지! 가끔 보이는 호전적인 유령들은 서로 싸우고 잡아먹어.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는 거야. 그게 바로 저런 애들인 거지!]
유령들끼리 서로서로 잡아먹을 수 있다. 유령이 유령을 먹을수록 이지가 사라지고 악의만 남는다. 나무 뒤에 서서 희연을 지켜보고 있는 존재 또한 그런 케이스로, 일종의 만들어진 악령이라고 볼 수 있었다.
[??? : 근데 그런 악령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기들끼리는 만족을 못 해, 살아 있는 걸 먹고 싶어 하거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던 지금까지와 달리 어떻게 보면 나름 고급 지식이 셈이었다. 시스템 또한 그것을 인정했는지 새로운 알림창까지 떠올랐다.
[<죽은 자의 이야기> 업적 달성!]
[업적 효과 :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당신은 그들의 한과 바람을 다른 이들보다 빠르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운이 나쁘면 악령이 달라붙을 수도 있습니다.)]
그 악령. 지금도 달라붙은 것 같은데…?
“이런 업적은 흑마법사나 네크로맨서가 어울리지 않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문제의 악령을 보았지만 별다른 알림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아마도 저쪽은 이미 바라는 것조차 없는 이지 없는 악령이라 그런 듯했다.
[??? : 그러니까 너는 그 정화석 밖으로 나오면 바로 잡아먹히게 된다는 거지!]
“너 되게 즐거워 보인다.”
역시 유령 퇴치법을 알아내야겠다.
나름 소녀 유령과 하하 호호 떠드는 사이 숲속에 울리던 총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아마 오늘도 헬르벨이 악마를 놓친 듯했다.
이제 곧 그가 돌아올 것이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시작해 헬르벨의 관심을 받아낼까 하는 고민을 하던 그때였다.
쩌적-.
“…?”
설마… 아니지?
희연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소녀 유령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희연이 보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아. 망했네.”
커다란 바위 크기의 정화석이 티끌 없는 우유색이라 그런 걸까. 그 위에 새겨진 금이 유난히 선명했다. 희연은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그것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땅을 질질 끌면서. 텅 빈 그 검은 눈과 입으로 히죽 웃는 낯을 취하면서. 언젠가 이런 일이 예전에도 일어난 적이 있었다. 평화로운 숲속 배경에 갑자기 분위기 호러로 급변화했던 그 시절.
희연은 침착하게 에흐테를 꺼내 그 위에 올라탔다. 그러나 길드 채팅창을 켜 자판을 누르는 손은 덜덜 떨려 침착하고픈 그녀의 마음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주인의 의지를 배반한 손이 에흐테의 목을 와락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정화석이 완전히 부서졌다.
***
오랜만에 온 수도는 여전히 사치스럽구나, 생각하며 킹스메이커는 걸음을 옮겼다.
화려하고 값비싼 것들로만 꾸민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거리에 갑자기 등장한 낫을 든 알프스풍의 소녀는 상당히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왕성으로 가는 수도의 중심 거리는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유저들은 밟을 수도 없게 되어있었다. 유저들이 나타나면 기사단이나 경비대가 나타나 쫓아냈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당당히 왕성을 향해 걸어가는 킹스메이커를 막는 NPC는 없었다. 몇몇 눈살을 찌푸리는 귀족들은 있었으나 그들 또한 고개를 돌릴지언정 부러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심지어 왕성의 문을 지키던 병사 또한 묵묵히 앞만 볼 뿐 그 안으로 들어서는 킹스메이커를 제지하지 않았다.
킹스메이커는 이것이 바로 권력의 맛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평화롭게 피 튀기는 전쟁을 하고 있을 왕궁으로 들어갔다.
[칭호 <그림 리퍼(Grim Reaper) 공작(동화)> 소유자입니다.]
[제멋대로 리퍼 공작(패시브) : 시드론의 공작 그림 리퍼는 권리는 있되 의무는 없는 자다. (죽음을 각오한 것이 아닌 이상) 왕을 비롯한 직계 왕족이 아닌 이들은 그 누구도 공작의 앞길을 막지 않을 것이다.]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역시 본보기로 영지를 한 번 뺏어주기를 잘했다는 것을 그녀는 오늘도 느꼈다. 그 덕분에 불편해진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예를 들면 시드론의 왕과의 치열한 눈치 싸움이라던가 약해진 왕권으로 인한 문제점이라던가. 하지만.
“알게 뭐람!”
그녀는 권리만 누리면 되는 의무 없는 제멋대로 리퍼 공작! 오늘도 즐겁게 정보를 얻으러 왕실 서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소 오랜만에 보는 사서가 질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뿐히 무시했다.
그녀가 앞으로도 왕실이 열심히 모은 온갖 잡다하고 질 좋은 정보들을 쫍쫍 빨아먹는 이상 사서와는 영원히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었다.
외부 유출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어긴 것만 162번. 포기하지 않는 사서의 인내심을 그녀는 높게 샀다.
“오늘은 뭘 털어볼까나.”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킹스메이커는 신앙 쪽 저서를 모아놓은 책장을 향해 걸어갔다. 입으로는 뭘 털까 하는 말을 했지만 이미 그녀가 노리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