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악령의 모습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조그마하던 크기가 다시 커지며 옆에 있는 소녀 유령만큼이나 제 몸집을 키웠다.
손으로 추정되는 것이 희연을 향해 뻗어졌다. 마치 잡아달라는 듯이 말이다. 눈에서 방울방울 흐르던 눈물이 더 짙어지고 있었다.
[이름 없는 악령 : 왜 우리였어?]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녀의 말에 악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검은 몸에서 떨어지자마자 먼지처럼 잘게 쪼개져 사라졌다. 당장 공격할 기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름 없는 악령 : 아니야. 너야. 네가 갖고 있어. 나는 보았어. 우리는 보았지. 뱀. 너는 뱀이야. 느껴져. 차갑고, 나빠. 네가 뱀이야.]
“뱀? 뱀이라니 그게 갑자기 무슨…. 아.”
희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벤토리를 뒤졌다.
[어느 결사단의 수상한 배지 :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희연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 그나마 뱀과 관련된 물건은 이것뿐이었다. 진한 녹빛의 뱀이 새겨진 퀘스트 아이템.
그녀가 그것을 꺼내 손에 쥐는 것과 동시에 악령은 십자로 갈라진 입을 다시 쩌억 벌렸다. 그 모습에 희연이 반사적으로 다시 총을 들려던 그 순간이었다.
[숨겨진 퀘스트 <길을 잃은 아이들>의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업적 <죽은 자의 이야기>를 달성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이름 없는 악령’의 비화 확인 가능. 지금 확인하겠습니까?]
비화?
초보자 마을 놀에서도 보았던 것과 비슷한 문구였다. 다시 이지를 상실한 듯 달려드는 악령을 보며 희연은 일단 보겠다는 선택지를 눌렀다.
적어도 비화를 보는 동안은 시스템의 힘으로 악령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희연에게 달려들던 악령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바람이 멎고 흔들리던 달빛이 제자리에 머물렀다.
세계가 멈추는 듯한 광경. 그 속에서 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던 희연의 앞으로 숨겨져 있던 이야기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길을 잃은 아이들
: 마을에 시골장이 열리는 날이면 수레를 끌고 온 상인, 봇짐을 멘 여행객, 늙은 나귀 하나가 전부인 옆 마을 사람과 온갖 뜨내기들, 방랑하는 음유시인, 손목시계 장수와 재주꾼들이 모여요.
우리는 그들을 구경하고, 어른들은 우리에게 말하죠. 발을 조심, 말을 조심. 해님이 지켜주는 아이들은 모험심이 강하니 또 조심조심. 함부로 따라가지 말고 말을 걸지 말고.
하지 말라는 것이 어찌나 많은지. 하지만 우리는 아이인걸요. 호기심을 갖는 것이 의무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것이 권리죠.
음유시인에게 물어요. 바람을 타고 흘러드는 이야기들은 왜 노래가 되나요. 음유시인은 악기를 연주하며 말하죠. 그것이 우리가 삶을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재주꾼에게 물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도 재주를 부릴 수 있나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하죠. 자신처럼 자라면 할 수 있다고.
나귀를 끌고 온 옆 마을 사람에게 물어요. 그쪽 마을의 빵 하나는 얼마인가요. 옆 마을 사람은 혀를 끌끌 차며 말하죠. 요 못된 것들!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
우리는 웃어요. 깔깔깔. 그게 우리가 할 일이니까요. 그렇게 하루가 끝나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죠.
어둠 그득한 밤이 지나고 새들이 지저귀는 새벽이 인사를 하면 따사로운 햇볕 조각들이 머리를 쓰다듬어요. 악몽을 꿨다면 이젠 안녕, 다디단 꿈이었다면 입을 쩝쩝 다시죠.
어린 동생은 같이 나가자고 손을 뻗네요. 손위 형제들은 우리를 귀찮아해요. 우리는 손아래 형제들이 귀찮죠.
그러면 어른들은 우리 모두가 귀찮은 걸까요? 그래서 우리를 잃어버린 걸까요? 우리를 보낸 건가요? 아니라면 왜 찾아주지 않은 걸까요.
말조심, 발 조심. 함부로 따라가지 말고, 함부로 말을 걸지 말고. 조심 또 조심.
하지만 말이에요, 엄마. 우리는 그저 궁금한 것이 많은 어린 애들이었을 뿐이에요.
그렇지만 말이에요, 아빠. 우리가 조심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아요.
마을에서 아이들이 사라지네요. 어른들이 어른을 내쫓아요. 음유시인이 떠나요. 재주꾼이 떠나요. 늙은 나귀 하나에 몸을 의지한 옆 마을 사람도 떠나네요.
뜨내기들도 방랑자들도 마을을 떠나요. 수레를 끌고 온 상인들은 소리를 질러요. 그들의 짐이 바닥을 구르네요.
엄마, 아빠. 우리는 거기에 없어요. 우리는 숨바꼭질을 하지 않았어요. 거기가 아니에요.
뱀이 속삭이네요. 그저 아이일 뿐인 우리가 아무리 조심해도 소용이 없어요.
우리는 조심조심. 입을 닫고 묶인 발에 힘을 풀죠. 말하지 않을게요. 도망치지 않을게요. 하지만 집으로 보내주세요.
아이들이 사라져요. 마을에서도 이곳에서도. 우리는 뱀이 아니에요. 피리 좀 불어줬다고 울음을 그치고 웃지는 않아요. 피리 좀 불지 마세요.
우리는 길을 잃은 걸까요. 맞아요. 우리는 길을 잃었어요. 왜 우리를 찾지 않아요. 왜 포기해요.
우리는 계속 계속 기다리는데. 차가워요. 추워요. 집에 가고 싶어요. 아픈 건 싫어요. 배가 고파요.
피리 부는 남자가 말하네요. 어른들이 너희를 판 거야! 하고. 너희의 부모가 너희를 이곳에 보낸 거야! 하고.
거짓말? 모르겠어요. 진실?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그저 궁금해요.
왜 우리를 잃어버렸나요?]
[이름 없는 악령의 비화를 확인했습니다.]
“…….”
희연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고개를 드니 다시 얌전하게 변한 악령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은 여전했다. 크기는 다시 처음 보았을 때처럼 줄어들어 있었으나 잡아달라는 듯 다시 내뻗은 손은 거두지 않았다.
악령은 희연에게 물었다. 그녀는 답할 수가 없는 그런 질문들을 말이다.
[이름 없는 악령 : 왜 우리를 잃어버린 걸까?]
[이름 없는 악령 : 손을 꼭 잡고 있었으면 우리를 놓치지 않았을까?]
[이름 없는 악령 : 그것도 아니면 그저 우리의 잘못이었을 뿐인가?]
악령이 희연을 노리는 이유는, 그녀가 만만해서라고 생각했다. 살아있는 게 먹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은 너무 강하니까. 유일하게 자신이 이길 수 있는 그녀를 잡아먹고자 한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적어도 눈앞에 악령이 희연의 주변을 계속 맴돌았던 것은 그녀가 갖고 있는 물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물어보고 싶어서? 복수하고 싶어서?
악령은 유령이 유령을 여럿 잡아먹은 뒤에나 만들어지는 존재였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악령이 이런 것을 보여준다는 것은….
악령을 이루는 유령들이 모두 이 비화에 관련된 아이들이라는 뜻이 된다. 악령은 여전히 손을 잡아달라고 하고 있었다.
“…나 안 잡아먹을 거지?”
희연은 조심스레 물었다. 악령은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희연이 조심스레 내 뻗은 손에 슬그머니 더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에서 그 답을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었다.
텅 비어 까맣기만 하던 눈이 질끈 감겼다. 어둑하던 몸이 원래의 희끄무레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름 없는 악령 : …집에 돌아가고 싶어. 여기서 내보내 줘.]
“…….”
이름 없는 달빛의 요람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건 살아있는 사람뿐. 위로의 시간이라는 명목으로 이곳에 오게 된 유령들은 마음대로 나갈 수 없다.
이곳에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사라지는 것이 그들에게 남은 역할이었다. 그냥 집에 가고 싶었을 뿐인 애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악령과 맞잡은 손이 어땠냐 묻는다면 희연은 그냥, 온기 없이 차가운 어린애 손이었다고만 답할 것이다. 놓치기 싫다는 듯 꿈질거렸고, 조심스러웠다. 사람의 손 형태는 아니었으나 아이의 손이었다.
“너는 내가 뭘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이름 없는 악령 : 여기서 내보내 줘. 이 숲을 나가고 싶어. 고향으로 갈래. 우리 집으로 갈래.]
[이름 없는 악령 : 엄마의 품에 안겨 자장가를 듣고 싶어. 아빠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좋겠어. 집으로 가면 내 인형을 동생에게 주어도 좋아.]
“…나는, 너를 여기서 내보낼 방법이 뭔지 몰라.”
맞잡은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그래서 희연 또한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알게 되면 꼭 말해줄게.”
[이름 없는 악령 : 약속이야?]
“약속이야.”
악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따로 퀘스트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저 입으로 하는 약속이라는 말이 꼭 이뤄질 것이라 믿는 듯한 순진한 모습을 통해 그가 정말 아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비록 하나는 잡아먹으려고 하고 하나는 경험치 취급을 하기는 했지만 얼떨결에 평화 조약을 맺은 악령과 희연은 제법 정다운 모습으로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했다.
물론 처절한 약자의 입장인 희연은 추가적인 조건을 붙일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이름 없는 악령… 님? 일단 방법을 알아보기는 할 건데 안 될 수도 있으니까 그때 돼서 나 죽이면 안 돼. 약속한 거다?”
희연의 말에 이름 없는 악령은 머리로 추정되는 부분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 모습에 안도하며 희연은 고개를 돌렸다. 목숨이 간당간당하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결됐다.
이제 남은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데….
“여기는 어디쯤이려나….”
일단은, 길을 잃었다. 위에서 본다고 숲이 길을 보여주는 것도 아닌지라 일단 그들은 밑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숲으로 내려오는 내내 희연과 악령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한쪽은 그리워서였고 한쪽은 불안해서였다.
색이 돌아왔음에도 물리적으로 손에 잡힌다는 것의 의미는 악령이의 상태가 (유령) NPC와 (유령) 몬스터를 오고 간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마지막 유대감이자 원만한 합의 관계가 계속해 이어지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약간의 불안함 속에서 당장 길을 찾아야 했지만 문제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왜 삐졌는지 말을 해줘야 알지.”
[??? : 나 안 삐졌는데? 왜 삐졌다고 생각해? 안 삐졌어, 나.]
이유는 모르겠으나 삐져 버린 소녀 유령이었다. 안 삐졌다면서 흥칫뿡 하는 소리를 주기적으로 내고 있었다.
“…….”
여기서 더 물어봤자 답할 것 같지도 않았다. 희연은 아이들을 잘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명절마다 방과 속을 뒤집고 가는 사촌 동생들이 있었다.
대충이나마 삐진 애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안다는 소리였다. 희연은 방긋 웃으며 소녀 유령에게 말했다.
“그래? 알았어. 그럼 길이나 찾아야겠다.”
[??? : …미워! 나빠!]
모르는 척하면 알아서 말한다. 한참을 허공을 날아다니면 발버둥 치다 제 풀에 지친 소녀 유령에게 희연은 물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공격하면 안 좋을 거라고 말했던 거야?”
희연이 경험치 취급하며 총을 쐈지만, 악령은 그에 대해 크게 반응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때부터 대화를 시도했다.
아직까지도 손을 놓지 않고 있는 악령 쪽으로 눈을 굴렸다. 무릎에도 안 오는 작은 키를 가진 악령은 팔만 쭉 늘려 그녀의 손을 잡은 상태였다.
불편해 보이는데도 그 자세를 유지하는 모습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물리적으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몬스터에 가깝다는 걸 잊으면 안 되지만 말이다.
유령 물리=몬스터다. 이 공식을 잊지 말자.
[??? : 너희는, 말 걸면 귀찮아할 거잖아.]
“?”
소녀 유령의 말에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뒤 다 잘라 먹은 그 설명이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대충 맥락을 생각해 보자면 여기 들어온 유저들이 말을 거는 유령 NPC인 소녀 유령을 귀찮아했다, 정도가 되는데. 희연은 그 말에 공감이나 동의를 할 수가 없었다.
여기 오는 인간들이었다면 새 퀘스트다! 히든 피스다! 하면서 좋아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희연의 예상과 달리 소녀 유령이 지금껏 만났던 이들은 유령이라는 존재를 꺼리고 귀찮아했다.
유저들이 좋아하는 유령은 있어 보이고 보상 좋을 것 같은 왕국 관련 유령 NPC였다. 숲속에 사는 어린 유령 NPC는 유저가 선호하는 유령에 해당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