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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42)화 (42/251)

42화

꼭 잡은 악령이의 손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희연은 그런 악령이를 달래줄 여유가 없었다. 빙글빙글 미소 짓던 악마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신관이라는 게 악마에게 빌어도 되는 건가?”

그녀를 긴장시켰던 것에 비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가벼웠고, 썩 영양가 없었다. 희연은 그런 그의 태도가 제게 유리한 것일까, 아닐까 재보았지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당장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이상 악마의 심기가 뒤틀리지 않도록 구는 것뿐이었다.

약자의 서러움을 느끼며 희연은 그의 말에 답했다.

“저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종이 악마에게 비는 것이 된다?”

“용서는 신이 해줄 테니 연약한 인간인 저는 살고 보는 게 맞겠죠…?”

“…너와 있으면 내 상식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고는 해. 이방인이라 그런 걸까.”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닌듯해 희연은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열심히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펴봤지만, 악마의 눈을 피해 도망가는 방법 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 희연의 속내를 알면서도 악마는 저지하지 않았다. 그도 그녀도 이 대치 사태를 끝낼 선택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역시 죽일까?”

“…저를요?”

“아니야. 이제 와 그러기에는 아쉽지. 기껏 찾아온 희생자가 아닌가.”

들으라는 식의 혼잣말. 희연은 어떻게 해야 하나 눈치를 보다 슬쩍 운을 뗐다.

“그러면 그냥 보내주시면….”

“입으로 내뱉는다고 다 말인 줄 아나 보군.”

역시 안 통하는구나!

희연은 속으로 혀를 차며 그냥 가만히 있을걸, 하고 후회했다. 어느새 악마는 감정이 사라진 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로그아웃? 진짜로?

죽으면 3일 뒤에나 다시 게임 속에 들어올 수 있다. 그 시간이면 이미 이 악마가 헬르벨을 없애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다급해진 희연은 일단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저는 무교입니다!”

“뭐?”

“저는 무교! 어… 악마한테 살려달라고 좀 말할 수도 있는 자유로운 발언권을 가졌고, 권리를 가졌고 그, 그… 악령이랑도 친구 먹었어요!”

희연은 그렇게 말하며 아직까지 손을 꼭 잡고 있던 악령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꺼먼 두 눈을 끔벅거리던 악령은 악마를 보며 슬그머니 다른 쪽 손을 들어 올렸다.

[이름 없는 악령 : 안녕….]

“유령이랑도 친구 먹었어요!”

소녀 유령은 악령이와 달리 답하지 않았다. 되레 도르륵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슬그머니 하늘로 혼자 날아가 버렸다. 뼈아픈 배신이었다.

“…….”

“…….”

유령에게 배신당한 희연을 보며 악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연 또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무표정한 낯으로 자신을 보는 악마의 모습에 희연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망했구나.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희망을 포기한 그녀는 악령이와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인벤토리 안에 잘 모셔두었던 악의의 응집을 하나 꺼내 들었다.

갈 때 가더라도 엿 한 번 먹이고 간다는 의지였다.

희생자 운운하며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황금빛 불길에 감싸진 손을 내리치는 그의 모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희연은 피부에 와닿는 넘실거리는 화염의 열기를 느끼며 악의의 응집을 투척했다.

여기서 문제점은 투척형 포션의 경우 대상에게 명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거리에서, 눈에 훤히 보이는 투척 포션을 악마는 당연하다는 듯이 피해냈다.

그의 검은 머리를 스치고 곧게 날아가는 병을 보며 희연은 눈을 감고 외쳤다.

“천국 가라, 이 악마야!”

그녀가 악마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덕담이자 저주였다.

탕-! 쨍그랑-!

“!”

빗나갔던 병이 산산이 부서지며 그 안에 들어 있던 액체가 황금 불꽃의 관을 쓴 악마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어?”

[<악의의 응집>을 명중시켰습니다. <??? ??? 악마 ???>이…저항합니다.]

[<??? ??? 악마 ???>이….]

어라? 저게 왜 깨졌지?

“악!”

이 상황을 이해해 보려던 희연을 누군가가 목덜미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놀란 마음에 소리 질렀던 희연은 나풀거리는 풍성한 연분홍색의 머리카락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헬르벨?”

그의 손에 들린 장총에서 화약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조금 전, 병을 깼던 것이 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희연을 챙긴 헬르벨은 그녀를 대충 뒤로 밀어내며 악마를 겨냥했다.

“<회개하지 않는 자, 신의 곁으로>.”

묵직한 음성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날아든 총탄이 악마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말 그대로 빛의 총탄으로 이루어진 비였다.

총탄 비가 어찌나 시원스레 쏟아지던지, 그 한 방으로 악마가 죽지 않을까 하는 과한 기대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처치할 수 있었다면 헬르벨이 이곳에 터를 잡았을 리가 없었다.

여전히 굳건한 악마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주춤하는 희연에게 어느새 돌아온 소녀 유령이 말을 걸었다.

[??? : 나 잘했지? 내가 헬르벨을 데리고 왔어!]

희연은 곧바로 그 말을 반박해 주었다.

“너 도망갔던 거잖아.”

정확히 말하면 도망갔다가 헬르벨이 생각나 그를 부르러 갔던 거였을 것이다. 희연의 말에 소녀 유령은 혀를 찼다.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희연은 살벌하기 그지없는 선과 악의 싸움을 눈에 담았다.

악마는 악의의 응집이 내리는 저주 대부분을 저항했다. 유일하게 걸린 저주는 풍. 스치는 바람 한 가닥, 한 가닥이 아픈 듯 움찔거리는 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한쪽은 풍 걸린 악마. 한쪽은 이미 지쳤고, 다친 것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신관. 각각 페널티를 가진 지금 누가 우위에 섰는가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악마 쪽이었다.

헬르벨의 숨결이 거칠었다. 하얬던 옷은 언제 그랬냐는 듯 먼지와 풀물, 피로 얼룩져 있었다. 왼쪽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찢어진 이마에서 흐른 피가 그의 시야를 방해했고 희연이라는 짐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힐러라는 직업에 걸맞게 미약하나마 회복이나 버프라도 걸어줄까 했지만, 끼어들려는 기색을 보이면 곧바로 악마에게 공격당할까 걱정되었다. 악마에게 맞고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희연은 슬쩍 눈을 굴려 채팅창을 보았다. 답변을 보내지 않는 희연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겼냐며 묻던 킹스메이커가 일단은 이쪽으로 오겠다는 글을 써놓은 것이 보였다.

킹스메이커를 비롯한 길드의 사람이 오기만 한다면 상황이 바뀔 거라는 것을 알 수는 있었으나 희연은 그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누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기는 할까.

장난 같은 저주에 걸린 악마와 반쯤 죽어가는 신관. 설령 그들이 올 때까지 희연이 어찌어찌 안 죽고 버틴다고 해도 헬르벨은 죽을 것이다.

희연은 스킬 창 목록을 훑어봤다. 어차피 헬르벨이 다 갖고 있을 스킬이니 지금 당장에 판을 뒤집을 수 있는 건 없다는 건 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다 어느 목록에서 눈을 굴리던 것을 멈춘 희연은 눈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

이거 혹시….

그녀가 슬그머니 기대를 품는 사이 악마와 신관의 싸움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영원은 없으니, 므두셀라의 죽음이 내 심히 슬프도다>.”

새하얗게 빛나는 마법진이 헬르벨의 발아래 새겨졌다. 태양 무늬를 중심으로 알 수 없는 문자들과 그림이 섬세하게 그려져 나갔다.

그 마법진 위로 달빛 요람의 유령들처럼 희끄무레한 형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 작은 언덕과도 같은 크기. 그것은 하얀 갑옷을 입고 손에는 투척용 창을 들었다. 눈빛이 형형한 어느 노기사였다.

“…유령 성기사?”

희연이 그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악마가 쓴 불의 관이 길게 늘어지며 제 몸집을 키웠다. 하늘 위로 넘실넘실 날아드는 황금의 불꽃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달빛만이 존재하던 이 숲에 태양을 가져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실제로도 모든 것을 다 녹여 버릴 듯한 화기가 느껴졌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열기가 스치자 나뭇잎이 우수수 흩어지는 소음을 냈다. 그저 닿았을 뿐인데 숲은 검게 변하고 재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희연은 세상에 도래한 재앙을 마주했다는 감상이 들었다.

[상태 이상 ‘화상’에 걸렸습니다. 초당 10의 대미지를 입습니다.]

“앗…?”

그러면 나 12초 뒤에 죽는데?

멍하니 불꽃을 구경하던 희연은 다급한 손길로 인벤토리 안에 있던 포션을 끄집어냈다. 그러나 그것은 희연의 입에 채 닿지도 못했다.

쨍그랑-!

“…….”

“또 쓸데없는 잔재주를 부리려고.”

손을 휘둘러 불꽃을 날린 악마에 의해 포션병이 깨져 버린 것이다. 축축해진 손을 든 채 악마의 말을 듣던 희연은 억울해졌다.

아니야! 이거 투척 포션 아니라고! 내가 먹을 거였다고!

그러나 이미 오해는 깊어진 뒤였다. 악마는 희연이 포션 비스무리한 것 자체를 손에 쥘 틈을 주지 않았다. 헬르벨과 그가 소환해 낸 노기사를 상대하면서도 말이다.

확실히 지나가는 악마1 따위가 아니었다. 희연은 초조한 마음으로 악령이의 손을 연신 잡았다 놓기를 반복하며 눈을 굴렸다. 포션 사용이 금지되었다면 그녀가 회복할 수단은 하나밖에 없었다.

“<등불의 빛>!”

[스킬 <등불의 빛>을 사용합니다. ‘빛 아래 사라지는 것은 없으니’.]

죽기 2초 전 희연은 총을 들어 제 머리를 쏘았다. 하얀빛의 가루가 쏟아지며 체력이 다시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회복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은 50초. 희연이 죽는 건 12초 뒤. 더는 망설일 수 없다.

헬르벨의 유령 성기사가 악마에게 덤벼드는 것과 동시에 희연은 열심히 달려가 헬르벨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뒤로 끌어당겼으나 놀라울 정도로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아씨… 힘 스텟….”

“방해하지 마라. 위험하니 멀리 가 있어.”

“…저도 그러고 싶은데 어차피 저 죽어요. 절대 못 도망가요. 그러니까 그냥 따라와요, 제발!”

“…….”

“…저 3초 뒤면 죽어요!”

희연의 외침에 헬르벨은 그제야 악마를 겨냥하던 총구를 돌려 희연의 머리에 겨누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움찔하는 것과 동시에 게이지 바 아래에서 깜박이던 빨간 피가 위로 쭉쭉 차올랐다.

희연의 목숨은 다시 12초가 연장되었다. 그러나 불길이 있는 이상 희연은 계속 화상 상태에 놓여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었으므로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희연은 점점 속이 타들어 가며 다급해졌지만, 짜증 날 정도로 우직하고 성실한 신관 헬르벨은 끝까지 같은 태도를 보였다.

“저자를 처치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야.”

희연은 그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사명감에 불타는 눈도 아닌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세뇌하듯, 다그치듯 말하는 헬르벨의 모습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꼭 잡고 있던 악령이의 손을 놓고 헬르벨의 옷자락을 멱살 잡듯 쥔 희연이 외쳤다.

“그쪽 역할인 게 아니라 신전에서 떠맡긴 역할이겠죠! 신전 측에서 죄인의 후손이니 그에 대한 합당한 책임을 지고 이 숲에 스스로를 유배하라고 했으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몰라서 그러는 것도 아닐 거 아니에요. 저 악마를 없앨 방법 따위는 애초에 없고, 죽을 때까지 이 숲에 가둬두는 게 최선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잖아요!”

“…….”

“달빛의 요람을 악마를 가두는 감옥으로 만들 것! 그게 신전에서 당신에게 시킨 역할이잖아요!”

오로지 헬르벨이라는 사람 하나를 제물로 바쳐 만들어낸 악마를 가두는 감옥. 그것이 신전에서 이름 없는 달빛의 요람을, 헬르벨을 써먹은 방식이었다.

[화상으로 인해 사망하였습니다. 별님을 만나러 떠납니다.]

“아.”

맞다. 내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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