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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43)화 (43/251)

43화

희연의 시야는 순식간에 까매졌다. 어둠으로 빠지며 색색깔에 물든 세상과 멀어지던 그때, 희연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데라여. 그대가 달에게 빌어다오. 달은 차오르지 않았다>.”

희연에게 다가오며 반갑게 손을 들던 꼬마별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거대하고 새하얗게 빛나는 초승달이 차지했다. 누군가의 웃고 있는 입꼬리 같기도 한 모양새.

그것이 희연이 그 검은 세상에서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부활했다.

[<초승달의 비웃음>! 모든 상태 이상을 해지함과 동시에 모든 아군을 부활시킵니다. 상처 입은 자는 치유되며 30초간 무적 상태가 됩니다. 1분간 지속적으로 치유됩니다. 모든 스텟이 250% 증가하며 속성 빛을 부여합니다.]

[사망 페널티가 감소됩니다.]

[6시간 동안 경험치 획득량이 80%로 제한됩니다. 습득한 경험치 중 일정량이 감소됩니다.]

원래라면 3일간 접속 불가에 12시간 동안 경험치 습득량이 제한되는 거였지만 곧바로 스킬을 통해 부활해서 그런지 페널티가 감소되었다. 하지만 경험치 감소는 되돌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희연은 레벨 다운 직전에서 멈춘 경험치 바를 보며 눈물을 삼켰다.

그나마 다시 살아난 게 어디인가 싶어 애써 아쉬움을 털어낼 수 있었다. 정신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희연은 일단 놀랐는지 굳어버린 악령이를 먼저 달래주었다.

“나 안 죽었어. 괜찮아.”

그 말에 희연의 팔을 붙잡고 굳어 있던 악령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악령이가 비켜주자 이번에는 헬르벨이 그녀를 붙잡았다.

“…….”

그의 입은 침묵을 택했기에 눈빛과 슬쩍슬쩍 엿보이는 표정으로 그 의중을 짐작해야 했다. 그의 눈길에 담긴 감정은 비난 같았고 또한 자조적인 자책에 가까웠다.

동시에 침체한 모습 뒤에 내내 숨겼던 그의 가장 날것 자체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지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다.”

급한 마음에 내뱉고 봤던 말을 곱씹은 희연은 약간의 후회를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저랑 같이 도망부터 가요. 그럼 어디서 알았는지 말할게요.”

“…….”

헬르벨은 희연의 말에 따로 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순순히 희연을 챙겨 악마에게서 멀어졌다. 두 사람의 뒤를 악령 하나와 유령 하나가 따라붙었다.

떠나는 그들의 뒤로 희끄무레한 성기사와 황금빛 악마의 싸움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싸움은 금세 악마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헬르벨의 보조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노기사의 영혼은 악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법 시간은 끌었다. 그것으로 노기사는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다. 숲을 재로 만들던 악마가 시야를 가리는 자신의 불을 흩트렸을 때 두 신관은 이미 자리에서 없어진 뒤였다.

“…어디 갔어, 이것들.”

홀로 남은 악마는 오랜만에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

“멀리 가봤자 숨는 건 불가해.”

헬르벨의 손을 잡고 열심히 뜀박질하던 희연은 맥 빠지는 그의 말에 천천히 달리던 것을 멈추었다.

편하게 둥둥 떠다녔던 악령이와 소녀 유령, 기본 체력이 미친 듯이 높은 헬르벨과 달리 희연은 거의 죽어가는 중이었다. 천천히 숨을 고른 그녀는 제법 먼 거리에서 화려한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이 사라진 것을 악마가 눈치챈 것이다. 희연은 그 불꽃과 자신들이 있는 곳의 거리를 가늠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그녀가 생각한 방식이 효과 없다 하더라도 다시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여기까지 도망 올 수 있었던 것은 250%나 증가한 스텟 덕분이었다. 슬슬 효과가 끝나가는 참이었기에 희연은 곧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여기 숲도 대충 산속으로 쳐주는 거죠?”

“…일단은.”

애매하기는 하지만 긍정을 표하는 헬르벨의 말에 희연은 안도하며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산골 꼬마 요정의 친구>를 사용합니다.

패시브 효과 : 산속에서 이동속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액티브 효과 : 산속에서 기척을 숨길 수 있습니다. (최대 인원 2/2)

‘친구에게만 알려주는 우리가 살아남은 방식!’]

톨러와 산골 꼬마 요정들의 퀘스트는 게임 초반, 튜토리얼 느낌으로 행하는 것이기에 퀘스트 완료 후 얻게 되는 스킬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산속에서 이동속도가 증가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 효과도 없던 스킬.

그러나 희연의 경우, 칭호가 원래의 것보다 등급이 높아지며 스킬에 변화가 찾아왔다. 희연이 추가로 얻게 된 스킬의 부가 효과는 은신. 산속이라는 제한이 있지만 나름 상위로 쳐주는 은신 스킬이었다.

“된 건가? 우리 지금 은신된 거 맞죠?”

확인을 위해 고개를 돌린 희연은 헬르벨의 눈이 놀란 듯 조금 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얼굴에 조금은 의기양양해진 희연이 입을 열려는 것과 동시에 헬르벨이 손을 들어 희연의 입을 막았다.

“!”

제법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는 희연의 기대와 달리 악마는 이미 그들의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희연은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재가 되어 사라지는 숲의 중심에 악마가 서 있었다.

악령이와 소녀 유령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이것들이 어디로 갔으려나…. 건방진 것들의 목을 베어버려야 하는데 말이지….”

스산한 목소리였다. 하얀 두건을 뒤집어썼을 때만 해도 듣기 좋은 편이라 생각했던 목소리에 독기와 악의가 섞이니 듣는 것만으로도 팔에 소름이 돋았다.

나무 너머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악마는 온몸에 황금빛 불이 들러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불과 뒤섞여 녹아드는 것 같으면서도 그 화기를 제 몸에 흡수하는 것 같은 모습은 썩 아름다운 외양에 어울리지 않게 사람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번에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는 거였다. 속된 말로 악마는 정말로 빡친 것 같았다.

“…….”

희연은 불안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더더욱 숨을 죽였다. 기척을 숨겨준다는 것의 기준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등급이 그리 높은 스킬은 아니었으니 소리를 내거나 하면 들킬 확률은 높았다.

현재 그들의 존재감은 굴러다니는 돌멩이,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정도였다. 돌멩이와 나뭇잎도 말하는 순간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하게 된다.

희연은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이미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헬르벨의 손과 겹쳤다. 희연은 체온 낮은 그의 손에 눈을 굴렸지만, 어느새 헬르벨은 희연의 어깨까지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분노한 악마가 황금색 불꽃의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른 뒤에야 그들은 입을 열 수 있었다.

“어디 안전한 곳에 숨어서 이야기할까요, 우리?”

악마가 말하는 돌멩이를 발견하기 전에 숨어야 한다.

***

희연과 헬르벨이 선택한 안전구역은 산골 꼬마 요정들의 (전) 보금자리보다는 못 하지만 나름 꼭꼭 숨겨져 있던 작은 굴이었다.

헬르벨의 거처는 박살 난 정화석으로 인해 안전구역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정화석은 은근히 골치 아픈 악령들을 막아내는 방어선이자 악마의 눈길을 피하는 헬르벨만의 방식이었다.

그런 정화석 외에는 별다른 방어적 기믹도 없고, 그렇다고 찾기 어렵게 숨기듯 지은 곳도 아니었기에 굳이 그곳으로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몸을 웅크리면 성인 네다섯 들어갈 수 있을 듯한 굴에서 희연과 헬르벨, 배려 차원으로 몸을 찌그러트린 악령 하나와 소녀 유령은 목소리를 낮추며 대화를 나눴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 있는 둘만의 대화였다.

“음… 일단, 뭐부터 얘기할까요? 누가 말해줬는지부터?”

“…그래, 어떻게 네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부터 물어야겠지.”

헬르벨은 답하면서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피 섞인 땀방울이 그의 얼굴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굴에 들어서자마자 무리하면서 정화석을 만든 탓에 그는 악마와 싸울 때보다 더 지쳐 있었다.

아픈 사람을 두고 질질 끌 생각은 없었기에 희연은 곧바로 그가 궁금해하는 것을 말해주었다.

“킹, 그러니까 그 낫 들고 알프스 옷 입은 사람이 말해줬어요.”

“…….”

헬르벨은 희연의 말에 손을 들어 눈 사이를 꾹꾹 눌렀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피곤이 서려 있었다.

“제멋대로 리퍼 공작이라더니….”

“…?”

그의 발언에 희연은 눈을 깜박였다.

킹스메이커를 부르는 별명인가?

희연은 솔직히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앞에 붙은 수식어가.

헬르벨은 희연이 알고 있는 사실을 입에 담았을 때 분노한 것에 비해 누가 그 사실을 말해주었는지 알게 되자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헬르벨의 눈치를 슬그머니 보던 희연은 마나 회복 포션을 꺼내 들었다. 산골 꼬마 요정의 친구의 액티브 스킬은 은근히 마나를 잡아먹는 스킬이었다.

물론 마나만 있다면 계속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쁜 스킬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점이 유리하게 작용할 때는 희연은 마나 게이지 바가 기다랄 때의 이야기였다. 짤막한 그녀의 마나 통은 방심하면 금세 훅훅 빠져 있곤 했다.

빈 포션 병을 대충 바닥에 내려놓으며 그녀는 입을 뗐다.

“일단 여기 있기로 해요. 알고 있겠지만 저는 그 악마 앞에 서면 바로 죽어요.”

“…….”

“…참고로 치료 능력도 별로라 싸울 때 돕지도 못해요.”

희연의 발언에 헬르벨은 기대하지도 않았는지 느릿느릿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그의 왼팔은 여전히 움직이지를 않아 희연으로서는 괜스레 초조한 기분이 더해졌다.

그는 체력 회복 포션도, 그 외에 다른 효과와 효능을 가진 것들도 전부 거부했다.

“그런 식으로 치료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야.”

“계속 방치한다고 좋아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헬르벨은 답하지 않았다. 그의 재능은 사격. 무기는 총이다. 그에게 손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누구보다 자신의 재능과 그만큼 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너무 덤덤해서, 희연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조용한 굴속에 살아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존재 둘과 함께 있으니, 희연은 마치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헤매는 기분마저 들었다.

게임을 시작한 이후로 가장 고요한 침묵이었다. 그리고 가장 고요한 인물이었다, 헬르벨은. 그 침묵 속에서 결국 희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그 악마를 가두는 데 그쪽이 이용될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받아들였어요?”

“…….”

“헬르벨?”

“…너는, 왜 그들과 함께 다니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그가 말하는 그들이란 킹스메이커를 비롯한 길드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말 그대로였다. 정신 차려보니 희연은 이미 길드에 가입하고 같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길드 하우스에 가자고 꼬드겼을 때부터 킹스메이커의 계략에 휘말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폭풍 같은 사람을 생각하는 희연에게 헬르벨은 느릿느릿 말했다.

“…나 또한,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이리된 것뿐이다.”

“…….”

그에게선 그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느껴졌다. 희연은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괜히 캐묻거나 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은 각자의 사정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톨러와 잉거, 히딘이 품은 생각들이 각기 달랐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이것 좀 먹어봐요. 나아질지도 모르잖아요.”

희연의 재촉에 헬르벨은 결국 포션 하나를 받아들였다. 그의 왼손이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포션 병을 든 그의 오른손은 기력이 다한 듯 덜덜 떨렸다. 손끝이 까매진 것이 독에 당한 것처럼 보였다.

침묵이 너무 고요해서 고개를 돌렸을 때 헬르벨이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말을 걸어야 그가 정신을 잃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헬르벨이 본인의 이야기를 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대화의 주제는 그녀가 정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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