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담담히 설명하는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간신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런 헬르벨에게 희연은 물었다.
“그래서, 킹 님한테 도와주지 말라고 한 거예요? 신전에 알리지 말라고 한 것도….”
“내가, 너희의 도움을 받아 악마를 잡으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
“나는 다음 악마를 찾아 또다시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되겠지. 내 조상이 저 악마와 계약했다는 이유는 핑계다. 신전은 무력을 가졌고 자신들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을 뿐이니까.”
그의 말대로였다. 신전은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놓아주기엔 그는 너무 탐나는 인재였다. 달빛의 요람이라는 특수한 바탕이 있기는 했으나 악마를 가둘 수 있게 만든 것은 헬르벨.
신전에게 있어 헬르벨은 악마를 잡거나, 여차하면 죽을 때까지 악마를 묶어 둘 수 있는 결계를 만드는 귀한 재료였다.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여기서 이러고 살 거예요?”
“가능하다면.”
“악마를 잡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요….”
“옛날에는 그랬지. 그러면 다 끝나는 줄 알고.”
악마를 잡아봤자 헬르벨은 평온을 되찾지 못한다. 어차피 다른 악마를 잡기 위해 움직여야 할 테니까 말이다.
그가 모든 것을 거부하면 그의 가족이, 혹은 그와는 조금도 관련이 없을지언정 비슷한 환경을 가진 누군가가 그 빈자리를 메꿀 것이다. 헬르벨은 그 과정을 외면할 수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 지겨운 숨바꼭질이 이번에는 끝날지도 모르지.”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죽음을 각오한 모습. 아니 죽음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음에 체념한 모습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희연의 반응에도 헬르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악마는 슬슬 이 유흥을 끝낼 때가 됐다 여기고 있다. 나를 죽이고 이곳을 나가는 것으로 이미 마음을 먹었지.”
그의 말에 희연은 반사적으로 그의 상처 부근을 눈으로 훑었다. 독에 당한 것 같은 오른손은 양호한 편이었다. 불에 탄 것처럼 검게 변한 왼팔에 비하면 말이다.
그 왼팔에 손을 댄 희연은 흠칫 놀라 손을 거두었다. 헬르벨의 몸이 지나치게 찼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말했다. 그나마 움직이는 오른손이 희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니 떠나라.”
“자꾸 떠나라고 말하는 건 내가 그 악마가 말하는 희생자이기 때문인 거죠?”
“…악마의 말에 답하지 마. 무엇도 희생하려 하지 말고, 도전하지도 말아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기력을 다한 듯 잡고 있던 손목을 놔주었고, 눈을 감았다. 닿은 부위가 떨어지는 마지막까지 싸늘하게 느껴지는 체온이었다.
“…일단 이거라도 덮고 있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희연은 예전에 뒷골목에서 킹스메이커가 입혀줬던 로브를 꺼내 헬르벨의 위로 덮었다. 새까만 밤 조각을 떼어온 것 같은 망토를 덮으니 헬르벨은 마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희연은 눈을 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으로 그를 보았고, 소녀 유령과 악령이 또한 가까이 다가와 헬르벨을 살펴보았다.
[??? : 상태 나빠. 이제 곧 죽을 것 같은데?]
[이름 없는 악령 : 아냐. 내일쯤에 죽을 것 같아.]
“너희 둘 다 조용히 해.”
희연의 말에 두 유령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배려라곤 없는 유령들을 노려본 희연은 입구 쪽을 살펴보았다.
흘러들어 오는 나무에 맺힌 달빛과 헬르벨이 만든 자잘한 정화석 덕분에 그리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문득 그 밝기가 줄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몰라 스킬 창을 살폈다. 은신 스킬은 제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희연은 손을 들어 두 유령에게 조용히 할 것을 전했다.
“…어?”
소리를 내면 안 된다, 라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도 밖을 내다본 희연은 반사적으로 소리를 냈다. 춥게 느껴지던 달밤에 침투하듯 스며든 것은 열기와 은은한 빛이 아닌 눈이 부신 금색이다.
타닥타닥 소리 내는 불꽃이 모든 것을 살라 먹을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아. 진작 들켰구나.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희연은 뒤돌아 검은 로브를 헬르벨의 머리끝까지 덮어씌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헬르벨 좀 살펴보고 있어! 나오지 말고!”
희연은 소녀 유령에게 말하며 악령이의 손을 붙잡았다. 서두르는 모습에 머뭇거리던 소녀 유령이 외쳤다.
[??? : 나도 갈래!]
“안 돼! 누구 하나는 헬르벨을 살펴봐야 할 거 아냐!”
[??? : 악령한테 하라고 해!]
“그것도… 안 돼. 얘는 기회 보다 헬르벨을 잡아먹을 것 같단 말이야.”
희연의 말을 소녀 유령 또한 공감했는지 그녀는 그제야 조용히 헬르벨의 옆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꽁한 마음은 그대로였는지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나갈 준비를 하는 희연의 발끝에 빈 포션 병이 닿았다. 결국 이것은 헬르벨에게 효과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희연은 뒤돌아 로브를 걷고 헬르벨의 입속에 사탕 하나를 집어넣었다.
아타락시아의 주인 레몬에게서 받은 사탕 세 개 중 하나였다. 헬르벨의 상처가 어떤 연유로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이라면 포션보다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다시 그의 위에 로브를 덮은 희연은 작은 악령이의 손을 붙잡고 동굴을 나와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최대한 헬르벨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목표였다.
악마가 그녀를 발견해 불길의 방향을 틀도록 만들어야 했다. 악마를 유인해내 헬르벨이 무사하다고 해도 불꽃이 굴 쪽으로 향하게 되면 다 소용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정신을 잃은 헬르벨이 불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고, 만일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소녀 유령은 몇 번 헬르벨을 깨우는 시늉을 하다 도망갈 것이다.
양심상 희연에게로 와 이렇게 됐다, 하고 말은 해주겠지만 딱 거기까지. 애초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희연이 악마를 유인해내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다.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내내 그녀가 몇 개의 나무를 지나치고 몇 송이의 꽃을 짓밟았는지 모른다. 숲길을 모르는 희연으로선 자신이 같은 곳을 빙빙 도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비슷해 보였다.
그녀 또한 내심 알고는 있었다. 이렇게 도망쳐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희연은 바짝 마른 입안을 느끼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 싸울 수 있지?”
희연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악령이는 그 물음에 느릿느릿 답했다.
[이름 없는 악령 : 글쎄….]
“글쎄는 뭐야….”
희연이 눈살을 찌푸리자 슬그머니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른 악령이 조그만 십자 입을 벌리며 물었다.
[이름 없는 악령 : 싸우면… 먹어도 돼?]
“…아니. 네가 뭘 먹고 싶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하지 마. 그냥 싸우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희연의 말에 악령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희연은 악령이를 데리고 나온 것이 잘한 일이었는지 약간 회의가 들기는 했으나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열기가 서서히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으나 타오르는 숲의 걸음걸이가 그보다 훨씬 빨랐다. 이쯤에서 에흐테를 꺼내는 게 좋을까. 희연은 고민하며 주변을 살폈다.
기동력이나 효율을 봤을 때 에흐테를 꺼내 날아오르는 것이 최선인 건 맞았다. 문제는 아무것도 없는 하늘로 날아오를 시 그녀는 곧바로 악마의 표적이 된다는 거였다.
화가 난 악마가 희연과 시시덕거리며 대화라도 해줄까? 눈에 띄자마자 일단 태우고 보는 게 아니라?
무조건 후자라는 결론을 내리며 희연은 통각 수치까지 내리고 냅다 뛰었다. 다리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덜덜 떨려오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결국 하얀 나무를 매달리듯 붙잡아 숨을 고를 때쯤에는 갈라진 기침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런 희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악령은 물었다.
[이름 없는 악령 :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그 사람은 너에게 소중한 거야?]
기침하기 바쁜 희연은 그 물음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악령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조각조각 난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린 그들이 낯선 상인들의 수레를 우르르 쫓아가면 하던 일도 제쳐두고 달려와 주었던 이들이 있었다.
혼이 나고 손을 꼭 붙잡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마을에서 아이들이 사라졌을 때 어른들은 상인들을 제일 먼저 의심했고 그나마 희망을 품은 것이었다.
우리가 그 수레에 꼭꼭 숨어 있다가 방긋 웃고, 손을 뻗어 안아 달라 하기를.
우리를 혼내고 다신 그러지 않겠다, 약속을 받아낸 다음 집으로 돌아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갓 구운 빵을 먹고 햇볕 냄새 나는 이불 속에 파묻혀 잠이 들기를.
악령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이름 없는 악령 : …엄마가 보고 싶어. 아빠도 보고 싶어. 동생이 크면 같이 도토리를 주우러 가려고 했는데. 배가 고파. 배고파. 배고파.]
불길이 다가오고 있었다. 악령은 희연이 도망가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있는 것이 악령의 입장에서 나쁜 것도 아니었다.
헬르벨이 죽으면 그로부터 시작된 모든 결계가 사라진다. 숲이 모두 타고 나면 달빛의 요람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될 거다.
우는 어린 영혼들은 이곳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비록 제 몸을 유지 못 하고 이 숲을 벗어나자마자 사라지게 된다 하더라도.
[이름 없는 악령 : 그래도 약속했으니까.]
“…?”
희연은 제 등을 꾹 누르는 무게감에 고개를 돌렸다. 악령이가 그녀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뭐 해?”
그녀의 질문에도 악령이는 답하지 않았다. 어리광을 부리듯 등에 얼굴을 비빌 뿐이었다. 당황하는 희연에게 악령은 말했다.
[이름 없는 악령 : 약속 꼭 지켜야 해. 여기서 나가게 해줘야 해. 집으로 가고 싶어. 약속 안 지키면 나빠….]
갑작스러운 악령의 말에 희연은 무어라 묻지도 못했다. 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에 악령이 먼저 희연에게서 떨어진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악령은 다시 검게 변해갔다. 그 모습에 반사적으로 움찔한 희연은 휙 뒤도는 악령의 모습에 혼란스러움마저 느껴야 했다.
검게 변한 악령은 서서히 제 몸짓을 키웠다. 소녀 유령보다도 크게, 희연보다도 크게. 희연이 짚고 서 있던 나무보다도 덩치를 키워나갔다.
마침내 희연이 고개를 힘껏 들어 올려야 눈을 마주 볼 수 있게 될 정도로 커진 악령은 네 갈래로 갈라지는 제 입을 쩌억 벌렸다.
아아아아아아-
“!”
희연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악령의 입에서 퍼져 나가는 소름 끼치는 소리 때문이었다.
땅이 울리고 새파란 잎사귀들이 순식간에 시들어 땅에 떨어졌다. 나무에 맺혀 있던 달빛이 잘게 쪼개지며 반딧불이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강제로 눈을 감게 만드는 묘한 거부감을 떨쳐내고 간신히 눈을 뜬 희연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악령으로부터 시작된 소리의 파동이 빛을 부쉈다. 비단 나무에 맺힌 달빛만이 아니었다. 서서히 다가오던 황금색의 불꽃. 그 안에 담긴 빛 또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빛을 잃은 불꽃은 밤하늘의 구름처럼 변했다. 연기가 뭉치듯 일렁거리다 살포시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졌다.
세상을 밝히는 것은 달빛으로 맺어진 작은 구체들뿐. 희연이 홀린 듯이 손을 들어 그 구체를 툭 건드리자 그것들은 비눗방울 터지듯 퐁퐁 흩어지며 다시 나무에 맺혔다.
이미 불에 타버린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재가 되었던 나무도 풀도, 들꽃도. 그 모든 것에 달빛의 구체가 스치고 맺히자 숲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헬르벨과 희연이 스킬을 사용해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났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였다.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던 희연은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모든 빛을 꺼트렸던 장본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거대한 몸짓으로 희연의 앞을 막아서던 악령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에 당황한 그녀가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였다.
무언가 작고 말랑거리는 것이 희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깜짝 놀라 몸을 파드득 떤 희연은 손을 들어 그것을 집었다.
“악령이…?”
미니미?
희연은 애매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희연에게 미니미 악령이는 말했다.
[이름 없는 악령 : 나 힘드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