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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46)화 (46/251)

46화

손바닥만 한 조그만 미니미 악령이가 느물느물 늘어지고 있었다. 필살기 사용 후 모든 힘이 다 빠져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희연은 허물어지듯 웃으며 악령이에게 말했다.

“고마워.”

희연의 말에 바들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악령은 몸에 힘을 쭉 뺐다. 너무 하얗고 투명해 이대로 흩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 악령을 조심히 품에 안은 희연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겨우 악령 따위가… 이런 힘이라.”

“…….”

악마는 은은한 달빛 아래 서서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살포시 불어오는 바람에 휩쓸리는 검은 머리칼이 밤보다도 짙었다.

황금의 불꽃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상대는 악마였다. 가장 큰 무기로 추정되는 불꽃이 없어도 그의 위험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아마도 악령이의 힘으로 인한 디버프인지 악마는 황금의 불꽃을 사용할 수 없는 듯했다. 그래봤자 희연이 이길 수 있는 상대라는 건 아니다.

다만 등장하는 것만으로 화상에 걸려 12초 만에 죽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검은자위에서 위험스레 빛나는 붉은 눈이 데굴 굴렀다. 그 눈은 정확하게 희연의 품에 안긴 악령이에게로 향해 있었다. 흥미와 괘씸함, 약간의 짜증과 호기심이 서린 눈이었다.

희연은 그 눈을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심적 안전거리라도 확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가당치도 않은 모습에 악마는 설핏 비웃음을 흘렸으나 곧바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있어 희연이라는 존재가 제법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닿는 것만으로도 죽을 그녀를 위해 거리를 지켜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재밌어. 아주 재미있구나, 너. 이방인들은 언제나 흥미롭지만 넌 그중에서도 압권이군.”

언제나 한 발자국 멀리서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며 죽어도 죽지 않는 특수성 때문인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크지 않은 존재, 이방인. 그러나 정도 이상의 공포 앞에선 여느 인간과 다를 게 없는 이들.

악마는 손을 들어 입가를 툭툭 쳤다. 고민 어린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헬르벨과의 유흥도 마지막을 목전에 두었다. 흥미로운 것들은 귀하고 그에게는 언제나 양껏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 넘쳐났다. 재밌는 이방인 또한 그가 제 시간을 할애할 가치가 있는 유흥거리였다.

악마는 혀를 내밀어 제 입가를 핥았다. 흥미로운 호기심의 유혹은 언제나 입안이 아릴 정도로 단 법이었다. 그는 웃음 지으며 희연에게 물었다.

“살고 싶나, 이방인?”

“…….”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으나 희연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희연의 모습에 악마는 야살 맞게 웃었다. 휘어지는 눈에는 그의 즐거운 감정이 엉켜 있었다.

“그래, 너는 희생자이지. 그러니 네게 기회를 줄까 해.”

“기회?”

희연의 되물음에 그는 친절한 웃음을 얼굴에 걸었다.

“그래, 기회. 들어보고 네가 정해라. 내가, 아주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들려줄까 하니.”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 하면 네 목을 날려 버릴 테니 듣는 게 좋겠지?”

희연은 악마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만족한 악마는 웃음을 지었다. 제가 태워 먹었던 나무에 기대어 서고 은은한 달빛을 후광으로 삼는 모습에 희연은 그 모습이 과연 악마답게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뻔뻔한 악마의 이야기는 악마만큼이나 뻔뻔한 어느 인간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래전에 말이야. 한 인간이 내게 제 친구의 영혼을 바칠 터이니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한 적이 있어.”

아니, 왜 남의 영혼을 가지고….

시작부터 눈살을 찌푸리는 희연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마는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설렁설렁 흘려듣던 희연은 그의 말에 누군가가 겹쳐 떠오르자 서서히 낯을 굳혔다.

“그런데 사실, 그자는 내게 진즉 영혼을 팔았던 자로 때가 되어 죽음이 성큼 다가오니 그 운명을 피하고 싶어 감히 말을 번복한 자였지. 그 행태가 괘씸했으나 동시에 흥미로워 기회를 주었다. 그렇다면 네 영혼을 대신한 것을 내게 바쳐라, 하고 말이야.”

“…….”

“그때 즈음에 어느 숲의 영지에서 숲지기를 찾는 대회가 열렸지. 그 당시 숲지기의 딸과 혼인을 약속한 자가 있었는데, 사격에 재능이 있어 모두가 그가 숲지기가 될 것이라 예상했어. 하지만 정작 시범 대회에서는 영 맥을 못 추렸다나.”

숲의 영지와 숲지기의 딸. 연관성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영지의 이름은 혜미안. 헬르벨의 고향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이야기가 신전에서 걸고넘어졌던 그의 조상에 관한 이야기인가?

희연이 확신을 내리는 사이에도 악마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자는 상심한 친구에게 말했지. 모종의 수단을 써서 백발백중의 마탄을 구해다 주겠네, 라고 말이야. 그자의 이름이 아마… 카스파였던가. 그 불쌍한 친구의 이름은 막스였지.”

“…….”

“카스파는 내게 말했다. ‘막스의 영혼을 일곱 발의 마탄과 교환해 주시오’. 어리석고 순진한 막스는 영혼을 넘긴다는 의미도 모르고 카스파가 건네는 마탄을 받았어. 카스파는 자신이 해방되었다고 믿었고.”

“…….”

“왜 그러지? 재밌는 표정을 지는군.”

악마의 말마따나 희연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헬르벨의 비화에서 보았던 내용대로라면 혜미안의 숲지기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악마의 이야기에 따르면 숲지기를 고르는 대회에 참가한 것은 막스. 헬르벨의 조상이 막스라면, 애초에… 그의 조상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적이 없다는 뜻이 된다.

중간에 끼어 있는 카스파로 인해 악마에게 영혼이 팔리기는 했지만, 이단이라 몰릴 정도의 죄는 아니었다. 막스는 제 친우를 믿었던 것일 뿐이니까.

그러면 헬르벨은 왜… 신전에 붙잡혀 이딴 밤의 숲에 갇혀야 했던 거지?

“…하.”

희연은 헛웃음을 흘렸다. 알 수가 없었다. 신전이 잘못 알았던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헬르벨을 죄인의 후손이라고 몰아갔던 것일까.

후자라면….

앙다문 입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차라리 신전에서 실수를 했다는 결론이 그나마 나았다. 그렇지 않으면 헬르벨이라는 사람의 인생이 너무나 기구하다.

그런 희연의 반응에 즐거워하던 악마는 느릿느릿 남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희연의 머릿속을 더더욱 어지럽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말이야. 단순히 막스의 영혼만 받고 끝내기에는 재미가 없더라고. 말했잖아. 말을 번복하려 드는 카스파가 꽤나 괘씸했다고 말이야.”

“…….”

“그래서 카스파에게 조건을 덧붙였지. 일곱 발 중 마지막 한 발. 그것은 막스가 그리도 사랑하는 숲지기의 딸 아카테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 거라고 말이야. 카스파는 자기 목숨이 아니라고 흔쾌히 응했지. 하지만 그마저도 아쉽게 느껴져 내기를 하기로 했어.”

“내기?”

“아카테가 죽지 않으면 내게 영혼을 바치는 것은 다시 카스파, 네가 될 것이다. 좋다고 받아들이더군.”

악마의 말을 들으며 희연은 대충 그다음 이야기를 예상했다.

악마는 카스파가 괘씸했다. 결국 막스는 숲지기가 되어 후손 대대로 숲지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숲지기의 딸 아카테는 죽지 않았고 죽은 것은….

“멍청한 카스파. 아카테가 죽고 절망하는 막스를 구경하겠답시고 총탄의 경로에 서 있다 아카테 대신 죽었지. 제법 흥미로운 결말이었어.”

“…일부러 노렸던 거지.”

“글쎄…. 어땠을 것 같지, 이방인?”

악마는 물으면서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처음부터 카스파의 죽음을 바랐다. 막스는 그저 카스파가 잠시간의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중간에 끼워 넣은 장난 같은 거였다. 고양된 감정에서 밑으로 처박히는 그 절망감 서린 얼굴이 그는 보고 싶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일부러, 전부 다 그의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잘 짜인 판이었다.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니 그의 기분 또한 덩달아 흥겨워졌다.

그는 기꺼이 그 기분을 따라 웃음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맞아. 내가 아카테에게 백장미를 주었어. 그것은 경고였지. 영리한 아카테는 그것을 액막이 부적으로 써먹었고, 덕분에 죽은 것은 카스파가 되었어.”

악마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전에 보았던 하얀 옷이었다. 그는 그것을 제 위로 덮었다. 하얀 천에 둘러싸인 그의 모습은 악마보다는 숲속을 헤매는 신비한 청년처럼 보였다.

“고작 입고 있는 옷이 달랐을 뿐임에도 못 알아보더군. 그들은 나를 은둔자라고 불렀지. 나를 은인이라 부르던 아카테 덕에 쉽게 스며들 수 있었고, 은둔자의 조언에 따라 영주는 막스를 용서했다. 뭐 제법 재밌는 유흥이었어.”

“…이 얘기를 나한테 해주는 이유가 뭐야.”

희연이 그 물음을 입에 담자 손안에서 꼼질거리던 악령이가 손가락을 콱 깨물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반사적으로 주춤거리는 사이 바로 코앞에 나타난 악마가 손을 뻗었다.

방금까지 희연이 서 있던 곳이었다. 허공을 헤매는 제 손을 아무렇지 않게 움직여 기어이 희연을 붙잡은 악마가 속삭였다.

“궁금해서 말이야. 너는 어떤 선택을 할지.”

“…….”

“내가 기회를 준다 했지?”

희연을 툭 밀어낸 그가 하얀 두건 아래에서 웃으며 말했다. 드리워진 그림자 아래 붉은 눈이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살고 싶다 했나? 살려주지. 더불어 남들이 부러워할 힘도 주겠어. 그 대신 내게 헬르벨의 영혼을 넘겨.”

그 말에 희연은 곧바로 인상을 찡그렸다. 남의 영혼을 넘기라니. 언제부터 영혼이라는 것이 인도 가능한 유동자산이 된 건지 둘째 치고, 그의 요구가 터무니없었다.

“헬르벨은 왜….”

악마는 그가 죄인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저와 상관없는 존재임을 애당초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알면서 헬르벨과 달밤의 숨바꼭질을 하고, 지금은 그를 욕심내고 있었다.

대체 왜? 그렇게 한다고 얻는 게 대체 뭐길래?

악마는 친절한 사람 흉내를 내듯 희연의 물음에 순순히 답해주었다.

“새삼스레 아쉬워졌거든. 괜한 내기로 돌려줘야 했던 막스의 영혼이 말이야. 그러니 그 비슷한 헬르벨의 것이라도 가져야 하지 않겠어? 감히 나를 여기다 가둔 것도 괘씸하고 말이야.”

누가 악마 아니라고 할까 봐 성격 진짜 더럽다. 희연은 이를 갈며 발을 들었다. 코앞에 있는 정강이라도 한 대 때려주려는 심사였다.

그러나 악마의 손이 그런 희연의 다리를 잡아채는 것이 먼저였다. 쭉 끌어당기는 다리를 따라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진 희연은 나무에 머리를 박았다.

맞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돌려받을지도 몰랐다. 조금 얼얼한 머리를 더듬으며 그녀는 외쳤다.

“죽을 뻔했잖아!”

“…….”

의외로 그런 희연의 모습을 악마는 비웃지 않았다. 옷에 찰싹 붙어 있는 악령이를 확인한 희연은 곧바로 총을 꺼내 그를 향해 겨냥했다. 그래도 한 발을 맞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총을 연사했다.

결과는 보란 듯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총알을 끼운 악마의 손이었다. 그는 약 올리듯 총알을 잡아챈 손을 그녀의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총이 원거리 무기일 거라고만 생각하지 마라!”

총을 잡지 않은 손으로 땅을 짚은 희연은 몸을 날려 총을 악마의 다리 위로 찍어 내렸다. 물론 스킬을 쓴 상태로 말이다. 악마는 피하지 않고 그 공격을 맞아주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짜증 나, 진짜….”

거지 같은 고렙 몬스터!

땅에 엎어진 상태로 더 이상의 반격을 하지 않는 희연의 모습에 악마는 그제서야 그녀의 다리를 놓아주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악마를 노려보는 희연의 모습은 제법 살벌했고, 어찌 보면 집착과 광기가 서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희연의 손가락을 악령은 다시 콱 깨물었다. 침착하라는 뜻이었다. 낮은 통각 수치 탓에 약간 따끔거리는 정도였지만 일단 흥분한 것을 잠재우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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