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비세스 메이커 (47)화 (47/251)

47화

애써 숨을 몰아쉰 희연은 천천히 생각했다. 이 악마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말이다. 모두가 윈윈하는 방법 따위는 없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피해로 끝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거야 당연히 신전에서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다.  양심이 있다면 신전은 헬르벨을 더 이상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신전이 앞으로 겪게 될 고생? 내 알 바 아니다!

희연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악마에게 말했다.

“여기서 나가는 게 목적인 거지?”

“으음?”

“그럼 나가. 그 뒷수습은 신전이 알아서 하겠지!”

“…허?”

악마가 이 숲에서 나가면 신전은 생각할 것이다. 아마도 헬르벨이 결국 죽었다, 식의 방향으로. 그러면 헬르벨은, 일단은 자유가 된다. 비록 신원도 확실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런 숲속에 혼자 콕 박혀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에빌론으로 갈 경우 돈만 있다면 관문을 통과하기도 쉬웠고, 유저가 많으니 그 틈에 숨어 살기에도 좋았다. 운이 좋다면 그의 가족과 함께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혜미안 영지를 벗어나 그들 가족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간다면….

“잠깐만. 그런데 왜 헬르벨에게 왜 그런 저주를 건 거야?”

그녀의 상상의 끝은 아들의 얼굴을 보고 낯설어하는 어느 부부의 모습이었다.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할 저주를 끌어안고 있는 헬르벨이었다. 이것 하나는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다급한 희연의 물음에 악마는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네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다만.”

“헬르벨 말이야! 풋낯의 저주!”

“그딴 걸 저주랍시고 내가 걸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뭐?”

“내가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인간이 갈망하는 것들에 관해서 말이야.”

“…….”

전에 말한 거라면… 사랑과 명예?

그녀가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눈치를 보이자 악마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몸을 낮추어 희연의 몸을 잡더니 가볍게 일으켜 옷을 툭툭 털어주기까지 했다.

그 친절함을 흉내 내는 모습에 희연은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붉은 눈 속에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하는 것은 황금색의 불꽃이었다.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다른 얼굴로 나타나면 애정은 식기 마련이고, 아무리 대단한 명예를 가졌다 한들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다면 없느니만 못하지.”

“…….”

“그렇게 잊히는 거야. 자, 이제 말해봐라. 그자가 잊히기를 바란 건 누구였을까?”

헬르벨이 잊히길 바란 사람은, 그를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이 숲에 유배시킨 작자들은….

“…신전.”

일그러지는 희연의 얼굴을 보며 악마는 즐거이 웃음 지었다.

“신을 모시는 것들이 의외로 본인들의 욕구에 솔직하지. 절제된 삶에서 맛보는 쾌락이 얼마나 달콤한지 상상할 수 있나? 솔직해질수록, 잔혹해질수록. 언제든 절제할 수 있다는 그 방만한 자신감에 자신을 놔버리지. 그 결과가 이거란다, 어린 이방인아.”

“…….”

“그렇지 않나, 헬르벨?”

“…!”

희연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이 닿은 곳에는 힘겨운 모습으로 나무를 짚은 헬르벨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어디서부터 들은 거야?

혼란스러워하는 희연에게 헬르벨은 흐릿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모습에 희연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다 들었다는 걸. 그가 다 알고 있었다는 걸.

“헬르벨….”

목이 졸리듯 흐릿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 부름에 헬르벨은 답해주듯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나도, 안다고.”

헬르벨은 천천히 다가왔다. 그런 그의 뒤를 소녀 유령이 쫓아오고 있었다. 악마는 헬르벨을 제지하지 않았다. 달빛 아래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또다시 낯선 타인이 되어 있었다.

희연이 그를 단번에 알아본 것은 그의 어깨에 걸쳐진 검은 로브 탓이었다. 이 숲속에 낯선 사람이란 헬르벨밖에 없다는 상황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숲 밖에서 그의 가족은, 친구는 그를 무슨 수로 알아볼 수 있을까. 불가하다. 당장에 그녀 자신 또한 이 숲 밖에서 헬르벨을 단번에 알아볼 자신이 없었다. 그건 너무나 서글픈 사실이었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희연에게 헬르벨은 느릿느릿 말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 영 정을 붙이지 못하는 것은 괴리감 때문이지. 어떤 이야기를 듣든, 어떤 일을 겪든 한 발자국 물러난 듯한 반응을 보여서다.”

“…….”

“…이방인들은 잘 안 운다고들 하던데.”

헬르벨의 말에 희연은 고개를 숙였다. 그를 생각하면 감정이 먹먹해졌고, 그를 위해 뭘 해야 할까 생각하면 그저 막막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이슬이 맺히듯 시야가 흐려졌다. 악마에게 농락당한 게 분해서, 숲을 헤맸던 게 힘들어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나아진 것 없는 현재가 미워서였다.

희연은 헬르벨을 동굴에 두고 홀로 나올 때만 해도, 톨러 때처럼 해결법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없었다.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머리를 툭툭 두들기는 손은 어설펐다. 그리고 익숙했다. 그의 외양이 아무리 바뀐들 화상 흉터로 얼룩진 그의 손은 변하지 않았다.

“너도… 금방 떨쳐 버릴 수 있을 거다. 나를 잊고, 여기서 나가라. 굳이 기억하지 말고. 네가 희생자가 될 필요는 없어.”

“…….”

답하지 못하는 희연을 두고 한 악마와 한 인간은 대화를 나눴다. 둘 중에 누가 술래였는지는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잡기 위해, 혹은 피하려고 이 숲을 헤맸으니까 말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게임에서 진 자는 죽음으로써 그 대가를 치른다.

“이제 포기하는 건가?”

“…내게 포기할 권리 따위는 없지.”

헬르벨은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치륜총을 들고 있었다. 한쪽 팔을 들 수 없는 지금, 그것이 그가 들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 헬르벨에게서 떨어진 소녀 유령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는 희연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살폈다. 소녀 유령은 나름 희연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도 정이 들었던 헬르벨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 : 저기 괜찮… 은 것 같네. 응, 괜찮네. 무섭네….]

나름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던 소녀 유령은 잽싸게 말을 바꿨다. 눈물이 그렁그렁할 줄 알았던 눈이 제법 살벌하게 세모꼴을 하고 있었다.

희연은 생각했다. 이대로는 포기 못 한다. 이젠 오기로라도 이 퀘스트를 깨고 말 것이다. 저 악마를 엿 먹이고 말 거다!

희연은 미니미 악령을 입고 있던 로브의 후드에 넣었다. 반항 한번 못 하고 후드 속으로 들어간 악령이 그 속에서 버둥거리기는 했으나 다시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그녀는 때를 기다리며 왼손에 걸린 팔찌를 움켜쥐었다. 헬르벨도 악마도 쪼렙 신관 따위는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악령이가 꺼버린 황금의 불꽃이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더 이상의 분노도 두려움의 기색도 내비치지 않는 헬르벨은 작은 총구를 들었다.

그런 그에게 거센 황금의 불꽃이 닿기 직전, 희연은 헬르벨에게 달려들었다. 놀란 두 쌍의 눈이 희연을 바라보았다.

손을 물린 헬르벨이 어깨에 걸친 로브를 잡아 희연의 앞을 막아서려는 것이 보였다. 시야를 가리는 검은 로브 사이로 재밌다는 듯 웃는 악마가 보였다.

불꽃은 이미 닿았고 희연은 화상에 걸렸다. 피가 쭉쭉 깎인다는 시스템 창 사이로 바라 마지않던 창이 떠올랐다.

[특수 스킬 <용혈수>를 사용합니다. 모든 상태 이상 디버프가 제거되며 80%의 체력이 회복됩니다. 용혈수를 소환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3일)]

희연의 손목에 걸려 있던 팔찌에서 떨어진 나무 조각에서 잎사귀가 피었다. 조각은 묘목이 되고 잎사귀는 번성했다. 키를 키우고 굵어지는 나무가 악마와 그들 사이를 가르고, 제 몸을 지탱하기 위해 뿌리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순식간에 거대해지는 나무의 툭 튀어나온 가지 하나를 희연이 붙잡는 것을 본 헬르벨 또한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았다. 희연이 이미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무의 굵은 몸통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그 두 갈래의 나뭇가지에서부터 시작된 수백 개의 가지는 얽히고설켜 마치 버섯의 밑동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 되었다.

잔가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나무는 모든 나무줄기 하나하나가 웬만한 나무의 몸통만 했다. 순식간에 숲을 점령해버린 용혈수의 자태에 헬르벨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게 대체 무슨….”

“…….”

헬르벨의 말에 희연은 답할 말이 없었다. 그녀 또한 용혈수라는 게 이렇게 크게 자랄 줄은 몰랐다.

제 손목에 걸린 나무 팔찌를 힐끔 본 희연은 이따 닉을 보면 감사하다고 인사할 게 아니라 절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을 했다.

이게… 무슨 렙 2, 30대용 액세서리야.

황망함에 숨을 길게 내쉰 희연은 고개를 들었다.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용혈수는 희었다. 나뭇잎 색은 여렸다. 그러나 그 흐릿하고 어찌 보면 유약한 색과는 달리 외양은 굳건했다.

저 밑에서부터 시작된 황금빛의 불꽃에도 쉽게 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뒷짐 지고 서서 타오르는 용혈수를 지켜보고만 있는 악마에게선 여유가 넘쳤다.

“…재수 없어.”

어디 한번 끝까지 발악해 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재수 없는 악마에게 집중할 때가 아니었다. 타오르는 나무의 밑동을 보며 인상을 찡그리는 헬르벨에게 희연은 말했다.

“헬르벨.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하면 나갈 건가요?”

“…….”

“당신의 가족이 신전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고, 굳이 위험하게 악마랑 싸워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저주라는 것도 풀 수 있다는 모든 전제하에요.”

헬르벨은 입을 달싹였다. 희연은 그 답을 기다렸다. 악마가 한 말 중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말이 있었다. 사람은 유혹에 변명한다. 그 유혹이 끌리면 끌릴수록 말이다.

“나는, 그래서는 안 돼…. 그건-.”

“당신의 부모님이 더 이상 올바르기만 한 아들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당신들의 아들이 희생함으로써 얻은 평온이 싫다고 하더라도?”

“…….”

그 변명에 기대어 유혹을 받아들인다. 헬르벨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희연이 말하는 것들의 달콤함을 누구보다 바랐다. 답하지 않는 것으로 이미 그의 답을 들었다 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희연은 입을 열었다.

“설득 끝났어요!”

힘껏 외침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달만이 휘영청 떠 있던 하늘 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마법이나 연금술이 아닌 과학이 발전한 현대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이 판타지 세계관인 게임 속에서 마법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수준이어야 하는 걸까.

그 답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희연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에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 헬르벨이 악마를 상대할 때 보여주었던 것들은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의 풍경이었다.

허공에 새겨진 작은 점으로부터 시작된 검은 선들이 서서히 몸짓을 키워 나갔다. 마침 뱀이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하늘에 흩뿌려진 먹이 퍼져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검은 선이 무언가를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원. 그다음은 문자. 문자는 문장이 되고 엮이며 하나의 도형이 되었다.

거대한 원이 마주 보고 작은 원 두 개가 큰 원의 양옆을 차지한다. 거대한 역삼각형이 만들어졌다. 각각의 원에는 다른 그림이 담겼다.

작은 원에 담긴 것은 태양과 달. 커다란 원에는 누군가의 눈동자와 여덟 개의 꼭짓점을 가진 별. 사방으로 기지개를 켜는 잎사귀 없는 마른 나무의 가지.

그 마법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검은 낫을 든 소녀였다. 뜻도 위력도 알 수 없으나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리는 마법진을 바라보던 희연은 눈을 깜박이며 옆에 있던 헬르벨에게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킹 님, 흑마법사인가요?”

“몰랐나?”

“…….”

물리 마법사라 생각했던 사람이 전통 마법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 조금 전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흑마법사라는 걸 어떻게 아는가. 하지만 생각해 보니 킹스메이커가 지금껏 희연에게 보여주었던 마법은 죄다 시꺼먼 것들뿐이기는 했다.

희연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황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대규모 마법으로 보이는 것을 시전하는 킹스메이커와 뒤늦게 그에 대응하는 마법을 펼치기 시작한 악마.

희연과 헬르벨은 그 사이에 끼어 용혈수 나무의 튼튼함을 믿어야만 하는 처지였다. 마침내 완성된 킹스메이커의 마법은 번뜩이던 눈동자가 휘어지는 것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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