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사람이 너무 경이로운 광경을 보면 말이 안 나온다고 했던가. 희연이 지금 딱 그 상태였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생존 본능에도 불구하고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역삼각형의 마법진은 어딘가로부터 연결된 통로라도 되는 것 같았다. 거대한 검은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의 정체를 희연은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황금색의 불꽃이 그것들을 태우고 밀어내어 속도를 늦춘 뒤에야 거무튀튀한 것들의 정체가 눈에 들어왔다.
새까만 불꽃을 온몸에 두른 검은 새였다. 이전에도 몇 번 보았던 그 마법. 그러나 그때 보았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과 스케일이었다.
“…여기 숲 망가진 거 나중에 고칠 수 있겠죠?”
“…….”
헬르벨은 답하지 않았다. 목이 뻐근해질 때까지 새까만 마법을 바라보던 희연은 그 마법의 대상으로 눈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간신히 피어오르는 촛불 같다고 해야 할까.
킹스메이커의 마법처럼 커다란 임팩트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법을 막으며 천천히 밀어내고 있는 악마의 마법은 서서히 화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마침내 입을 쩍 벌리는 용의 모습으로 변한 황금의 불꽃은 제게로 쏟아져 내리는 검은 새 떼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게임사에서는 왜 하향 패치를 안 하는 거지?”
저 악마, 유저가 잡으라고 만든 거 맞나?
악마가 두르고 있던 하얀 두건은 진즉 타버린 지 오래였다. 불꽃의 관을 두른 검은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휘날렸다.
킹스메이커도 악마도 무언가를 빠르게 입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희연은 킹스메이커 옆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마법진을 통해 그들이 중얼거리는 것이 일종의 마법 주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래하듯 이어지는 그 주문이 끊길 경우 마법 또한 흐름이 끊기리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희연은 킹스메이커를 돕고 악마를 방해하기 위해서 인벤토리에서 돌멩이를 끄집어냈다.
반짝이는 돌멩이를 헬르벨이 의아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런 그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주며 희연은 들고 있던 것을 힘껏 집어 던졌다.
열심히 주문을 외우는 악마에게로.
맞을 거라고 기대하고 던지는 게 아니었다. 신경을 거슬리게 해 주문 외우는 것을 방해라도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름 없는 악령 : 얍….]
“…어?”
희연의 로브 두건 속에 숨어 있던 악령이가 튀어나와 까만 안개 뭉치를 던지자 상황이 바뀌었다. 검은 안개에 휩싸인 돌멩이는 렙 4 신관이 던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속도와 위력으로 날아갔다.
악마의 머리 위로.
그 결과물은 헬르벨마저 굳게 만들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악마의 입이 멎었다. 그런 그의 위로 킹스메이커의 새로운 마법이 날아들었다. 검은 구체가 날아들며 검은 새 떼들이 그것에 달라붙었다.
누가 봐도 위험한 분위기를 연신 흩뿌리는 거대한 그것은 연달아 날아와 악마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땅이 흔들리고 지반이 뒤틀렸다. 뿌리째 뽑힌 나무가 애처롭게 굴러다녔다.
나무를 꼭 붙잡고 버틴 희연이 고개를 내밀었을 때 보게 된 것은 그야말로 자연의 재앙을 고스란히 받아낸 숲의 모습이었다.
“산사태가 나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싱크홀이라고 해야 하나? 커다란 구덩이가 용혈수 나무 바로 앞에 생겼다. 고개를 드니 버섯의 밑동 같던 나무줄기와 빼곡하던 잎사귀가 구체가 닿은 모양 그대로 패여 있었다.
만약에 킹스메이커가 조금만 위치를 잘못 계산했다면 용혈수 위에 다람쥐 신세가 된 희연과 헬르벨은 곧바로 즉사했을 것이다.
사라진 것들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게 제일 소름 끼치는 점이었다. 그러나 희연은 그 생각을 빠르게 정정했다. 정말로 소름 끼치는 건 따로 있었다.
가령, 그 마법을 맞아 놓고도 죽지 않은 악마 같은 것. 몸이 성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꽃을 휘날리며 붉은 눈을 치뜨는 모습에서 그의 정정함을 엿볼 수 있었다.
재수 없게도 딱 눈이 마주쳐 버린 희연이 잽싸게 고개를 뒤로 물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 앞으로 불꽃의 칼날이 스쳐 지나갔다. 스치지도 않았건만 기껏 회복한 피가 쭉 닳았다. 순식간에 타 죽을 뻔한 희연을 헬르벨이 서둘러 치료해 주었다.
이번에는 진짜 위험했다는 생각을 하며 희연은 이제 정말로 가만히 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악마는 이미 희연의 도발을 정통으로 맞은 뒤였다.
쾅-!!
“…!”
예고도 없이 나무가 기울어졌다. 맥없이 나뭇가지 위를 구르는 희연을 헬르벨이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했으나 그의 팔은 성치 않은 상태였다.
용혈수의 잔가지에 등을 박으며 간신히 굴러다니는 것을 멈춘 그들은 앓는 소리를 내며 중심을 잡았다. 조금 전에 났던 큰 소리와 지금 상황을 통해 분노한 악마가 나무를 베어버렸다는 빠른 결론을 내렸다.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물론 그 전에 희연이 돌을 던졌지만, 그래도 악마의 반응은 너무하다는 결론만 나왔다.
차근차근 산림 파괴자의 길을 걷는 악마 덕에 이 이상 나무 위에 있는 것은 위험했다. 희연은 에흐테를 꺼내 하늘로 도망가려 했지만, 코앞에서 용솟음치는 불꽃 기둥을 보며 내딛던 발을 뒤로 물렸다.
“진짜 싫다….”
불꽃 기둥은 여러 갈래의 줄기로 갈라져 용혈수의 주변을 맴돌았다. 하늘로 도망가는 순간 저것들이 순식간에 달려들 거라는 걸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희연은 악마에게 따지고 싶었다. 쪼렙 신관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해야겠냐고.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열기였다. 위를 보면 불꽃 기둥의 줄기가, 밑을 내려다보면 입을 쩍 벌린 불꽃 드래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얌전히 기다렸다가 킹스메이커에게 구조된다는 선택지마저 없었다. 사방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야금야금 좀먹듯 용혈수가 천천히 불태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희연은 연기 탓에 매운 눈을 찡그리며 헬르벨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힘없이 끌려오는 그의 뒤로 제법 큰 불씨가 툭 떨어졌다. 그들이 서 있던 가지에마저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화마는 순식간에 마른 나무를 잡아먹었다. 무언가 방법을 추구할 틈도 없이 희연과 헬르벨은 아가리를 쩍 벌린 불꽃 드래곤의 입속을 향해 추락했다.
“으아… 아?”
메에에에엣-!
불에 탈 것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지르던 희연의 귀로 낯선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지러운 불꽃의 사이로 스며든 울음소리가 또랑또랑하기 그지없었다.
뜨거운 것 대신 무언가 푹신한 것이 몸을 감싼 뒤에야 희연은 제대로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손발, 몸 모두 푹푹 파묻히는 바람에 한참을 버둥거린 끝에 희연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웬 구름이었다. 그것도 장미 모양으로 몽글몽글 뭉친 하얀 구름. 옆을 보니 헬르벨 또한 의아하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죽어서 천국 왔나?”
아니다. 하늘에서 검은 새가 투척형 폭탄처럼 떨어지고 불 줄기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 아직 죽지 않은 게 확실했다. 푹신한 하얀 구름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 뒤에야 희연은 지금 상황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을 받아낸 것은 구름이 아니었다.
“메에에에-.”
하늘을 나는 구름 양이었다.
[메우메우 : 구름 성에 사는 구름 양 (주인 : NICK)]
구름 같은 털 사이로 드러난 까만 눈과 눈이 마주치자 알림창이 떠올랐다. 같은 길드 소속 유저의 귀속 펫이기에 알림창이 뜬 것이다.
희연은 익숙한 주인의 이름을 보며 안심했다. 곧바로 메우메우의 털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진짜 무서웠어!”
“메에에에-!”
성격 좋은 구름 양 메우메우는 그녀가 하는 말이 뭔 말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울고 봤다.
메우메우가 입을 뻐끔거릴 때면 구름 뭉치들이 튀어나왔고, 그것들은 거대한 방벽이 되어 길을 막는 불줄기를 밀어냈다. 마침내 불의 장벽을 벗어나 검은 마법을 투척하는 킹스메이커를 발견한 희연은 꼭 쥐고 있던 구름 양의 털을 놓고 양팔을 활짝 펼치며 외쳤다.
“보고 싶었어요!”
“오리 님!”
격정적인 재회를 맞이하면서도 킹스메이커의 손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낫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새로운 마법진이 중첩되고 땅으로 떨어졌다.
살아 있는 마법의 신께선 희연과 헬르벨이 무사 구조되는 사이에도 실시간으로 자연 파괴범 역할을 착실히 하고 있었다. 참담해진 달빛의 요람을 보며 얼굴을 쓸던 헬르벨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건지 이제 설명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
그는 지금의 이 일련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이 너무 많았다.
갑자기 이상한 나무를 소환하지 않나, 설득했다고 외치자마자 리퍼 공작이 나타나지를 않나. 복잡함이 서린 한숨을 내쉬는 헬르벨의 모습을 보며 희연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헬르벨이 죽음을 각오했던 조금 전, 서글픔에 고개 숙인 희연은 훌쩍이는 것과 동시에 열심히 길드 채팅을 쳤다. 채팅이라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대략적인 상황을 빠르게 주고받았고, 계획을 세웠다.
얼마 안 있어 이곳에 도착한다는 킹스메이커의 말에 희연은 일단 시간이라도 끌 겸 닉의 조언에 따라 용혈수를 소환했던 것이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색하게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희연의 모습에 헬르벨은 눈을 가늘게 떴지만, 킹스메이커의 난입으로 인해 당장의 심문은 중단되었다.
“대화는 나중에 하는 거로 하고, 그래서 헬르벨? 당신은 여기서 나가기로 마음먹은 거죠?”
“…….”
막상 저리 물으니 헬르벨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희연은 그 심정을 이해했고 킹스메이커 또한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두 사람의 차이점은 상대를 얼마나 배려해 주는가였다.
언제나 느긋한 편인 희연과 달리 킹스메이커는 효율적인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헬르벨이 선택을 하지 못한다면 그가 나아갈 길은 하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줄 준비가 언제든 되어있었다.
“안 됐으면 빨리하는 게 좋을걸요. 신전에서 헬르벨 당신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니까요.”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네?”
헬르벨보다 더 격하게 반응한 것은 희연이었다.
고개를 홱 드는 희연만큼이나 헬르벨 또한 굳은 얼굴로 킹스메이커를 바라보았다. 숲에 콕 박혀 있느라 바깥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던 두 사람을 위해 킹스메이커는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제가 신전의 기록을 본 것 때문에 시드론의 왕에게 호출을 받았어요. 지금까지 빌려 갔던 것들과 달리 좀 스케일이 큰 건이라서…. 그런데 그 정보가 신전 측에도 흘러 들어갔고 내가 헬르벨 당신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란 게 들킨 거죠.”
“…….”
“신전은 헬르벨 당신으로부터 시작된 모든 일을 덮으려 할 거예요. 신전의 입장에서 봤을 때 알려져 봤자 자신들의 수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그녀의 말에 희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영 못마땅하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런 희연과 달리 헬르벨에게선 아직까지 그리 격정적인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 헬르벨을 관찰하며 킹스메이커는 말을 이었다.
“일단은 없지가 시간을 끌고 시드론의 왕이 신전에 출정권을 최대한 늦게 쥐여 준다고 약속은 했는데….”
“그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거예요?”
희연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수가 꽤 큰 퀘스트라, 에빌론에서 빈둥거리던 고렙 유저들 대부분이 토벌에 참여했어요. 심지어 교국 쪽 유저들까지 우르르 오고 있으니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해요.”
여기까지 알았다면 이제 자신에게 선택권은 하나밖에 없음을 알 텐데.
킹스메이커는 그리 생각하며 헬르벨을 보았다. 당장에 알겠노라 답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과 달리 헬르벨은 끝까지 제 인생을 위한 답을 입에 담지 못했다.
하기야 장장 1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어린 시절은 흐릿하다. 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고. 결국 헬르벨에게 있어 신전에서의 삶이 제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뜻이 된다. 그것의 바탕이 세뇌였든, 철저한 교육이었든.
거기다 그의 가족은 여전히 보살핌이라는 이름으로 신전의 감시를 받고 있으니….
헬르벨을 흘겨본 킹스메이커는 다시 마법을 준비하며 희연에게 말했다.
“오리 님. 길마님이 일단 숲 경계에서 다른 사람들 오나 안 오나 지켜보고는 있는데, 그쪽에서 연락 오기 전까지 헬르벨을 설득 못 하면 둘 중 하나는 결정해야 해요.”
“…….”
“헬르벨을 두고 우리끼리만 떠나든가, 억지로 끌고 가든가.”
“일단 후자요.”
희연은 빠르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