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어쨌든 헬르벨을 데리고 나가리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설득은 그 이후에 해도 된다는 것이 희연이 내린 결론이었다.
“…허.”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그런 희연의 당당함에 헬르벨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서 그녀는 가능성을 보았다. 희연은 게임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진지한 모습으로 설득을 시작했다. 내심 티티 때처럼 그 특성이라는 것이 뜨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잘 들어요, 헬르벨. 어차피 이따가, 유저들,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우르르 올 거거든요? 그러면 저 악마가 뭘 할까요? 공격하겠죠? 그러면 이방인들을 헬르벨 잡으러 온 건 뒤로 미루고 악마 토벌부터 하려고 할 거예요.”
“…….”
“신전 측에서는 악마를 잡았으니 그에 대해 뒤처리를 해야 하고, 그러면 헬르벨을 잡는 걸 다시 뒤로 미룰 수밖에 없게 돼요. 그러면 그 틈에 미, 미륵?”
잘 말하다 말고 버벅대는 희연의 모습에 킹스메이커가 서둘러 말했다.
“아, 미르그 미르그. 오타예요, 그거.”
“아…. 그러니까 미르그의 신앙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방법이 있고-.”
헬르벨은 손을 들어 희연이 말하는 것을 막았다. 그녀가 왜 잘 말하다 말고 틀리면 안 되는 것을 틀렸는지 알 것 같았다.
이방인들끼리는 보이지 않는 소통 방법이 따로 있다고 하더니.
헬르벨의 예측대로 희연은 지금 그 미지의 방법 즉, 귓속말 채팅을 커닝 페이퍼로 쓰고 있었다. 헬르벨의 반응에 눈을 데구루루 굴린 희연이 조심스레 킹스메이커에게 물었다.
“들킨 거죠?”
“들켰네요.”
희연과 킹스메이커의 대화에 헬르벨은 피곤함을 느꼈다. 그런 그와는 별개로 어차피 들킨 거, 희연은 막 나가기로 했다.
“헬르벨, 사실 당신은 선택권이 없어요.”
“…….”
“이 높이에서 뛰어내릴 건 아니잖아요!”
희연의 말에 동의하듯 메우메우가 힘차게 울었다.
메에에에에엣-!
***
[메우메우가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
이름 없는 달빛의 요람의 경계선에 서 있던 닉은 뜬금없는 알림에 고개를 기울였다가 금세 수긍했다. 그의 구름 양은 원래가 매일 즐겁고 흥겨운 양이었기 때문이다.
공격력은 다소 부족하지만, 방어력과 하늘을 날 수 있다는 특수성 때문에 킹스메이커와 함께 보냈는데 제 역할을 하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시야를 공유해 그쪽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략이나마 파악하고 싶었으나 느긋하게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탈것들을 타고 날아오는 사람들을 속속들이 살피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영원한 밤의 시간을 품은 달의 공간에서 퍼져 나가는 인공적인 빛에 동물들이 놀라 도망치는 것이 느껴졌다. 숲이 술렁인다는 표현이 알맞았다.
킹스메이커의 말에 따르면 아직 시드론의 왕이 신전에 출정권을 쥐여 주지도 않았을 텐데….
성격 급하고 남들보다 우위를 점하고 싶은 이들, 혹은 느긋한 시드론의 왕과 달리 마음 급한 신전 측에서 개인적으로 퀘스트를 내린 사람들일 것이다.
암살 길드의 부길마 출신인 청산가리가 준 정보에 의하면 신전에서 암살 길드에 소속된 유저들에게도 퀘스트를 내렸다고 한다.
청산가리 본인 또한 헬르벨의 암살 퀘스트를 받았다고 하니 신전에서 얼마나 이 일에 사활을 걸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길드를 나온 암살자에게도 의뢰를 넣었으니 말이다.
“어? 너 왜 여기 있냐? 너도 토벌 왔어?”
멍하니 서서 청산가리와 했던 대화를 곱씹고 있던 닉에게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묵직한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깡통 헬멧을 쓴 유저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빛을 받고 반짝 빛나는 갑옷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잠시 생각하던 닉은 그가 간간이 대형 토벌전이나 던전을 돌 때 만난 적 있던 유저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오래된 게임의 특성상 상위권에 속한 유저들은 서로 안면이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여러 길드가 함께 보스 공략을 도는 경우가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 또한 그런 경우였다. 신전에서 내린 대형 토벌 퀘스트.
이 자리에 그가 아닌 킹스메이커가 있었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닉은 인벤토리에서 제 무기를 꺼냈다.
흰색 바탕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꽃과 줄기, 잎사귀 등의 장식들이 조개껍데기처럼 다닥다닥하게 붙은 리라였다.
“…닉?”
“…….”
PK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는 빠르게 상대를 훑었다. 미리 찾아오기는 했으나 곧바로 침입할 예정은 아니었던 듯 그와 함께 온 대부분의 유저는 무기를 손에 쥐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신전 측에서 시드론의 왕에게 출정권을 받는 그 순간 곧바로 공략에 들어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은 닉뿐이었다. 얼떨결에 견제를 당한 남자는 불안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물었다.
“…야? 너 지금, 아니지?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길드 뉴비 퀘스트 도와주는 중이라….”
말을 흐리는 닉을 보며 뉴비세스 메이커와 나름 우호 길드인 <마이 페이버릿 쥬씨>의 길드장 청포도 맛 알로에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그는 곧바로 소리를 질렀다.
“방패 들어!”
청포도 맛 알로에가 외치자 곧바로 탱커들은 모두 방패를 들고 힐러들은 그들에게 빠르게 버프 스킬을 걸어주는 것과 동시에 회복 스킬을 캐스팅했다.
그러나 자연재해는 위대했다.
[스킬 <설원의 노래>를 사용합니다. 지역의 일부를 변화….
‘겨울 속에 파묻히는 것들의 울음소리.’]
[눈과 얼음의 드래곤 ‘루로’를 소환합니다.]
[칭호 <드래곤을 길들인 자> 소유자입니다.]
[최고급 테이밍 활용(패시브) / 드래곤 피어(패시브)…]
[눈과 얼음의 드래곤 ‘루로’의 모든 능력치가….]
[칭호 <세계수의 사도(동화)> 소유자입니다.]
[숲의 친애(패시브) : 세계수의 사도에게 숲은 친우가 될 것을 약속합니다. 숲속의 칸타타 사용 시 원하는 속성을 임의로 결정지을 수 있으며….]
[스킬 <숲속의 칸타타>를 사용합니다. 현재 서 있는 장소의….
‘숲속에서 노래해 보자!’]
[숲속의 칸타타 부여 속성 얼음! (스킬 대상 : 눈과 얼음의 드래곤 ‘루로’)]
[스킬 <장미의 저주>를 사용합니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지기 때문이야’.]
줄줄이 떠오르는 알림을 대충 치우며 닉은 손을 들었다. 까맣게 물든 숲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나무와 땅에는 서리가 끼고 잎사귀 위에는 눈이 살포시 자리 잡았다. 밤의 이슬은 얼어붙고 꽃은 얼음 속에서 잠들었다.
손끝이 얼어붙는 겨울 숲이 완성되었다.
아름다운 하얀 드래곤은 조그마한 인간들을 향해 제 꼬리를 휘둘렀다. 아무리 상대의 스킬이 좋고 능력이 뛰어난들 타고나는 체격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법이다.
루로의 꼬리에 휩쓸린 이들 중 다소 레벨이 낮거나 장비가 준비되지 않은 이들은 튕겨 나가듯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의 꼬리 짓 한 번의 위력이란 작은 동산 정도는 박살 낼 수 있는 위력이다.
조금 밀려나기는 했으나 그것을 방패로 막고 버텨낸 청포도 맛 알로에는 가히 한 길드의 길드장으로 뽑힐 법한 실력을 갖춘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침착하게 심호흡한 그는 닉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이거 당장 우리가 길드전 걸어도 할 말 없는 일인 거 알고서 하는 짓이지?”
길드전….
청포도 맛 알로에의 말을 곱씹던 닉은 손끝으로 리라의 현을 튕기며 말했다.
“그러면 뭐… 어쩔 수 없는 거죠.”
별스럽지 않은 것을 대하는 듯이 말하는 닉의 모습에 청포도 맛 알로에는 길길이 날뛰었다. 길드전이라 함은 모든 길드가 즐기지만 동시에 꺼리는 콘텐츠.
잘못했다간 길드 하우스의 기둥 여럿 날려 먹는 개싸움의 서막이었다. 그런데 그걸 듣고 어쩔 수 없는 거죠?
“야!”
그는 결국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을 상대하면서도 입은 빠르게 움직였다. 청포도 맛 알로에의 주장에 따르면 뉴비에 미쳐서 이젠 미래도 생각하지 않냐고는 하지만….
희연에게 있어 묘하게 양심에 찔리는 것이 있는 닉은 할 말이 없었다.
충분히 고렙에 속함에도 테이머 특징상 그는 만렙을 찍기가 어려웠다. 그의 경험치는 고스란히 그에게 오는 것이 아닌 테이밍한 존재들에게도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만렙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속 뉴비님 뉴비님 하며 달라붙는 부길마들이 귀찮아서 희연을 소개해줬다. 일종의 떠넘기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내심 그것이 미안했다.
그러니 이후 조금 귀찮은 일이 생긴다 해도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얼떨결에 드래곤과 그 테이머를 레이드 하게 생긴 청포도 맛 알로에를 비롯한 다른 유저들은 지금 이 상황이 뭔가 싶었지만 말이다.
본의 아니게 휘말려 싸우게 된 청포도 맛 알로에의 일행에게 미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닉은 리라를 연주했다.
그가 연주하는 느릿느릿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따라 땅을 파헤치며 나온 서리 낀 나무줄기들이 유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드래곤 하나 상대하기도 벅찬데 고렙 테이머의 보조까지 더해지니 그것을 상대하는 유저들로선 미칠 지경이었다.
루로가 커다란 날개로 빠르게 날갯짓하자 그들이 모인 숲 근방으로 작은 태풍이 부는 듯한 바람이 일었다.
“으아아아악! 미친놈들아!”
그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땅에 검을 박으며, 결국 청포도 맛 알로에는 욕설을 내뱉었다. 진심으로 덤빌 수 있는 저쪽과 달리 그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견제.
혹여나 닉을 로그아웃시켜 별님과 만나게 해주는 순간 킹스메이커가 그 검은 낫을 들고 나타날 것이 뻔했다. 그들의 목을 날리지는 않을지언정 그들의 길드 하우스에 마법을 날릴 것이다.
그것도 여러 번! 제 기분이 풀릴 때까지! 어쩌면 그들의 길드가 해체될 때까지!
그는 집 잃은 슬픔 따위 게임에서 느끼고 싶지 않았다. 겨우겨우 건물주의 꿈을 이뤘는데!
“악! 으악! 으아악!”
청포도 맛 알로에가 할 수 있는 것은 통곡의 외침을 내뱉는 것뿐이었다.
***
호기로운 희연의 외침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평소라면 몰라도 현재 헬르벨의 상태는 메우메우의 밑으로 뛰어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또한, 어찌어찌 미묘하게 사악한 계획을 세우는 이방인들을 피해 구름 양 위에서 내려간다 해도 밑에는 악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헬르벨은 시간이 지날수록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지고 있었다.
희연이 먹인 사탕이 나름대로 효과가 있어 이곳까지 뛰어왔지만, 슬슬 그것도 한계였다. 그런 그가 악마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헬르벨의 상태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기에 희연은 자신도 모르게 고통에 눈을 질끈 감는 그의 모습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았다. 킹스메이커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오리 님, 일단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여기서 나가면 치료할 방법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헬르벨은 성 속성이잖아요.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는 킹스메이커의 말이 맞다는 듯 대강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그 작은 행위만으로도 눈앞이 어지러웠음에도 말이다.
그런 헬르벨을 챙기는 희연을 보며 킹스메이커는 고민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한편 그녀의 입은 연신 다음 마법을 준비하며 작은 소리로 바람에 속삭이고 있었다. 여기서 헬르벨을 더 자극한들 그가 확실하게 결심을 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의 신실함은 거의 세뇌에 가까웠고, 절박함 속에 피어난 관념과도 같았다.
역시 그 방법이 제일 빠르려나.
자신의 특성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희연과 달리 킹스메이커는 본인의 특성이 발동되는 조건을 이미 완벽하게 숙지한 상태였다.
희연의 앞에서는 나름 자제했지만 이쯤 되면 어쩔 수 없다는 게 그녀 나름의 결론이었다. 상처받을 헬르벨보다는 희연의 퀘스트 성공 여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