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바로 코앞에서 산사태가 일어도, 바로 앞에 벼락이 떨어진다 해도 이 정도의 소음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귀가 먹먹했다. 머릿속이 함께 울렸다. 멀미라도 하듯 속이 조금 울렁거릴 정도였다. 희연은 설정에서 통각을 최대치로 끌어 내렸다. 청각의 고통이 사라지자 확실히 조금 전보다 훨씬 나았다. 다만 남은 문제는 확보되지 않는 시야였다.
처음 루로의 등에 타서 봤던 빛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희연은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눈부심에 감히 눈을 뜰 생각도 하지 못했다. 꾹 감은 눈꺼풀 사이로도 하얀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느껴졌다.
특수 스텟 신성. 정화석은 오로지 이 신성 스텟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희연은 이 스텟을 비롯한 모든 능력치가 빈약했다. 헬르벨은 모든 스텟이 우월했지만 무언가를 실현하기엔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헬르벨이 사용한 방식은 희연을 매개체 삼아 제 능력을 발현하는 거였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는데 킹스메이커 왈 가능하다더라.
훌륭한 마법사의 도움과 보조로 희연은 헬르벨의 스킬을 발현시키는 것을 성공했다. 그 결과 새로운 스킬이 생겼다.
[새로운 스킬 <신성의 제작>을 배웠습니다. 앞으로 정화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정화석 제작을 위한 최소 스텟 : 신성 50 이상)]
배웠다고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헬르벨이 만든 커다란 정화석, 그리고 결계의 밖에서 닉이 뿌린 정화석으로 인해 안팎으로 압박을 받은 달빛 요람의 경계는 물렁물렁해지고 있었다.
이제 그 결계를 완전히 박살 낼 마법을 시전할 장본인인 킹스메이커는 장관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눈앞에 상황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이런 건 또 처음 해보네.”
게임의 첫 시작부터 함께한 겜 인생 중 수많은 사고와 없던 콘텐츠도 만드는 기상천외함을 보여준 그녀였지만 하늘에 걸린 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고는 친 적은 없었다.
손을 들어 아린 흰빛을 막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나무로 된 본체와 하얀 날을 가진 낫이 들려 있었다. 평소에 들고 다니던 검은 낫은 현재 악마를 막는 결계진의 중심이 되어있기에 다른 것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선 그녀의 본 무기인 지팡이를 들고 싶었지만 사 놓은 무기 교환권이 없어 낫 종류의 것을 쥐어야만 했다. 낫 끝에 붉은 끈으로 묶인 새 모형의 나무 장식이 바람 따라 거칠게 날아다녔다.
“와아….”
눈부신 빛이 조금 약해진 틈을 타 메우메우의 등에서 뛰어내려 결계를 부수기 시작한 킹스메이커를 지켜보며 희연은 연신 터져 나오는 감탄사를 막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찬란한 빛을 향해 달려드는 악당 같았지만 그 모습이 멋이었다. 블랙 히어로 같다고 해야 할까. 다행인 점은 희연이 그 장면에 완전히 정신 팔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새 상태가 더 악화되었는지 예고도 없이 툭 떨어지는 헬르벨의 머리를 손으로 잽싸게 받친 희연은 놀란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헬르벨!”
[이름 없는 악령 : 아직 안 죽어써….]
“…아직이라고 하면 안 되지! 그냥 안 죽었다고 해!”
미니미 악령에게 짧은 타박을 날린 희연은 헬르벨을 조심조심 눕혔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이제는 점점 파래지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면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거겠지?
정화석을 만들 때만 해도 괜찮다고 하더니 결국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희연은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다시 한번 회복 스킬을 걸어주었다. 확실히 헬르벨의 안색이 조금이지만 좋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 변화에 안도의 미소를 짓던 희연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린 모습 그대로 굳어버렸다.
“…….”
[이름 없는 악령 : 움직이지 마.]
악령이가 따로 말하지 않았다 한들, 희연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못 한다 쪽이 더 옳은 표현이다.
희연은 슬그머니 눈을 굴려 킹스메이커 쪽을 보았다. 눈부심에 슬쩍 찌푸려진 눈꺼풀 사이로 열심히 검은 마법을 날리는 그녀가 보였다.
안타깝게도 이쪽에 신경을 써 줄 여력은 없어 보였다.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키는 희연에게 상대는 속닥였다. 희연의 목을 움켜쥔 손에 슬그머니 힘을 가하면서.
“그래…. 재미는 좀 봤나?”
“…자, 미엘.”
“이제는 감히 내 이름도 부르고. 기세등등하군.”
언제 결계를 깬 걸까. 눈을 굴려 밑을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풍성한 메우메우의 구름 털 덕분에 불가능했다. 긴장감으로 인해 식은땀 배인 손이 구름 털을 꾹 움켜쥐었다.
메우메우가 악마의 존재를 킹스메이커에게 알리듯 애처롭게 울었지만, 빛과 함께 벼락처럼 울리는 소음 탓에 저쪽에선 들리지 않는 듯했다.
통각 수치를 최대로 내리길 잘했다. 적어도 쭉쭉 내려가는 피 통에 비해 아프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눈을 질끈 감고 죽음을 준비하는 희연을 보며 분노로 눈이 멀었던 악마, 자미엘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끝까지 경계하거나, 확실히 내 목을 베었어야지.”
도망치는 것도 못 하는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 희연은 마음 같아선 천국 가라 이 악마야! 를 한 번 더 시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미엘이 조금만 힘을 주어도 희연의 목은 똑 부러질 것이다. 아니, 뜯겨 나갈 것이다. 제 목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며 할수록 안색이 나빠지던 희연의 어깨가 긴장감으로 인해 딱딱하게 굳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기이할 정도로 차가운 검은 손톱이 목 위를 살살 긁는 것이 느껴졌다. 느릿느릿 떨리는 숨을 내쉬는 희연의 귀에 입을 가까이 한 자미엘은 마치 유혹이라도 하듯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우리는 아직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었지?”
“…?”
“잊었나? 내가 기회를 준다 했던 것 같은데. 헬르벨이 끼어드는 바람에 제대로 대화를 마무리 짓지 못했지.”
사람의 온기를 흉내 내듯 서늘하던 자미엘의 손에 열기가 머물기 시작했다. 그는 그 열감 하나가 사람을 어떤 식으로 자극하는지 안다는 듯 손톱자국이 길게 난 목 위를 손으로 덮었다.
“다시 말해줄까. 헬르벨. 그자의 영혼을 내게 넘긴다면 기꺼이 자비를 베풀어 살려주도록 하지. 하지만 너는 희생자지. 모두에게 잊힌 존재를 찾으러 온 자.”
“…….”
“너의 존재가 가련한, 영혼 하나를 구원할 것이다.”
처음에는 차가워서. 점점 따스해지는 그 온기가 기이해서 희연은 목을 움츠렸다.
“자, 선택해라 이방인. 네가 헬르벨을 내게 넘긴다면 놓아주지. 넘기지 않는다면 이 세계에서 너의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게임 접을 때까지 괴롭힌다는 소리였다. 그 치사함과 악랄함에 희연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물론 헬르벨의 영혼은 내 것이 될 것이고.”
덧붙이는 말에는 앙다문 입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희생자. 네가 그를 위해 희생한다면 그는 구원받을 것이며, 너 또한 썩 괜찮은 삶을 살 것이다.”
“그 희생이 어떤 건데.”
악마가 헬르벨을 놔준다면 한 번쯤은 죽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미엘은 이방인의 특성을 이미 아는 자였다. 죽음에서 자유로운 이방인인 희연을 쉽게 놔주지 않았다.
“존재의 가치를 내게 두고, 삶의 가치를 내게 바치는 것이지.”
“…….”
대충 소속도 직업도 악마 관련으로 바뀐다는 뜻인가?
자미엘이 한 말을 곱씹으며 희연은 생각했다. 헬르벨은 조상이 악마와 관련 있었다는 이유로 이단이라 몰렸다. 만일 희연이 희생을 택하게 될 시 그녀 또한 이단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신관이라는 직업은 당연히 뺏길 것이고 앞으로 게임을 하는 내내 이단이라는 꼬리표가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인생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 인생 하나를 바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 제안을 받아들여 희생하고 캐릭터를 삭제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악용방지를 위해 캐릭터 삭제 시 새로 생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몇 달이었던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것을 지켜보며 자미엘은 나른한 웃음을 흘렸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제 와 헬르벨을 버릴 리가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는 그저 사냥을 할 뿐이었다. 유혹하는 거였다. 오로지 승리밖에 없는, 정해진 승자의 놀이. 그것들은 일종에 유흥이자 흥정이기도 했다.
초조하고, 무엇이 옳은 선택일지 구별도 할 수 없을 만큼 끝에 몰리도록 몰아붙이고 사냥한다. 포기하는 이에게 달콤하기 그지없는 과실을 내민다.
흔들리는 눈과 희망을 품는 얼굴을 보며 하는 말 몇 마디.
“그도 아니면… 나와 작은 내기 하나 하든가.”
“…내기?”
“그래. 내 지루함을 덜어줄 아주 작은 내기. 그 옛날 카스파가 나와 했던 그 비슷한 것.”
이 내기에서 그는 잃을 것이 없었다. 사냥과 유혹이란, 원래가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하는 것이다. 자미엘은 눈을 굴려 정신을 잃은 헬르벨을 보았다. 그에게 미끼는 이제 필요 없었다.
“내기의 결과와 상관없이 네가 수락한다면… 헬르벨을 놓아주도록 하지.”
그 말에 희연은 그 내기의 내용이 뭐든 간에 자신이 그것을 거부할 수 없음을 예감했다.
“이 악마 같은….”
뒷말은 새소리일 것이 뻔했으므로 희연은 입을 다물었다.
***
시드론의 수도에 위치한 대신전 옵세푸그마.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오래된 신전으로 모험과 동심의 신 르센 을 모시는 신전 중에서도 제법 이름난 곳이었다.
그곳에 소속된 대주교 냐드엘은 옵세푸그마의 자랑인 정원을 놔두고 인적 드문 곳을 서성이고 있었다. 오늘따라 날이 어두웠다. 깊게 서린 어둠은 흐릿한 달빛 탓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등불 하나 없이 밖으로 나온 냐드엘에게선 초조한 기색이 감춰지지 않았다.
“얼른, 얼른 잡아야 할 텐데….”
릴리아 대주교에게서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그는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노후를 위해 준비해두었던 자산에도 손을 댔다. 그 정도로 그에게 있어 이번 일이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완벽하게 일이 마무리되어야만 했다. 약속된 존경과 평온한 삶을 위해서라도. 꽤 많은 수의 암살자들을 고용했으니 이제 좋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그의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한 명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헬르벨….”
건방진 애송이. 이단의 후손. 죄인의 후손!
그가 발견한 무기였다. 친히 그 시골 영지까지 가 불편한 생활마저 감수하고 신전에 귀속시킨 자산이었다.
성기사들에 비해 부족한 무력. 그로 인해 감수해야 했던 묘한 멸시와 비웃음. 냐드엘은, 그를 비롯한 신관들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었어.”
결국 그들은 원하던 것은 얻지도 못했다. 자미엘에게 대가를 바치고 얻은 마탄으로 전투 신관을 만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재미없는 것들, 흥미롭지도 않은 일에 내 힘을 왜 부여해야 하지? 소환했으니 따라라? 내가 네 목을 따 버리는 것이나 걱정하고 내게 바칠 싱싱한 제물이나 가져와.’
간신히 소환해낸 악마의 태도는 한결같았고 준비했던 사형수들은 동이 났다. 악마를 처단하기 위해 성기사들에게 자미엘의 존재를 밝힐 수도 없었다. 악마 소환사는 변명할 틈도 없이 이단으로 몰려 즉결처분이었다.
결국 무력이 부족한 그들끼리 자미엘이라는 존재를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냐드엘은 머리를 굴렸다. 자미엘이라는 악마가 기록되었던 책을 붙잡고 조사해 숲지기 막스의 후손들을 찾아냈다.
자미엘의 도움 없이 헬르벨이라는 전투 신관을 만들어냈다. 피는 짙었기에 죄인의 후손은 쓸 만한 총잡이였다. 교리를 익히고 신실한 마음만 갖게 만들면 됐다.
그렇게 한 악마와 한 신관은 달빛의 요람으로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