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비세스 메이커 (52)화 (52/251)

52화

“…적절한 인력을 배치했을 뿐이야.”

그 방법이 다소 비인도적이었다 할지라도. 아니다. 애당초 헬르벨, 그가 잘했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잘했으면 됐잖아!”

잘못했다고 빌면서도 꺾일 줄 모르던 그 눈.

헬르벨은 처음부터 그랬다. 혜미안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영지의 숲을 닮은 이였다. 언제나 굳건했고 주제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언젠가 제 고향으로,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헬르벨이 악마에게만 집중하도록. 제집으로 돌아가고픈 그 욕망을 스스로 죽이도록.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풋낯의 죄인이 되도록 만들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잘되어가고 있었는데!

“망할 리퍼 공작! 건방진 이방인! 삿된 사술을 쓰는 마법사!”

무엇을, 어디까지 알았을까.

지금쯤이면 헬르벨과 이미 접선했을 것이다.

헬르벨은 어디까지 알았을까. 제 조상의 진실? 저주를 건 술사? 그도 아니면….

자미엘, 그 악마를 부른 것이 누구인지까지 아는 것이라면….

“죽여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헬르벨, 그자만큼은 죽여야 한다. 교황의 귀에도 성기사 단장의 귀에도 들어가선 안 되는 진실들이었다.

미르그 교단에까지 알려진다면….

“후우….”

냐드엘은 애써 숨을 고르게 쉬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다급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헬르벨은 그 숲에서 나오는 것은 오로지 죽어을 때 뿐.

그때가 된다면 냐드엘은 기꺼이 선심을 베풀어 그를 고향으로 보내줄 생각도 있었다.

그래, 그 가련한 끝은 고향에서, 가족의 품에서 잠들 수 있도록. 그러니….

“헬르벨….”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아라. 쓸데없는 희망을 품지 말아라. 쓸데없는….

“대주교님.”

“…….”

쓸데없는 짓을… 하고 말았구나.

냐드엘은 일그러지는 웃음을 지었다. 아름다운 대신전 옵세푸그마의 상쾌한 풀냄새 사이로 화약 냄새가 퍼졌다. 피비린내가 바람 따라 흩뿌려졌다.

그를 보는 청년의 얼굴이 낯설었다. 그 옛날 혜미안의 영지에서 보았던 소년이 아니다. 죽은 낯으로 신전에 몸을 의탁하던 그 청년도 아니다.

풋낯의 죄인이 되어 숲지기가 되었던 그자도 아니다. 너는 누구일까. 배신감에 치를 떨며 복수하러 온 어리석은 자?

철컥. 

쇳소리가 고요한 밤을 울렸다. 웃으며 우는 자가 냐드엘에게 물었다.

“냐드엘 대주교님.”

“…….”

“당신은, 당신의 죄를 아십니까?”

언젠가 그가 헬르벨에게 물었던 말이다.

“당신은 한 점 부끄러움을 모르는, 올바른 자입니까?”

언젠가 어린 숲지기라 불리던 소년이 바라던 어른이냐 묻는다. 냐드엘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고목이 그의 길을 막았다.

“이러지 말게, 헬르벨. 어찌 다른 곳도 아니고 이 옵세푸그마에서, 신전에서 그런 흉악한 것을 들이민단 말인가!”

“…내게, 이 총을 쥐여준 것은 당신들이었어.”

“헬르벨!”

냐드엘은 비명을 지르듯 헬르벨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다리는 떨리고 있었고 얼굴의 주름과 웃음은 애써 감추는 두려움을 완전히 가려주지 못했다.

결국 다리에 힘이 풀린 냐드엘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슬을 머금고 반짝이는 풀을 쥐어뜯으며 헬르벨로부터 멀어지고자 하였다.

“당신은 내게, 몇 번이고 물었습니다. 나의 죄를 아냐고. 그 답 지금 들려 드리지요. 아니요. 여전히 나는 나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감히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더냐! 네가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으냐고!”

“…할 수 있습니다. 대주교께서도 해내신 일이니 저 또한 할 수 있습니다.”

헬르벨의 말에 냐드엘은 도망가던 것도 잊고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낯선 얼굴을 한 저 청년이 정말로 낯설게 느껴졌다.

“헬르벨, 가족을 생각해야지! 그들이 남들처럼 살 수 있도록 조치해준 것이 누구인데! 이러는 거 아닐세. 이러지 말게나. 자네의 부모와 어린 동생을 생각한다면 이럴 순 없어!”

냐드엘의 말에 헬르벨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열이 오른 듯 그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케케묵은 감정이 터져 나왔다.

“대체 언제까지! 언제까지 제 가족을 빌미로 나를 휘두를 생각인 겁니까!”

“헬르으읍-!”

차가운 총구가 냐드엘의 입속을 파고들었다. 혀가 눌린 냐드엘은 부러진 이빨이 입안을 굴러다니는 것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내가 당신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지… 끝까지 모르시겠죠.”

책임감. 안도감. 변질된 원망과 지침.

헬르벨은 달빛의 요람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적어도 그의 가족의 이야기를 하는 냐드엘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제 목숨 하나 챙기기 급급한 숲속에서의 생활은 조금이나마 가족에게서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알 수 없는 해방감.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끔찍하게 여겼다.

사실은 다 관두고 도망쳐 홀로 편해지고 싶어 하는 것이 제 본모습이 아닐까. 자신이 그리도 이기적이었던 걸까.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는 걸까. 그래서는 안 되는 건데.

그 감정이 그를 좀먹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해를 입힌다 한들, 누가 저를 알아볼까 궁금하군요. 아무도… 저의 얼굴을 모르는데.”

“헤으윽… 윽.”

“대주교님. 저는… 당신이 내게, 변명이라도 할 거라 믿었습니다. 끝까지… 실망하게 하지 않으시는군요. 당신은.”

“흐으읍! 흐으윽!”

사냥감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헬르벨의 발이 냐드엘의 몸을 짓밟았다. 과거에 그는 어쩌면, 아주 어쩌면 이들이 자신에게 잔정이라도 붙이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저들에게 있어 그는 키우는 짐승보다도 밑이었다. 물건이었다. 무기였다. 아무리 정든들 버리고 다시 구하면 그만인 그런 부품.

지난날의 그는 욕심을 버렸다. 결핍된 욕망과 주어지지 않는 기회에 기대어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잔을 차고도 남아 출렁이는 욕망과 너무나 손쉽게 쥐어진 기회 속에서 그 또한 하나의 죄인일 뿐이었다.

적막한 신전에 총성이 울렸다, 헬르벨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나드엘을 바라보았다. 감기지 못한 눈은 그를 질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꿈을 꾼 것처럼 어지럽고, 누군가 그의 감정을 격양시키다 떠난 것처럼 헛헛했다. 헬르벨은 조용히 총을 거두었다.

***

“헬르벨… 잘하고 있을까요?”

“그럼요. 상태가 안 좋아서 그렇지 헬르벨은 아주 강한 NPC인걸요.”

“그런데 갑자기 왜 신전으로 간다고 한 걸까요? 정황상 이 일의 주범을 잡으러 간 것 같기는 한데….”

“…….”

높은 확률로 자신의 특성 때문에 헬르벨의 인내가 끝난 것이겠지만, 킹스메이커는 그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특성의 주인은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결과물까지 모두 예측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녀의 특성이 먹혀들었던 경우 평화롭게 끝난 적이 없었기에 지금쯤 헬르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죽고 죽이는 살벌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희연의 심신을 상당히 지쳐 보였기에 킹스메이커는 괜한 말은 삼키기로 하며, 연신 걱정의 한숨을 내쉬는 상대를 달랬다.

“오가는 길에 반 시체 꼴로 길바닥에 쓰러지지만 않으면 위험할 건 전혀 없죠!”

“…….”

썩 위로가 되지는 못 했지만, 이어지는 킹스메이커의 말에는 희연 또한 조금은 굳었던 얼굴을 풀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오리 님. 이래 봬도 제가 마법에 일가견이 있거든요. 원래 살아 있는 사람을 상대로 쓰는 마법이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돌아올 때까지 몸 쓰는 데는 문제는 없어요!”

“…….”

그 말에 희연은 제가 봤던 조금 전의 상황을 회상했다. 헬르벨의 팔에 상처를 내고 거기서 흐른 피로 이상한 문자를 적어나가던 킹스메이커.

검게 물든 팔에 그보다 짙은 색의 문자열이 새겨지자 놀랍게도 그의 팔은 그 이전과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그때는 마냥 좋아하며 기뻐했던 희연이지만 지금 그녀의 말을 들으니 혹시 그 스킬은 네크로맨서 스킬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슬프게도 정답일 거 같아 그녀는 그 질문은 애써 삼켰다.

“…춥다.”

대화가 끊기자 서리 내린 것 같은 추위가 느껴졌다. 그들이 입을 열 때면 하얀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자유를 찾아 날아드는 유령들의 발길 같은 흔적이었다.

희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름 없는 달빛의 요람. 그곳의 결계가 사라졌다.

줄곧 그 안에서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던 어린 유령들과 동물들의 영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어느 지점에 닿으면 산화되는 빛이 된다는 것을 보고, 느끼고, 알면서도 그들은 하늘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의 흔적들은 마치 자신들의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듯 숲에 스며들었다. 싸움으로 인해 엉망이 되었던 달빛의 요람으로.

빛이 꺼진 나무에 다시 빛이 맺힌다. 어둠 속에 빛나는 어린 유령들은 달빛으로 빚은 작은 인형들 같았다. 별 대신 하늘에서 춤추고 사라진다.

여린 빛으로만 이루어진 작은 은하수의 길목을 눈앞에서 보는 기분이다.

“…….”

그런 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비단 희연과 킹스메이커뿐만이 아니었다. 사라지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어린 유령들이 있었다.

자유가 아닌 이 숲에 조금 더 머물기로 한 유령들.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는 않은 아이들이었다. 소녀 유령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희연의 옆에 둥둥 떠다니며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던 소녀 유령이 느릿느릿 말했다.

[??? : 나 잊으면 안 돼.]

“…안 잊을게.”

달빛이 되어줄 작은 별들을 증인으로 두고 하는 약속이었다.

[??? : 하지만 말이야. 네가 나를 잊는다고 해도 이번에는 조금 괜찮을 것 같아.]

[이름 없는 악령 : 내가 잊지 말라고 옆에서 말할거야….]

희연의 다리 위에 몸을 얹고 있던 미니미 악령이 짧은 팔을 휘적이며 말했다. 그런 악령이의 말에 소녀 유령은 흐리게 웃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웃음이었다.

소녀 유령은 자유를 찾아 떠나는 다른 유령들처럼 몸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결계가 사라진 숲의 외곽에서 최대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 그녀 또한 숲으로 돌아가야 했다. 제 몸 하나 유지할 힘 없는 그들을 위한 요람으로.

희연을 보며 방긋 웃은 소녀 유령은 잠시간의 이별을 받아들이며 손을 흔들었다.

[??? : 안녕. 나중에 또 보자. 그렇게 보지 마. 그래도 나는 너보다 자유로우니까.]

슬픔을 감추고 장난스러운 어조로 밉게 말하는 소녀 유령을 희연은 잠시 흘겨보았다.

“…그래, 넌 좋겠다. 나는 미래가 저당 잡혔는데.”

그녀의 대꾸에 소녀 유령은 다른 아이들처럼 까르르 웃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맑은 웃음소리를 끝으로 소녀 유령은 그들의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자리를 바라보게 했다. 그런 희연의 시선을 악령이가 손가락을 콱 깨무는 것으로 제게로 돌렸다.

“악! 물지 마! 이젠 아프단 말이야!”

최소치로 내린 통각 수치를 평균으로 돌려놓은 참이었다. 악령이는 저를 노려보는 희연을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피곤하고 힘드니 어떻게든 해달라는 의미였다.

희연은 한숨을 내쉬며 악령이의 몸을 살살 쓰다듬었다. 끈적임 없는 슬라임을 만지는 것 같았다.

“…….”

멍하니 같은 행위를 반복하던 그녀는 왜 그 통각 수치를 내려야만 했는지가 생각나 결국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슬그머니 제 상태 창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닉네임 : 눈오리의 돌격 (뉴비세스 메이커)

레벨 : 4 (????)

직업 : 신관 / 무기 : 총

HP: 23(120) / MP : 67(188)…

상태 이상 : 악마와의 내기(저주)』

몇 번이나 확인해 봤지만, 상태 이상은 여전히 시뻘건 글자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진짜 캐삭해야 하는 건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