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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53)화 (53/251)

53화

자미엘은 희연을 살려 주고 헬르벨을 놓아주는 조건으로 그녀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내기의 조건은 간단했다. 지금보다 희연이 더 성장한 이후, 그녀가 악마 자미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내기의 내용이었다.

희연이 그 시험을 통과할 시 자미엘은 희연에게 자신의 권능 중 하나를 내려준다고 했다. 당연히 희연도 헬르벨도 더 이상 괴롭히지 않는다는 전제조건하에.

그리고 만약 희연이 그 내기에서 승리하지 못하게 될 시….

“귀속 아이템이 되고 싶진 않은데….”

희연은 자미엘에게 귀속된다. 문제는 이 귀속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길드에 소속되는 방식과 비슷한 건지, 그도 아니면 노예 문서라도 주고받는 것인지.

후자의 경우엔 신체의 의미가 아닌 영혼의 거래일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킹스메이커의 말에 따르면 그 성장의 기준은 50레벨 아니면 100레벨일 거라 했다. 그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잘하면 이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거나, 아니면 진짜 악마 자미엘의 시험을 통과할 정도로 성장하거나 할 수 있다지만….

희연은 그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걸 이기라고? 그 악마를?

희연에게 이미 자미엘은 만렙 이후를 위한 콘텐츠 보스였다. 조금 강해지고 조금 요령 좀 생긴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악마의 귀속템도 싫고 이길 방법도 없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캐릭터 삭제.

“그건 진짜 아닌데….”

희연은 자미엘에게 잡혔을 때만 해도 여차하면 캐삭하자, 하고 호기롭게 생각했으나 제대로 생각할 여유가 생기자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레벨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 렙4였기에 아까운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외에 쌓은 것들이 문제였다.

그녀가 책임져야 하는 에흐테와 악령이부터 시작해 티티를 비롯한 산골 꼬마 요정들과의 친분.

그리고 헬르벨.

NPC에게 있어 유저의 캐삭 소식은 진정한 죽음으로 인식된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몇 번을 죽어도 살아 돌아오는 이방인이라는 존재에 익숙해진 그들에게 그건 더 큰 충격과 상실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희연은 헬르벨에게 그런 상처는 주고 싶지 않았다.

한숨을 폭폭 내쉬며 고민에 빠진 희연을 보는 킹스메이커의 표정도 영 좋지 못했다.

킹스메이커는 악마와의 내기에 대해 일단은 내기라 했으니 희연과 자미엘이 직접적으로 싸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건 양심이 없는 짓이라고도 생각했다.

다만 그렇게 된 원인 중엔 자신의 방심도 있다 여기고 있었기에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악마가 가까이 접근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약간의 짜증을 담은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검은 낫으로 향했다. 그녀가 꼬박 일주일 동안 새겨 넣었던 마법 술식이 모조리 파훼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중간 수리가 아닌 처음부터 다시 새겨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이것을 파훼했다는 의미는 자미엘이 그녀와 싸울 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감히 자신을 봐주었다는 것이 킹스메이커의 자존심의 손톱만 한 상처를 입혔다.

“다음에 만나면 진짜 죽여 버린다….”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진 희연과 달리 킹스메이커는 아예 끝장내는 쪽으로 굳게 다짐했다.

그들이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헬르벨을 태운 에흐테가 산화하는 빛들을 헤집으며 그들에게로 돌아왔다.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에흐테의 주인인 희연이었다.

“헬르벨!”

자리에서 일어난 희연은 곧바로 그들에게로 뛰어갔다. 그러나 에흐테의 등 위에서 내리는 헬르벨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헬르… 벨?”

처음부터 쭉. 흐릿하게 보이고 제대로 인식되지 않던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제대로 보였다.

그 사실이 그의 하얀 옷을 새롭게 덮은 아직 굳지 않은 붉은 피보다도 놀랍게 느껴졌다. 희연은 확인하듯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헬르벨은 답하듯, 하지만 침묵하며 그녀를 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희연은 헬르벨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달 아래 백사장의 모래 같았다. 빛바랜 백금발이라는 표현이 알맞을 것이다. 언젠가 그에게서 보았던 빛깔과도 비슷했으나 조금은 달랐다.

달빛이 잘게 갈린 보석가루처럼 그의 머리카락에 들러붙어 반짝였다.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곧은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눈이 보였다.

그의 성격이 얼핏 엿보이는 눈은 살짝 처진 모양새임에도 서늘하게 느껴졌다.

“…….”

그의 모습 중 가장 시선을 끈 것은 아마도 그 눈이었을 것이다.  제비꽃을 연상시키는 청자색은 마냥 차가울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게 느껴지는 그런 색이었다.

희연은 그 색감 속에 엉킨 꿈이 끝나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헬르벨.”

“…그래.”

한참을 망설인 끝에 답이 돌아왔다. 손을 들어 피가 묻어나는 뺨을 문지르는 그의 얼굴은 지쳐 보였다. 그런 그의 손에 새겨진 검붉은 수식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자미엘과의 접전 이후 움직이지 않던 왼팔이었다. 킹스메이커가 걸어준 마법이 끝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그의 팔이 축 처졌다.

헬르벨은 그런 자신의 팔을 신경도 쓰지 않고 고개를 들어 사라지는 빛들을 보았다. 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귀에 담았다.

“…끝났군.”

마법의 시간이. 기나긴 속죄의 시간이. 꿈을 꾸듯 고양되었던 감정도.

희연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끝났다. 많은 것이. 이제 그는 어떻게 될 것이라 감히 상상도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의 몸을 적신 그 붉은 자국들을 못 본 척하는 것이 그녀의 최선이었다.

고요함은 킹스메이커의 말로서 끝을 맺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침묵하는 두 사람을 차례로 보며 잠시 생각하던 킹스메이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거 하나만 물을게요. 헬르벨. 신전으로 돌아갈 의향은 있어요?”

그가 원한다면 가능은 했다. 진흙탕 싸움 같은 여론전에 꽤 거금의 기부금이라는 부담이 있기는 했지만 한 나라의 공작인 킹스메이커는 헬르벨을 다시 신전의 신관으로 만들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헬르벨은 고개를 저었다. 킹스메이커는 그거면 충분히 답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낫을 들어 그것을 휘둘렀다. 기다란 뱀 같은 핏빛의 문자가 사라지는 것들의 흔적을 뒤쫓듯 헬르벨의 팔 위로 다시 새겨졌다.

“이제 곧 신전 측 인사들이 이쪽으로 몰려들 거예요. 자미엘과 헬르벨, 당신에 대한 결론을 어떻게 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죠.”

“…….”

“귀찮아지기 싫으면 지금 당장 우리는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따로 챙길 거 없을 테고, 아쉬운 것도 없을 거고. 그러면 곧바로 출발하면 되겠네요!”

떠난다는 말에 악령이는 슬금슬금 움직여 희연의 후드로 다시 기어들어 갔다. 희연은 그런 악령이를 손으로 받쳐주며 헬르벨에게 물었다.

“정말로 따로 챙겨와야 하는 물건은 없나요?”

“…없다.”

그녀는 그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에흐테는 희연과 헬르벨 두 사람을 태우고도 크게 힘들어하지 않았다. 날아오르는 유니콘의 뒤를 킹스메이커가 자신의 낫을 타고 뒤따랐다. 떠나는 그들을 배웅하듯 산화하는 빛들이 꼬리처럼 길게 늘어졌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다시는 되돌리지 못하는 시간을 뺏기고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많은 영향을 미칠 순간이 되어버린, 그런 숲을 내려다보는 헬르벨의 얼굴은 고요했다.

그런 그에게 킹스메이커는 나름의 위로를 하듯 소식 한 가지를 전해주었다.

“일단 좀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면 줄 게 있어요”

“…….”

“편지예요. 헬르벨 당신이 아주 오래오래 기다렸을 편지.”

그녀는 그것이 누구의 편지인지는 부러 말하지 않으면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달을 타고 밤을 건넜다. 해와 달을 양쪽에 끼고 자리 잡은 산맥 같은 성을 지나 밤이 없는 낮의 세계로. 여린 풀잎의 색 따위는 찾을 수 없는 울창한 숲이 태양 아래 술렁이는 그런 곳으로.

희연은 하늘을 나는 와중 우르르 몰려오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달의 세계로 향하는 이들이었다. 그들 중 다수가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빽빽한 나뭇잎과 그 틈새에 스며드는 강한 햇살에 고개를 드는 이들은 없었다. 숲속의 작은 오두막에서 희연의 일행이 그들을 기다리던 다른 이들을 만날 때까지 말이다.

희연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닉과 뉴비 없지의 모습에 반가움을 담은 미소를 지었다.

신전과 긴밀한 관계인 뉴비 없지의 등장에 헬르벨이 그를 잠시 경계하는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그 묘한 기류는 오래가지 않았다.

뉴비 없지가 헬르벨에게 건넨 편지 뭉치 탓이었다. 그것을 본 헬르벨은 망설였다. 조심히 받아들였고, 끝내 그 안에 들었을 것을 꺼내 보진 않았다.

그러나 봉투의 겉면을 손으로 쓸며 수신자를 찾아 헤맸다. 누구에게서 온 건지만은 확인하고 싶다는 듯이 말이다. 지친 낯에 이름을 정의할 수 없는 피로감이 얹혔다.

그런 헬르벨을 배려하여 희연과 일행은 그를 오두막 안으로 홀로 들여보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헬르벨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누가 뭐래도 휴식이었다.

밝은 곳으로 나오는 바람에 눈에 띄게 되어버린 붉은 자국을 지울 시간을 주어야 했다.

한숨 돌린 희연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예요?”

산뜻한 바람을 타고 조롱조롱 우는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이곳이 한없이 평온한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의문을 표하는 희연에게 답을 알려준 것은 닉이었다. 어디선가 깡충깡충 뛰어온 토끼가 그의 품을 차지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 둥지를 튼 새는 덤이다.

“이 근처에 있는 농장 주인에게서 빌린 빈집이에요. 원래 창고로 사용하는데 마침 비었다길래 빌렸어요.”

“아아….”

확실히 작은 오두막은 사람의 손때가 탄 흔적이 있었다. 빈집이라곤 해도 방치되었던 곳은 아닌 듯했다.

오두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연은 급작스럽게 목이 졸리는 느낌에 켁 소리를 내며 목을 더듬었다. 후드 안에서 몸을 바둥거린 악령이 탓이었다.

한참을 꼼질 거린 뒤에야 악령이는 살그머니 후드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햇빛을 피하듯 희연의 머리카락을 차양 삼아서 말이다.

[이름 없는 악령 : 나 힘드러….]

불만을 토로하듯 희연의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기는 손에 힘이 없었다. 아무래도 달빛의 요람을 완전히 벗어난 것도 모자라 태양 아래 있는 바람에 더 힘이 없는 것 같았다.

달빛의 요람을 벗어난 뒤에도 형체를 유지할 힘이 악령이에게는 있었으나 한차례 큰 힘을 쓰고 난 뒤라 그런지 영 맥을 못 추렸다.

희연은 손을 들어 악령이에게 해가 닿지 않도록 해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다시 후드 안에 들어갈래?”

[이름 없는 악령 : 싫어… 답답해….]

검은 눈 아래 눈물방울 같은 것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안타깝게도 우는 얼굴을 하는 미니미 악령이에게 희연이 따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햇빛이 문제면 망토 아래로 넣어볼까요?”

뉴비 없지가 제 망토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래도 후드 안에 있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싶어 희연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뉴비 없지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악령이가 발작하듯 바둥거리는 바람에 그들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름 없는 유령 : 싫어! 싫어어어어! 쟤 싫어어어어아아악!]

“아니 왜…?”

뉴비 없지가 조금 상처받은 얼굴로 악령이를 보았다. 희연 또한 당황스러운 얼굴로 흐물거리는 악령이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실컷 바둥거리다 힘이 빠진 악령이는 훌쩍거리며 희연의 손을 꼭 잡았다. 그 모습을 보던 킹스메이커가 한 가지 가설을 내밀었다.

“성속성이라 싫은 거 아닐까요? 악령은 고스트 타입 플러스 악속성이니까.”

희연은 곧바로 그 말에 반론을 제기했다.

“…저도 성속성 아니에요?”

“오리 님은… 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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