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킹스메이커는 말을 다 잇지 못했지만, 그 뒷말은 희연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경계하고 싫어하기엔 희연은 악령이의 상대가 아니라 그렇다는 뜻일 것이다.
희연은 아직까지도 생생한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했다. 숲속에서 보았던 악령이의 본 모습. 그 악마에게 디버프까지 먹였던 그 모습을.
그녀의 손 위를 굴러다니며 힝힝거리는 이 악령이는 자미엘의 불을 꺼트리기까지 했었다.
악령이가 힘을 숨김….
지금의 모습에 속지 말자 희연은 다짐했다. 닉의 품에 안겨 있던 토끼가 얼굴을 들이미니 화들짝 놀라 희연의 옷소매를 꼭 쥐는 모습에선 그때의 위엄이 느껴지지 않지만 말이다.
악령이가 토끼를 피해 희연의 팔에 매달리고 그런 악령이의 모습에 닉이 토끼를 내려놓았을 때 킹스메이커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러면 인형에 깃들게 할까요?”
“인형이요?”
“네네, 인형! 달빛의 요람을 벗어났는데도 몸을 유지할 정도면 다른 물건에 깃드는 것까지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제안은 영 맥을 못 추리는 악령이가 몸을 회복할 때까지 물건에 깃들게 하자는 거였다. 현재 악령이는 몸의 형체를 유지하기 위해 실시간으로 힘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햇빛 아래 있으려니 몸을 더더욱 회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이너스되는 요소는 많은데 플러스 되는 요소가 조금도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만일 킹스메이커의 말대로 하게 되면 악령이는 햇빛 공격에서 벗어나고 제 몸을 유지하는 힘 또한 아끼게 되니 회복을 하는 것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악령이 또한 킹스메이커의 제안이 솔깃했는지 눈물방울 사라진 얼굴로 눈을 또랑또랑 뜨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형은 어떻게 구해요?”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저한테 있거든요.”
그리 말하며 킹스메이커가 인벤토리에서 인형을 꺼내는 순간 희연은 왜 그녀가 이 좋은 제안을 빨리 안 하고 망설였는지 알 수 있었다.
반사적으로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한 희연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기분이 되었다.
[<안녕 내 이름은 메리> : 지금 네 눈앞에 있어.]
“…….”
“유령이 깃들 수 있는 인형은 이런 것뿐이라…. 괜찮아요?”
괜찮냐 묻는 킹스메이커의 물음에 희연은 곧바로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다.
메리…. 메리 인형….
희연은 사탄의 인형 말고 토이 스토리를 믿고 싶은 사람이었다. 내 집 안에 있는 것들에게 자아가 있다고 할 때 이왕이면 동심인 쪽이 좋기 때문이었다.
킹스메이커의 손에 들린 그것은 도자기 인형 특유의 창백하고 섬세함이 표현된 외제 인형이었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수화기를 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 것 같았다.
“방금 눈이 저절로 깜박인 것 같은데… 제가 잘못 본 건가요?”
“아마 제대로 본 걸 거예요.”
“…….”
이게…이게 과연 최선인 걸까? 메리 씨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걸까? 하다못해 깜찍한 곰돌이 같은 인형은 안 되는 걸까?
희연이 깊은 고심에 빠진 사이 악령이는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어 인형을 살펴보고 있었다. 하얀 몸에 존재하는 것은 검은 눈 두 개와 입뿐이었지만 인형을 썩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게 느껴졌다.
유령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생전 취향이 그랬던 걸까. 고민하다 한숨을 내쉰 희연은 조심조심 인형을 받았다.
괴담의 주인공다운 포스가 느껴지는 인형은 한쪽만 떠진 눈으로 악령이를 보았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며 턱이 빠지는 것처럼 입이 벌어졌다.
반사적으로 어깨를 파드득 떠는 희연과 달리 악령이는 꼬물거리며 그 입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희연은 울고 싶은 마음으로 악령이가 쉽게 입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인형을 꼭 쥐었다.
“이거 그래도 귀신 들린 인형은 아니었던 거죠?”
“아니었는데 이젠 맞죠?”
그… 렇네?
희연이 그 사실을 깨닫는 사이 악령이와 메리 씨는 거의 합체를 완료하는 중이었다. 악령이의 몸이 입속으로 사라질수록 메리 인형은 생기를 얻는 것처럼 팔을 파닥파닥 휘저었다.
희연은 팔을 쭉 내밀어 최대한 인형을 자신으로부터 떨어트렸다. 심적 거리 두기가 필요한 비주얼이었다. 마침내 악령이가 완전히 메리 인형 안으로 사라진 순간 인형의 두 눈이 뜨이며 그 안에서 빛이 터졌다.
뭐지? 진화인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희연은 눈앞에 완성된 귀신들린 인형을 보며 살짝 입을 벌렸다.
“와…?”
지나치게 섬세해 무서운 구석이 있던 외제 인형의 얼굴이 변화했다. 어떻게 보면 귀엽고 또 어떻게 보면 조금은 맹해 보이는… 미니미 악령이의 얼굴로.
“악령이?”
희연은 조심스럽게 인형을 불렀다. 새까맣고 동글동글한 눈을 두어 번 깜박인 인형이 삐죽이는 입을 열었다.
“안녕 내 이름은 메리. 지금 네 눈앞에 있어.”
“…악령이 맞지?”
“안녕 내 이름은 메리. 하지만 악령이가 맞아.”
인형 빙의… 성공한 거 맞겠지?
해진 옷을 입은 메리 인형 버전 악령이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일단 희연은 침착하게 메리 인형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악령이는 인형이 된 자신의 몸으로 툑툑 걸었다.
아직 도망가지 않고 닉의 옆에서 알짱거리던 토끼가 걷기 연습을 하는 악령이에게 가까이 가더니 코로 툭툭 쳤다. 메리 인형 버전 악령이는 그런 토끼의 행동으로 인해 뒤로 꽈당 넘어졌다.
결국 닉이 다시 토끼를 안아 드는 것으로 악령이는 토끼로부터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인형에 들어갔는데도 약하네….”
희연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하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악령이가 팔을 파닥이며 말했다.
“안녕 내 이름은 메리. 나는 지금 배가 고파.”
“아. 배고파서 약한 건가?”
가설을 세운 희연은 악령이에게 줄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인형은 뭘 먹지? 일단 인형 되기 전 악령이는….
“…….”
나를 먹으려고….
희연은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악령이가 먼저 자신의 식성을 알려 주었다.
“안녕 내 이름은 메리. 나는 잡식이야.”
악령이의 말에 희연은 일단 주변에 널리고 널린 풀 한 잎을 뜯어 인형의 입에 내밀었다. 까만 눈을 깜박이던 인형은 손을 들어 희연의 손을 탁 때리며 말했다.
“안녕 내 이름은 메리. 너 지금 장난하니?”
희연은 제법 얼얼한 손을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 메리 아니라 악령이잖아.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해?”
희연의 물음에 인형은 팔짱을 꼭 끼며 말했다.
“안녕 내 이름은 메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내 설정값이야.”
“…그냥 편하게 말해.”
“그래. 나 배고파!”
곧바로 말투를 바꾼 악령이는 밥 달라고 조르는 참새처럼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을 보며 희연은 안도했다.
악령이 맞네!
풀이 싫다 했으니 반대되는 육식류를 줘볼까 했지만, 인형이 하는 고기 먹방은 보기에 많이 무서울 것 같아 조금 망설여졌다. 그런 희연의 고민에 도움을 준 것은 닉이었다.
초식부터 육식, 잡식 등 온갖 식성을 가진 동물들을 데리고 다니는 테이머답게 그의 인벤토리에는 온갖 식자재부터 완제품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원래는 에흐테에게 주라고 챙겨뒀던 거긴 한데….”
그리 말하며 닉이 희연에게 넘긴 주머니 안에는 반짝반짝한 하얀 각설탕이 들어 있었다.
희연은 그중 하나를 꺼내 악령이에게 넘겼다. 두 손에 각설탕을 꼭 쥐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제법 귀여웠다.
그런데 인형한테 소화기관이 있나?
잠시 현실적인 문제가 생각나기는 했지만, 희연은 애써 고개를 저음으로써 그 생각을 묻었다. 이미 유령이 인형에 빙의까지 한 마당에 인형의 소화기관을 걱정하는 것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악령이는 각설탕을 얌 입에 물더니 행동을 멈췄다. 그 모습에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이어 그것이 입안에 한껏 넣은 설탕이 녹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희연은 먼지투성이에 해지기까지 한 인형 옷 쪽으로 시야를 내리며 킹스메이커에게 물었다.
“그런데 옷은 왜 저렇게 낡은 거로 입혀 놓은 거예요?”
“아… 그것도 설정값이라.”
“…제가 딴 옷 입혀줘도 되는 거죠?”
희연의 물음에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령이가 깃든 메리 인형의 얼굴은 제법 귀여우니 옷만 갈아입혀도 귀신 들린 인형 소리는 듣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인형 옷도 없고 재료도 없으니 뭘 어떻게 하지는 못하지만,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기필코 저 옷을 바꿔주겠다고 희연은 마음먹었다.
“그래도 그때까지 기다리긴 좀 그런데….”
그녀는 아쉬운 대로 작은 들꽃 한 송이를 꺾어 악령이의 머리에 달아주었다.
그런 희연의 행동에 눈을 데굴 굴린 악령이는 입에 물고 있던 각설탕을 빼고 입을 뻐끔거렸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듯했다.
끝내 말을 내뱉지 않고 다시 각설탕을 입에 물었지만, 희연은 악령이의 감정이 볼에 떠오른 장밋빛의 홍조와 같은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희연은 이왕 각설탕을 받은 거 에흐테에게도 주기로 했다. 입에 달짝지근한 설탕을 넣어주면 그녀의 유니콘은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에흐테, 아-.”
에흐테는 유순한 태도로 각설탕을 받아먹었다. 유니콘도 메리 씨도, 둘에게 각설탕을 준 희연에게도 즐겁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다만 그들의 모습에 홀로 평화롭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아, 맞다. 알리콘….”
킹스메이커는 생각난 것을 입에 담으며 슬그머니 황금빛 뿔로 눈을 굴렸다.
카나리아 숲에서 본 몬스터에 대해서 말해줘야 하는데….
그녀는 눈을 굴려 에흐테와 희연, 그리고 오두막을 번갈아 보았다. 일단 헬르벨에 관한 퀘스트도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니 나중에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희연이 동시에 두 일을 해결하지는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침 에흐테의 뿔을 보며 생각난 방법이 적어도 문제 중 하나는 해결해 줄 수는 있었기에 킹스메이커는 지체 없이 희연을 붙잡아 입을 열었다.
“오리 님, 오리 님! 헬르벨의 팔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라는 건 알죠?”
“아….”
킹스메이커의 말에 희연의 얼굴은 침울해졌다. 현재 헬르벨이 겉모습이라도 멀쩡함을 흉내 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킹스메이커의 마법 덕이라는 것을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 마법은 풀렸다. 지금 당장은 킹스메이커가 시간마다 새로 마법을 걸어준다 치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쪽을 해결하고 나니 다른 쪽의 문제가 다시 떠오른다 생각하며 희연은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그런 희연에게 킹스메이커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헬르벨의 상처는 일종에 정화와 해독이 필요한 경우라고 보면 되는데, 원래라면 아무 힐러나 데려와서 치료시키면 되지만 이 경우엔….”
“?”
“상대가 잔챙이 악마가 아니라 이명까지 달고 다니는 악마라서 교국의 성녀라도 데리고 오지 않는 이상 힐러의 스킬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희연은 반사적으로 뉴비 없지를 보았다. 쪼그려 앉아 슬금슬금 악령이에게 다가가던 그는 희연의 시선에 뻘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일단은 신관이 아닌 성기사라 남 치료하는 쪽은 영….”
성기사의 라쿠카라챠 같은 징그러운 끈질김과 회복력은 본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지 남과 나누는 방향이 아니었다.
결국 이들 중 악마가 남긴 상처를 치료한 힐러는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킹스메이커는 방법이 없었다면 애당초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희연의 예상대로 킹스메이커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지금 당장 우리가 구할 수 있으며, 유난히 정화와 해독 능력이 탁월한 재료가 하나 있어요. 알리콘이라고….”
“알리콘? 그게 뭐예요? 어디서 구해요?”
당장이라도 그녀가 말하는 알리콘을 찾으러 갈 것 같은 희연의 모습에 킹스메이커는 입을 다물었다. 초록색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은 답지 않게 눈치를 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킹 님?”
희연의 재촉 어린 부름에 결국 그녀는 입을 뗐다.
“오리 님.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알리콘은 말이죠. 어… 무지 귀한 재료로….”
“?”
“…유니콘의 뿔이라고도 하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