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그렇게 희연은 열띤 응원을 받으며 슬라임을 잡고 새로운 슬라임을 유인하기 위해 열심히 숲을 드나들었다. 슬라임은 숲속의 작은 바위처럼 얌전히 있다가도 희연이 다가가기만 하면 생기를 머금고 달려들었기에 유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침내 슬라임 10마리를 잡아 퀘스트 특성으로 폴리곤이 되지 않은 슬라임을 헬르벨의 앞에 내놨을 때, 그는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잡았다고?”
“어….”
희연이 망설이는 사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킹스메이커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이죠 헬르벨. 나의 이 진실된 눈을 보세요.”
“…….”
그는 그 말을 무시하곤 다시 슬라임의 사체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왜 총탄의 흔적은 안 보이고 구타의 흔적만 보이는 거지?”
이번 질문에 대해선 킹스메이커도 입을 다물었기에 희연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당당하게 말했다.
“제게 있어 총은 마치 제 손과도 같기 때문이죠!”
“…?”
슬프게도 헬르벨은 해괴한 무언가, 혹은 입을 잘 놀리는 사기꾼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희연을 보았다. 다행인 점은 잔꾀를 부린 것에 대해서는 별말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부터는 제대로 해라.”
“네엡.”
퀘스트는 아슬아슬하게 성공했다. 헬르벨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은 희연은 슬라임이 남기고 간 맛있는 젤리를 챙겨 그에게 내밀었다.
“생각보다 맛있어요.”
그는 별말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지만 먹지는 않았다. 헬르벨의 젤리는 에흐테의 등 위에서 햇빛에 달궈지던 악령이의 차지가 되었다. 악령이에게는 묘하게 유한 태도를 보이는 그였다.
어찌 보면 선물한 것을 거부당한 거였지만 희연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헬르벨만 보면 싫다며 난리를 치던 악령이가 이제는 그가 내미는 젤리도 받아먹는다는 점에 안도했기 때문이다.
제법 평화로운 광경에 잠시 훈훈함을 느꼈지만, 자신의 사격 솜씨를 생각하자 희연은 금세 축 처지고 말았다.
“있잖아요 헬르벨. 어떻게 해야 조준이 빨라질까요?”
슬라임도 제대로 못 맞추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총으로 후려치는 게 아니라 사격을 하기 위한 연습이었는데 결국 또다시 근접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처음인 헬르벨은 이런 상황에서 뭐라 말해야 하는지 고민되는 듯 대답을 망설였다. 그런 헬르벨을 대신해 킹스메이커는 위로하듯 다정한 어조로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오리 님 조준이 유난히 안 맞았던 건 민첩 스텟이 낮아서예요. 머리로 예상한 것과 실제로 총을 들었을 때 오차가 심했죠? 민첩을 올리면 그런 점이 개선될 거예요.”
“그러면 저번에 얻은 스텟은 전부 민첩 쪽으로 하는 게 좋겠네요?”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 돼요. 힘이 민첩에 비해 많이 낮으면 그때는 또 몸이 마음대로 안 따라줄 거고 신관이니 마력도 높아야 하죠. 뭐, 레벨로 올리는 스텟은 한계가 있으니 결국은 장비를 잘 맞춰야 하는 거지만요.”
그녀의 말에 희연은 손목에 걸린 팔찌를 보았다. 만약 닉이 준 팔찌마저 하지 않았다면 슬라임과의 싸움은 총을 들다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속도보다 조준이 더 어려운 게 문제에요.”
희연은 헬르벨에게 대강 배운 대로, 반쯤은 감으로 사격을 해왔다. 이는 상대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아예 맞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아쉬운 결과가 나올 때마다 조금은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희연이 총을 다룰 줄도 모르면서 여우의 선택에 망설이지 않은 데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의 시스템은 에흐테를 귀속시키자마자 승마 스킬을 내려주었다. 덕분에 희연은 별다른 노력이나 생각 없이도 곧바로 에흐테를 타고 다릴 수 있었다. 그랬기에 총을 고를 때도 당연히 사격과 관련된 스킬을 줄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러나 시스템은 그녀를 배신했고 결과물은 근접 무기가 된 총이었다.
“애초에 승마 스킬은 바로 줬으면서 왜 사격 스킬은 안 준 걸까요?”
“…아.”
희연의 말에 킹스메이커는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는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각 직업별로 무기가 다양한 만큼 어떤 무기를 택하든 그에 대한 기본적인 사용법이 담긴 스킬을 줘요. 하지만 총을 갖고 있던 건 성기사이지 신관이 아니었죠.”
“…어? 그러면 설마.”
“그 얘기는 신관 측에선 줄 수 있는 총기 스킬이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는 뜻이죠!”
결국 희연이 반쯤 어거지로 총을 얻어냈기에 낭만과 악의 퀘스트를 받아낸 것이고, 그 대가로 총기 사용에 대한 패시브 스킬 하나 못 얻어 낸 거라는 뜻이었다.
“잠깐만 그럼….”
신관이 내어주는 무기 중 총이 없었다는 뜻은 그들 중 총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도 없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앞에는 총을 쓸 줄 아는 신관이 서 있었다. 낭만과 악의의 두 번째 조건이 헬르벨의 제자 되기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퀘스트를 얻는 대신 기본 스킬이 없다. 그러나 그 퀘스트를 통해 만나게 되는 헬르벨의 제자가 된다면 스킬을 얻을 수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을 떠올린 희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페널티를 이해했다.
그러나 의문은 남았다.
“…천천히 하라고 했었는데?”
희연은 낭만과 악의 퀘스트를 주었던 신관. 그는 분명 희연에게 급할 것 없다는 듯이 굴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천천히 느긋한 마음으로 임했다면 희연은 기본 스킬도 없이 이 험난한 게임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했을 것이고 헬르벨은 자미엘의 손에 죽었거나, 그전에 신전에서 없애려 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 신관은 어떻게 헬르벨의 일을 알고 희연에게 퀘스트를 내렸던 걸까. 고민해봤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그들에게 확실한 사실은 하나였다.
헬르벨은 희연에게 기본기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것. 단 한 번도 의도한 적 없었으나 희연은 언제나 헬르벨을 시험에 들게 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기초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뜻인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헬르벨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멀쩡한 총으로 사격 안 하고 슬라임을 구타했다는 사실보다도 더욱 막막한 이야기인듯했다.
고민에 빠진 헬르벨의 어깨를 킹스메이커가 도닥여 주었다.
“어떻게 가르칠지는 밥부터 먹으면서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할까요?”
“지금 이 상황에 무슨, 언제 악마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
“안 나와요, 안 나와. 사람이 좀 느긋하게 밥도 먹고 해야죠!”
희연은 생글생글 웃는 킹스메이커와 굳은 얼굴을 풀 줄 모르는 헬르벨을 보며 두 사람은 참 안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사이 배불리 젤리를 먹고 눈을 감은 악령이를 닉이 챙겨 희연의 품에 안겨주었다.
묘하게 볼록해진 것 같은 배를 콕 찌르며 희연은 말했다.
“행복해 보이네?”
“젤리 맛있어.”
“그래그래.”
희연은 대충 대답해주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숲속의 생활은 나름 평화로웠다.
그들이 슬라임을 앞에 두고 씨름하는 사이 헬르벨 홀로 음식을 준비해 두었는지 오두막에는 제법 잘 차려진 음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뭘 먹을 때가 아니라고 했으면서 이렇게 준비해놨네.”
헬르벨은 킹스메이커의 말을 무시했다. 희연은 그러려니 하며 낯설지 않은 음식을 즐겼다.
“그런데 여기에 음식 재료도 있었어요? 못 봤던 것 같은데.”
그녀가 이 낡은 오두막에서 발견한 거라곤 먼지 덮인 가재도구와 녹슨 농기구,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나무상자 정도였다. 그릇 정도는 부엌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보기는 했지만 현재 그녀가 들고 있는 이런 멀쩡한 그릇은 아니었다.
의아해하는 그녀의 의문을 풀어 준 것은 신전과 연관 깊은 직업을 가진 뉴비 없지였다.
“이게 바로 신성의 힘입니다, 오리 님!”
“신성 스텟 말하는 거예요?”
“네! 신성력이 높으면 깨진 그릇 같은 것도 되돌릴 수 있고, 씨앗만 가지고 있어도 금세 다 자란 작물을 수확할 수 있거든요!”
“그거 저도 할 수 있어요?”
“물론이죠! 아주 높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요. 유저 중에는 아직 그 정도로 신성이 높은 사람은 없고, 신성은 아니지만 마법사들도 비슷하게는 가능해요! 맞지?”
뉴비 없지의 물음에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연이 그 대화에서 깨달은 점은 달빛의 요람에서 어떻게 헬르벨이 식자재를 공급했는가, 였다. 또한 그 한계성이었다.
“…헬르벨은 갖고 있는 씨앗 외에는 먹을 수 있는 음식 종류가 없었다는 거네요.”
“어….”
희연과 뉴비 없지는 동시에 헬르벨을 보며 안쓰럽다는 눈빛을 했다.
“헬르벨! 제가 맛있는 거 만들어 드릴게요. 이참에 맛의 하모니가 뭔지 보여줄게요!”
“굳이 그럴 필요는….”
힘차게 외치고 부엌을 향해 뛰어가는 희연의 뒤를 뉴비 없지가 따랐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킹스메이커가 옆에 있던 닉에게 물었다.
“그런데, 부엌에 음식 재료라고 할 만한 게 있어요?”
“없을 텐데….”
“그렇죠? 그리고 내 기억으론 오리 님이나 없지나 화덕 같은 건 쓸 줄도 모를 텐데. 둘 다 요리 스킬도 없고.”
과연 그녀의 말대로 얼마 안 있어 희연과 뉴비 없지는 다시 돌아왔다.
“킹 님! 혹시 저거 어떻게 쓰는 건지 아세요?”
“야야야야야! 킹! 킹! 물 좀 만들어 주라! 여기 우물이 말랐어!”
예상했던 대로라 킹스메이커와 닉은 놀라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서 나간 둘을 쫓아간 그들은 생각보다 엉망인 부엌의 모습에 차마 웃지는 못했다.
“부엌이 이따위면서 돈을 그렇게….”
잠시 오두막 대여료에 대해서 생각하던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떨쳐냈다. 어차피 그녀에게 넘쳐흐르는 것이 바로 돈. 오두막 주인이 괘씸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는 나중에 그의 집을 이곳과 똑같이 만들어주면 될 일이었다.
어느새 닉에게서 이것저것 재료를 받는 희연을 본 킹스메이커는 대충 벽에 룬어를 그려 넣는 것으로 스킬을 발동해 부엌을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바꿔놓았다.
“필요한 게 뭐야?”
“일단 불이랑, 물이랑….”
“다시 물을게. 준비된 게 뭐야?”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겠다는 숭고한 나의 마음?”
헛소리하는 뉴비 없지를 대충 밀어 두고 희연에게로 간 킹스메이커는 닉이 꺼내 준 재료를 보며 고민 중인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뭘 만들지 생각해둔 게 있어요, 오리 님?”
“음…. 사실 만들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서요. 그냥 알바하면서 배운 거나 만들려고요. 일단 냄비가…, 냄비, 냄비?”
마침내 발견한 냄비가 마녀의 솥단지 같은 모양새였기에 희연은 잠시 고민했다. 이런 거로 사람 먹을 요리를 만들어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마땅한 게 없었으므로 결국 냄비는 그것으로 채택되었다.
“물 좀 넣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이것 말고는 또 뭐가 필요해요?”
“얼음이요!”
빈 통을 가져와 그 안에 물을 넣고 그대로 얼린 킹스메이커는 손으로 그것을 내리쳐 얼음 조각을 가득 만들어주었다.
“…킹 님도 힘 스텟이 좋네요.”
“마법사는 역시 근력이죠.”
“…?”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음식을 먹은 헬르벨의 감상은 짧고 간결했다.
“달고 짜….”
“그게 바로 맛있다는 거예요, 헬르벨.”
구운 빵 위에 꿀을 바르고 얇게 자른 사과를 올린 뒤 마요네즈를 섞어 으깬 삶은 달걀을 얹은 희연의 음식은 말 그대로 달고 짠맛이 어우러진 맛있는 샌드위치였다.
당분간 볼일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카페 음료까지 그의 앞에 대령했던 희연은 담담한 그의 반응에 조금 실망했다.
“이걸 먹고 헬르벨이 새로운 맛에 눈을 뜨기를 바랐는데.”
“새로운 맛이요?”
닉의 반문에 그녀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설명했다.
“헬르벨은 매번 저예산 최대 효율 같은 느낌의 음식만 만들고 먹으니까요. 조금은 사치스럽게? 아무튼 좀 더 다양하게 먹기를 바랐거든요. 신관이라서 그런 거면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희연의 말에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관은 고수익 직종이에요 오리 님. 귀족만큼이나 사치스러운 일상을 즐기며, 특히 황금을 사랑하죠.”
“…?”
“신전이 기부금으로만 받아먹는 걸 생각해 봐요. 그만큼 돈으로는 절대 인색하게 안 굴어요.”
“하지만 저번에 유저들하고는….”
“자기들끼리만 인색하게 안 군다는 이야기였어요.”
“아.”
그녀가 신전에 대해서 새로운 것을 깨닫는 사이 음식을 다 먹은 헬르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