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그녀가 눈을 굴리며 생각하는 사이 헬르벨은 준비를 마쳤다. 그는 앞서서 오두막을 나섰다. 희연은 뉴비 없지의 머리가 멀쩡한 것을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그 뒤를 따랐다.
“어디 가?”
“글쎄…, 일단 집 잘 보고 있어!”
나오는 길에 만난 악령이는 여전히 에흐테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에흐테는 함께 가는 줄 알고 희연에게 가까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에흐테, 악령이랑 집 잘 보고 있어야 해? 아무거나 막 주워 먹으면 안 돼.”
그녀가 인사를 나누는 그 잠깐 사이 헬르벨은 이미 제법 멀어진 뒤였다. 희연은 서둘러 그를 쫓아 뛰었다. 갑자기 왜 이리 의욕적으로 변했나 싶었지만 그녀는 좋은 게 좋은 거다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
“…….”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헬르벨은 희연이 기초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배려해 주었고 희연은 본인이 부족한 것을 알기에 그의 말을 잘 따랐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희연이 기초가 없다는 점이 생각보다 큰 페널티임을 두 사람이 직접 겪은 뒤에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녀가 사용할 줄 아는 총구는 딱 하나였다. 헬르벨이 무기도 아니라고 평가한 권총. 압수당한 권총 대신 헬르벨이 건네준 리볼버를 받아 든 희연은 그것을 써보지도 못하고 다시 빼앗겼다.
“지금 뭘 하는 거지?”
“…?”
눈을 동그랗게 뜨기만 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다시 총을 희연에 손에 쥐여 준 뒤 손수 손의 위치를 지정하며 경고를 덧붙였다.
“실린더 앞으로 손을 가까이하면 안 돼.”
“왜요?”
“절단된다.”
“…….”
일단 그때부터 희연은 지금이라도 무기를 바꿔야 하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물론 게임이니 진짜로 손을 잘리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믿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이걸로 바꿔 들어 봐라.”
“음….”
다음으로 헬르벨이 쥐여 준 것은 그가 애용하는 머스킷이었다. 기다란 총을 어설프게 드는 희연의 자세를 봐주던 그는 시간이 지나도 뻣뻣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말을 잃었다. 희연은 그 점에 대해 항변했다.
“제가 원래 진짜 운동 잘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선 제 몸이 제 머리를 못 따라오고 있어요.”
“그래….”
“그런데 이거 조준할 때 어딜 봐야 하는 거예요?”
결국 돌고 돌아 권총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현대식 권총에 대해 편리한 구식이라고 평했다. 희연은 굳이 따지자면 그의 총이 더 구식이지 않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총의 정보를 확인한 순간 희연은 자신의 권총이 구식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세계에서 구식이란 저렙용을 말하는 거였다.
낫 들고 뛰어다니는 마법사도 있다는 점에서 현실의 기준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뭐가 됐든 고렙용 아이템이 최고였던 것이다.
“그래도 권총으로 할 때는 조준 잘 하지 않아요?”
“그걸로 할 때만 좋은 게 문제라면 문제지.”
“…….”
솔직함이 담백함과 함께하니 더욱 상처가 되었다. 어찌 됐든 헬르벨의 수업은 착실하게 진행되었고,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수업을 통해 희연은 떨어지는 나뭇잎은 못 맞춰도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뭇잎 정도는 맞출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전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희연은 기뻐했지만 헬르벨을 탐탁지 않아 했다.
“이런 식으로는….”
“…….”
내기의 당사자인 희연보다 그가 더 초조해 보일 정도로. 그의 의욕이 악마와의 내기를 시작한 희생자를 위한 죄책감이라면 희연으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그에 대해 희연은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런 두 사람의 틈을 끼어드는 목소리가 먼저였다.
“겨우 찾았네. 여기 있었어요?”
“아, 킹 님.”
기껏 챙겨 준 책을 다 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왔다는 것이 생각난 희연은 어색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킹스메이커는 그 점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 듯 총탄의 흔적이 가득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와, 연습 많이 했나 보네요! 보자 보자, 저건 리볼버고 이건 권총, 저건 머스킷인가? 권총을 제일 많이 사용했나 보네요.”
희연은 흔적만으로 무슨 총을 사용했는지 알아보는 킹스메이커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확인을 마친 킹스메이커는 무언가 가늠하는 듯하더니 금세 입을 열었다.
“이정도 했으면 곧 관련 스킬이 생길 수도 있는데…. 오리 님 저 한번 맞춰보세요.”
“네?”
희연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생각해 다시 물었지만 킹스메이커는 언제나 그랬듯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빨리요 빨리! 절대 안 죽어요!”
“그거야 그렇겠지만….”
헬르벨이 말리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희연은 상대를 잘못 찾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총의 기능이 나쁜 것을 확인시켜 주겠다고 뉴비 없지의 머리에 총을 쏜 것이 그였다.
기분상의 문제로 망설이던 희연은 결국 킹스메이커의 재촉과 헬르벨의 묵인하에 권총을 들어 올렸다.
탕-!
총은 아슬아슬하게 팔에 맞았다.
[매우 강력한 적을 명중시켰습니다. 총기 수련 경험치가 크게 증가합니다.]
[기초 총기 숙련자(패시브)를 습득합니다.]
[기초 총기 숙련자(패시브) : 총기를 다루는 기본 방법과 총구의 반동으로부터 저항하는 법을 몸에 익힌다. 명중률이 20% 상승한다.]
[탄환 수집가(패시브)를 습득합니다.
조건 : 기초 총기 숙련자(패시브) 습득.]
[탄환 수집가(패시브) : 탄환이 일으키는 마법은 다양하다.
현재 수집한 탄환 – 일반 탄환 / 마법 탄환(new!)
(탄환 변경 시 MP 50이 소모됩니다. 마법 탄환 사용 시 MP가 5씩 소모됩니다.)]
“어!”
“스킬 생겼죠?”
“네! 두 개나 생겼어요! 기초 총기 숙련자랑 탄환 수집가요!”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끄덕이며 희연을 축하해주었다. 희연은 덕분이라 너스레를 떨다 가장 큰 공로자인 헬르벨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헬르벨 저 이제-, 어? 어디 갔지?”
뒤늦게 헬르벨의 빈자리를 확인한 희연은 말없이 사라진 그의 존재에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그녀와 달리 킹스메이커는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게요. 갑자기 어디로 간 걸까요?”
“…혹시 킹 님 피해서 도망간 건가요?”
“…아닐걸요?”
맞구나!
헬르벨이 유난히 킹스메이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피하는 점에 있어 이미 알고 있었다. 짐작 가는 구석 또한 있었다. 킹스메이커가 그를 치료하러 들어갔을 때, 하필이면 그때 희연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알림이 떠올랐다. 헬르벨이 악마와의 내기에 관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을 누가 말했을지 예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새 희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헬르벨의 제자가 된 거요. 협박은 아니었죠?”
“…협박은 아니었죠!”
다소 신뢰도가 떨어지는 말이었지만 지금으로선 믿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한숨을 내쉬는 희연의 모습에 킹스메이커는 조금 미안해져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오리 님의 성장을 위해 언제든 제가 과녁이 될게요. 레벨이 높아서 맞추면 스킬 경험치 쭉쭉 오를 거예요!”
“그러지 마세요….”
“빨리 강해져서 새로운 곳도 돌아다니고 싶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만.”
희연에게는 성장 외에도 중요한 것이 남아 있었다.
“헬르벨의 퀘스트가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혹시 세 번째 조건은 아직도 물음표 상태에요?”
그녀의 물음에 희연은 눈을 굴려 퀘스트 창을 훑어보았다. 선행조건을 완료해야만 확인 가능하다던 세 번째 퀘스트 조건은 아직도 물음표로 도배된 상태였다.
“제가 선행 퀘스트를 제대로 안 한 걸까요?”
“그건 아닐 거예요. 보통 앞에 있는 조건들을 달성하면 자동으로 뜨거든요. 안 떴으면 이유는 하나죠.”
이야기가 길어질 것인지 킹스메이커는 제 옆자리를 톡톡 쳤다.
“보통 퀘스트 조건은 그 퀘스트를 제시하는 NPC의 바람이에요. 예를 들어 톨러 퀘. 꼬마 요정들을 만나게 해 달라는 톨러의 바람이죠. 비옌 퀘도 동생을 찾고 싶은 비옌의 마음이에요.”
“그러면 헬르벨의 조건은….”
“첫 번째, 헬르벨에게 인정받기. 인정이라는 건 상당히 넓은 범위인데,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인정은 관계의 인정일 거예요. 자신이 그어둔 선을 넘어도 되는 상대를 뜻하는 거죠.”
“…….”
“두 번째 조건은 제자가 되는 거였죠. 이 두 가지를 조합해서 생각해보면 헬르벨의 바람은 그 숲속에 홀로 남은 자신을 찾아오고 어떻게든 관계를 구축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원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면 헬르벨은 누가 자신을 찾아주기만을 바랐지 그 이상을 바라본 적이 없다는 뜻인 거예요?”
희연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그런 경우는 앞에 조건을 어떤 식으로 완료했냐, 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예요. 극단적으로 설명하자면 만약 제가 헬르벨의 제자 자리를 협박으로 얻어냈다, 이럴 경우 헬르벨의 세 번째 조건은 저에게서 자유 되찾기 뭐 이런 거일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희연은 멍하니 앉아 창밖만 바라보던 헬르벨을 떠올렸다.
“아마 오리 님이 깨야 할 세 번째 조건은 헬르벨이 바람을 갖게 하는 것까지일 거예요.”
“힘들겠죠?”
“아마도요. 옛날에 초코 님도 이런 퀘스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반쯤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청산가리가 실패했다는 말을 들으니 희연은 점점 더 자신이 없어졌다. 그녀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킹스메이커는 희연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어떻게든 성공할 수 있도록 도울게요, 오리 님! 일단 오두막으로 돌아-.”
“으아아아아앙악!”
낯선 목소리의 비명 소리에 희연과 킹스메이커는 눈을 깜박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두막 쪽에서 들린 거 맞죠?”
“이상하네. 이런 식으로 소리 지를 사람이 없을 텐데.”
희연 또한 킹스메이커의 말에 동의했다. 굳이 있다면 뉴비 없지가 있기는 했지만 이 평화로운 숲에서 그가 비명을 지를 일은 없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자, 이거 손에 쥐고, 제 손 잡고 조심히 올라와요.”
킹스메이커는 희연에게 선이 그어진 삼각형이 새겨진 암녹색의 보석을 쥐여주고는 제 낫을 꺼냈다. 희연은 그녀의 말에 따라 조심히 낫 위로 다리를 걸쳤다.
“이거 하늘 나는 거죠?”
“아까 준 보석만 쥐고 있으면 낙사할 일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정 무서우면 좀 낮게 날아서 갈까요?”
“네!”
기다렸다는 듯 답하는 희연을 위해 킹스메이커는 고도를 낮춰 비행을 시작했다. 떨어져도 괜찮을 높이라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야 희연은 마법사의 기동력에 감탄할 수 있었다.
“미법사들은 다 이렇게 날아다녀요?”
“굳이 마법사가 아니어도 재료랑 방법만 알면 이렇게 다닐 수 있어요. 아까 그 보석 있죠? 그게 재료에요. 오리 님은 신관이고 신관은 마력계열이니까 나중에 이런 식으로 간단한 마법은 쓸 수 있게 될 거에요.”
“어… 또 책을 읽어야 하는 거죠?”
“날씨가 좋죠, 오리 님?”
“맞구나….”
실망한 희연을 위해 킹스메이커는 좋은 소식을 들려주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밖에 상황을 안 말해줬네요. 경매에 참가했다가 교황을 만났어요. 개인 면담을 하게 됐는데 당분간 헬르벨을 찾을 생각은 아예 없는 것 같더라고요!”
“아, 그 경매장….”
“…….”
“킹 님?”
뒤돌아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 없는 그녀의 반응에 희연은 경매장에서 썩 좋지 못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목걸이…. 그 목걸이를 꼭 낙찰받아서 오리 님 목에 걸어주려고 했는데…!”
“저는 괜찮은데요.”
“그 짹짹만 아니었어도!”
킹스메이커가 말한 짹짹이가 누구인지 궁금해질 때쯤 조금 전의 곡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아이고-! 아이고-! 내 나이 마흔에 장가 한 번 못 가보고 이리 죽는구나! 아이고, 아이고오오!”
낫 위에서 내려온 희연과 킹스메이커는 곧바로 소리의 근원지로 가는 대신 조심조심 나무 뒤에 숨어 상황을 훔쳐보았다. 희연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거대한 하얀 벽이었다.
“루로?”
닉의 하얀 드래곤 루로가 그 거대한 몸을 햇볕 아래 뉜 채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루로의 앞에는 주저앉은 남자가 바로 이 곡소리의 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