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비세스 메이커 (61)화 (61/251)

61화

어쩌다가 농장까지 걸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윌로우에게는 다행히도 이 자리에는 신실한 신관 헬르벨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는 공증인 없이 진행되는 불법 계약을 봐주지 않았다. 킹스메이커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지만 크게 개의치 않아 한다는 점에서 진심으로 이 농장을 탐내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윌로우는 식은땀을 닦으며 그들에게 설명했다.

“오늘은 첫날이니 농장 견학만 하는 것으로 하지. 보다 보면 우리 농장이 그렇게 나쁜 곳이 아니란 걸 자네들도 알게 될 거야. 그러면 나는 이만….”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되나요?”

몸을 빼려는 윌로우의 모습에 희연은 서둘러 물었다. 농장의 범위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괜히 허락받지 못한 곳에 들어갔다가 곤란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윌로우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건물 보이나? 그래, 그 나무집 말이야. 그곳에만 가지 말아. 치우지 못해 아주… 지독하거든. 돌아다니다 힐두르를 보면 뭐, 감자라도 하나씩 얻어먹든가 하고.”

윌로우는 내심 헬르벨이 자신과 함께 가주기를 바랐지만 헬르벨은 희연의 일행과 함께 다니는 것을 선택했다. 마침내 일행만 남게 되자 뉴비 없지와 킹스메이커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자 그러면 윌로우가 가지 말라고 했던 집부터 가봅시다!”

“사건과 이벤트는 언제나 가지 말라는 곳에서 일어나죠!”

“…?”

희연은 이래도 되는 건가 고민했지만 두 부길마는 이미 힘차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뒤였다. 헬르벨이 함께한다는 것도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에 희연은 이미 설득이 불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말 없이 두 사람을 쫓아가는 닉은 애초에 설득한다는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닉을 보던 희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작은 드래곤 쪽으로 움직였다.

열심히 숨기던 모습은 어디 가고 유니콘도 뿔 달린 말 취급하는 윌로우의 모습에 닉이 숨기는 것을 포기한 루로였다. 커다란 모습일 때도 느꼈지만 루로는 온몸이 비늘로 덮인 파충류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외향을 갖고 있었다. 보송보송한 솜털로 둘러싸인 몸에 깃털로 꾸며진 날개 탓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닉의 어깨에 매달려 기다란 깃털 달린 꼬리를 흔들거리는 루로는 거대한 모습일 때의 위엄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같은 드래곤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이마 위에 돋아난 작은 뿔 정도였다.

희연의 시선을 느꼈는지 연신 닉의 머리카락을 깨물며 놀던 루로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작은 생명체는 폴짝 뛰어올라 날갯짓을 몇 번 하더니 희연의 앞에서 추락했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루로를 붙잡은 희연은 예상외로 묵직한 무게감에 당황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팔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날 정도의 무게였다.

“너… 생각보다 무겁구나.”

루로는 희연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불만스럽게 꼬리로 희연의 손등을 때렸다. 여기서 문제는 루로는 닉이 알에서부터 고이고이 길러온 엘리트 드래곤이라는 점. 희연은 렙 4라는 점이었다.

장난스럽게 친 꼬리 짓 몇 번은 희연의 목숨을 위협했다.

“오리 님?”

무언가 바닥 위로 쓰러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킹스메이커는 놀라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희연을 보는 사이 그녀와 가까이 있던 헬르벨이 서둘러 회복을 시도했다.

“범인은 드래곤….”

희연의 옷 후드 속에서 기어 나온 악령이가 멍하니 앉아 있는 루로를 가리켰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은 희연이 쓰러지며 붙잡고 있었기에 흙투성이가 된 하얀 드래곤 쪽으로 돌아갔다.

“루로…?”

닉의 부름에 가해자, 루로는 먀먀, 울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사이 헬르벨은 치료를 마쳤고, 피해자 희연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범인은 루로.”

“그건 이미 악령이한테서 들었어요.”

“하늘에서 떨어진 티티 이후로 가장 위협적인 공격이었어요.”

자미엘로 인해 죽었던 것은 화상으로 죽었던 것임으로 희연의 뇌리에 깊이 기억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있어 가장 위협적이었던 공격은 티티, 그다음은 루로였다.

먀-

그러나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는 루로를 보니 마음이 약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점을 눈치챈 듯 루로가 날개를 펼쳐 희연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또다시 받아주어야 하나 희연이 엉거주춤 손을 내밀었지만 루로는 주변을 맴돌며 날뿐 그 위로 자리 잡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받아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미안하다고 하고 싶나 봐요.”

“드래곤인데 되게… 마음이 여리네요.”

대부분의 매체에 나오는 드래곤들은 오만, 위엄, 꼿꼿한 자존심을 상징하기에 희연 또한 루로가 그런 성격일 거라고 생각했다. 조심히 뻗은 손끝에 매달려 코끝을 비비는 모습은 그런 희연의 편견을 무너트렸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사람 손에서 자란 것도 있고, 아직 어리기도 하니까요.”

“많이 어려요?”

“이제 한 살 반이에요.”

예상보다도 더 어리다 못해 그냥 갓난아기인 수준이었다. 희연이 닉의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킹스메이커는 부가 설명을 해주었다.

“드래곤이니까 한 살을 정말 한 살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요.”

“어….”

“전에 본 모습은 길마님이 테이머라 끌어낼 수 있는 최종 진화 같은 모습.”

“그러면….”

“루로의 부모님께 제대로 부탁받고 키운 거지 드래곤 사냥 이후 전리품으로 얻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탄생의 비밀은 없어요.”

희연의 생각은 훤하다는 듯 그녀는 질문을 다 하기도 전에 궁금한 것들을 말해주었다. 루로는 자신의 이야기에는 관심 없는지 조심조심 날아 희연의 주위를 맴도는 것에만 집중했다.

후드 속에 들어가 있던 악령이는 그런 루로가 거슬린다는 듯 짧은 팔을 휘적였지만 슬프게도 드래곤에게 그 정도 위협은 신경 쓸 가치가 없는 몸짓이었다.

희연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두 존재 사이에 낀 사이 주변을 둘러보던 뉴비 없지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우리 아까 그 나무집에는 못 가겠는데요.”

그의 말대로였다. 윌로우가 출입을 금지시킨 나무집으로 가는 길목에 쟁기를 어깨에 짊어진 힐두르가 터덜터덜 걸어 다니고 있었다. 힐두르 또한 그들을 발견했는지 애매한 미소 같은 것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고운 하늘색 머리카락은 땀에 젖은 얼굴에 들러붙어 있어 사람을 창백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아니. 실제로도 힐두르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흙과 굳은살로 얼룩진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파랗게 질린 입술은 버석하게 말라 있었고 생기 잃은 진한 분홍색 눈은 보는 사람이 오싹함을 느낄 정도로 텅 빈 느낌이었다.

“보다 보면 농장이 나쁜 곳이 아님을 느낄 거라고…?”

윌로우가 했던 말을 떠올릴수록 힐두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그가 악덕 농장주라는 사실 뿐이었다.

“응?”

그 와중에 킹스메이커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등에 메고 있던 낫 위로 손을 올렸다.

“킹 님?”

“아, 잠시만요. 뭔가 이상한데…?”

킹스메이커의 말이 무슨 뜻인가 싶던 희연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다시 힐두르를 바라보았다. 의문은 경악이 되었다.

“힐두르!”

힐두르가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급히 달려가 살펴본 힐두르의 얼굴은 도자기 인형처럼 보일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뜨거운 햇빛 아래 몇 시간 동안 고된 노동을 함으로써 생겨야 할 홍조와 땀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희연은 일단 총을 꺼내 힐두르의 머리에 갖다 댔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힐두르는 눈을 뜨자 보게 된 총에 흔들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저는… 이제 죽는 건가요?”

“네? 아뇨?”

“죽을 수 없어요, 이렇게는….”

“저, 처형인 같은 거 아닌데요….”

힐두르가 총을 붙잡는 바람에 희연은 총을 쏠 수가 없었다. 결국 닉이 나서서 힐두르의 입에 포션을 부어주었는데 의외로 그것은 거부하지 않고 삼켜 냈다.

포션을 먹고 눈에 초점이 잡힐 만큼 좋아진 것은 환영할 일이었으나 그다음 힐두르가 내보인 반응은 모두에게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일을, 책임을 져야….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일 할게요.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힐두르?”

비틀거리며 쟁기를 손에 쥐는 모습은 언뜻 보며 광기 어리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뉴비 없지가 나서 힐두르의 손에 있던 농기구를 뺏어 들었다. 힐두르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보다가 결국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

힐두르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곧바로 달려온 윌로우는 서럽게 울며 힐두르를 끌어안았다.

“아이고 힐두르! 내가 쉬엄쉬엄하라고 그리 말했는데! 자네마저 쓰러지면 난 어떻게 하라고 그러나!”

“죄송합니다, 주인님. 어서 일어나서 일을 해야…, 날이 지기 전에….”

“됐어, 됐어! 자네 일은 내가 하면 그만이야! 어서 들어가서 좀 쉬어!”

의외의 상황에 희연의 일행은 눈만 굴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악덕 농장주와 그로부터 해방이 이곳에 숨겨진 퀘스트가 아닌가 하고 모두가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습은 마치,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아끼는 사람에게 중노동시킬 수밖에 없는 농장주 윌로우와 그런 그를 이해하는 힐두르’ 같은 모습이었다. 한술 더 떠 힐두르는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으로 그들에게 허리를 숙여 부탁까지 했다.

“여러분, 부디 주인님을 도와 이 농장을….”

“힐두르! 나를 위해 고개 숙이지 말게나! 아이고, 아이고! 어쩌다가 우리 꼴이 이렇게 됐을까! 자네들! 제발 우리 좀 도와주게나!”

희연의 일행은 이미 윌로우에게서 퀘스트를 받았기에 조금 더 일찍 일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었다. 힐두르는 희소식에 감사하며 눈을 감았고, 곧바로 헬르벨의 치료를 받았기에 편히 눈 감은 얼굴에는 혈색이 돌았다.

힐두르를 근처에 있던 자신의 집에 데려다주고 나온 윌로우는 훌쩍이며 그들에게 대략적인 사정을 알려주었다.

“실은 우리 농장에는 조금 가혹한 축복이 있다네. 이곳, 해가 지지 않는 농장은 말 그대로 해가 지지 않아. 그래서인지 농작물 또한 끊이지 않고 다시 자라나지. 그만큼 일해야 할 것이 많고 일꾼들도 많았어. 하지만 지금은… 그래, 나와 힐두르밖에 남지 않았네.”

“그러고 보니 목동은 사라지고 일꾼들은 도망갔다고 했었죠?”

킹스메이커의 말에 윌로우는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곤란한 일이야. 제때제때 수확하지 못한 작물들은 끝도 없이 자라나고, 나중에 가서는 땅을 죽게 만든다네.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그런 식으로 땅이 죽는 게 더 나은 상황이지.”

“일꾼이 없는 것 말고도 다른 문제가 있는 건가요?”

“그건….”

윌로우는 땀을 뻘뻘 흘리며 눈을 피했다.

“그 다른 문제가 바로 목동이 사라지고 일꾼들을 도망가게 만든 원인인 것 같은데. 말할 생각은 없나 보죠?”

추궁에 가까운 킹스메이커의 말에도 윌로우는 꾹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앞서 힐두르가 그랬듯 고개 숙여 그들에게 부탁했다.

“시간이 지나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될 걸세. 미안하지만 나는 그 일을 말해 줄 수 없어. 지금은 그저 이 농장 일을 좀 도와주기를 바랄 뿐이야.”

“일단 알겠어요. 우리가 뭘 하면 되죠?”

윌로우를 추궁하는 데에 가장 열심이던 킹스메이커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는 슬그머니 그녀의 눈치를 살폈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는지 그들에게 일을 분배해 주었다.

“거기, 힘 좋아 보이는 자네는 마구간으로 가주게나. 자네는 동물을 좋아하나 보군? 그렇다면 양계장이 좋겠어. 낫질을 잘하는 자네는 어디 보자, 그래 저기로 가서 농작물을 수확해 주고 자네는….”

“…….”

“일단 힘쓰는 쪽은 아니고, 동물이랑도 그리 사이좋을 것 같지는 않고. 낫질도 못 하겠군. 어디 보자 자네가 할 만한 일이….”

마지막으로 남은 희연을 훑어보던 윌로우는 한참을 고심한 끝에 킹스메이커가 맡은 부근과 그리 멀지 않은 밭을 희연에게 맡겼다.

“거기 있는 작물들을 캐주면 된다네.”

“감자 같은 건가요?”

“에잉. 그렇게 재미없는 건 안 팔리지. 나는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작물을 선호한다네.”

재미?

희연은 그 말에 불안한 눈으로 자신이 맡게 된 밭을 확인했다. 그녀로서는 재미있는 작물이라는 것이 무엇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것을 눈치챈 뉴비 없지가 슬그머니 다가와 그녀에게 재미있는 작물의 정체를 귀띔해 주었다.

“랜덤 가차 뽑기 작물 말하는 거예요. 유저들이 제일 많이 사가는 작물 1위. 제일 싫어하는 작물 1위. 즐거움과 불행은 언제나 함께한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시죠!”

“그런데 왜 하는 걸까요?”

“원래 복권 같은 건 혹시 내가? 하는 마음이 들게 하니까 그렇죠! 0.005의 확률로 나오는 작물 하나면 인생이 피니까요.”

확률까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또한 그 작물에 손을 대보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슬픈 듯 눈을 질끈 감는 그의 표정을 통해 즐거움과 불행이 공존한다는 것 또한 증명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