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두 사람이 작물에 관하여 이야기 나누는 사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수인계를 마친 윌로우가 이번에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자 둘 중 누구부터 설명을 들을 건가?”
“오리 님한테만 설명해 주세요. 저는 마구간 일 옛날에도 해봤습니다!”
“오? 그게 정말인가?”
“네. 옛날에 신전 산하의 농장에서 일했거든요. 성기사 단장에 눈에 띌 정도로 뛰어난 일꾼이었던 저를 믿고 오리 님에게만 잘 설명해 주세요.”
“잠깐, 자네 도대체 뭘 했길래 농장 일을 하는데 성기사 단장님의 관심을….”
“그러면 출발!”
불안한 얼굴의 윌로우가 보이지도 않는지 뉴비 없지는 가는 길이 같은 닉을 챙겨 달려나갔다. 윌로우로부터 설명을 들은 희연과 킹스메이커 또한 본인들이 맡은 밭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헬르벨은 윌로우의 부탁으로 쓰러진 힐두르를 살펴봐 주기로 했기에 그의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오리 님 일하다가 힘들면 언제든 저 있는 쪽으로 와야 해요!”
그리 말하며 킹스메이커는 등에 메고 있던 낫을 휘둘러 밭을 빼곡히 메우고 있던 밀의 3분의 1을 베어냈다. 그녀가 말한 낫질을 잘한다는 의미가 정말로 이런 의미였던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의 실력이었다.
킹스메이커가 맡은 밭을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간 뒤에야 희연은 자신이 맡은 곳에 도착했다.
[힘 스텟이 부족합니다. 작물 수확에 페널티가 생깁니다.]
[민첩 스텟이 부족합니다. 작물 수확에 페널티가 생깁니다.]
[농업 관련 스킬이 없습니다….]
[농업 관련 업적이 없….]
[농업 관련 칭호….]
“…장난하나.”
희연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있는 밀밭을 보았다. 검은 낫에서 흘러나왔을 것이 분명한 새까만 칼날 같은 것들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는 단면이 잘린 줄기만 남아야 하지만 밀밭은 순식간에 다시 자라 킹스메이커의 노력을 수포로 돌려놓았다.
윌로우의 농장은 그들을 농락하고 있었다. 아무리 농장 게임에서 작물은 몇 분 만에 다 자란다고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온갖 페널티를 받은 상황에서 저 정도 속도도 나지 않을 것이 뻔해 희연은 머리가 아파지기까지 했다.
“3일 동안 해도 안 지는데 이걸….”
후드 속에서 기어 나온 악령이가 희연이 시험 삼아 캐낸 작물을 갖고 놀고 있음에도 그녀는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에 빠졌기에 못했다는 표현이 알맞았다.
“왜 그래?”
결국 보다 못한 악령이가 안고 있던 작물을 내려놓고 물어보았다.
“여기는 해가 지지 않잖아. 근데 아까 힐두르는 날이 지기 전에 어서 일해야 한다는 듯이 말했는데…. 뭐지?”
“토끼지!”
“뭐? 악!”
악령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던 희연은 누군가 등을 강하게 민 충격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 농장에서 뜬금없이 그녀를 공격할 사람은 없었기에 더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을 공격한 대상을 눈으로 확인한 희연은 악령이를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킹 님! 킹 님! 킹 님!”
낫질을 멈추고 밭을 태워 버리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킹스메이커는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희연의 부름에 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오리 님? 무슨 일-.”
“제 뒤에 토끼! 싸움꾼 토끼요!”
“아.”
당근을 씹으며 전투적으로 달려오는 많이 불량해 보이는 토끼를 발견한 그녀는 낫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희연이 몸을 숙이는 것과 동시에 킹스메이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무기를 집어 던졌다.
삐입-!
“오리 님 레벨이면 이제 싸움꾼 토끼는 혼자 잡을 수 있어요.”
“좋지 못한 추억이 있어서요….”
파브넷의 퀘스트를 미리 준비하며 겁도 없이 싸움꾼 토끼에게 덤볐던 희연은 크게 데였던 추억을 결코 잊지 않았다. 만약 그때 킹스메이커가 도중에 난입하지 않았다면 희연은 토끼 밥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음에는 제가 직접 잡아볼게요. 이번에는 너무 갑자기 튀어나와서 놀라는 바람에 그런 거예요.”
“아, 못 잡을 것 같은데요?”
“?”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 홀로 가능하다고 했던 킹스메이커가 말을 바꿨다. 희연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킹스메이커는 손을 들어 희연이 맡은 밭을 가리켰다.
“어… 망했다.”
촉촉한 흙과 싱그러운 풀잎만이 가득해야 할 밭이 새하얀 털을 가진 토끼들로 인해 보이지도 않았다. 희연은 그 잠깐새에 밭을 점령한 싸움꾼 토끼 무리를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역시 사냥해야겠죠?”
희연이 총을 꺼내 들자 킹스메이커는 손을 들어 그 행동을 저지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농업의 전문인을 불러와 볼까요?”
농업의 전문인?
킹스메이커는 희연이 멀뚱멀뚱 자신을 보는 사이 현실의 시간을 체크했다.
“이 시간대라면 있을 확률이 높거든요. 오리 님도 아는 사람이죠! 바로 귀농 님!”
“아…!”
게임을 시작한 첫날 이후로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상대의 이름이 등장했다. 희연은 흐릿하게 생각나는 귀농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다행히도 킹스메이커의 부름에 귀농은 마침 별다른 할 일이 없었다며 냉큼 윌로우의 농장으로 달려왔다.
“우와….”
농사의 신처럼 밭 전체를 이끌고 하늘을 날아서 말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흙이 눈과 입으로 들어갈까 싶어 손으로 차양막을 만든 희연과 킹스메이커는 하늘을 날면서도 씨 뿌리기를 멈추지 않는 귀농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귀농 님은 원래 저렇… 게 다니시나요?”
“아무래도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다 보니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시더라고요.”
“그렇구나.”
“그래서 밭 전체를 이끌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드렸죠.”
“…만들어줬다고요?”
희연이 하늘을 나는 밭의 정체에 대해 충격받는 사이 밑으로 내려온 귀농은 작업을 마무리하며 허리를 폈다.
“에휴!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현실의 고단함인지 농업의 고단함인지 모를 피로감이 느껴지나 온화한 말씨였다. 희연은 어색하게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귀농 님…. 갑자기 불러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괜찮아. 어차피 할 일도 없었네요. 킹도 오랜만에 보네요. 잘 지냈죠?”
귀농은 킹스메이커와 근황을 주고받으며 밭을 정리했다. 그가 끌고 다니던 밭은 마치 팝업북처럼 반으로 접히더니 동화책 크기로 변해 그의 품 안으로 돌아갔다.
“일단 불러서 오기는 했지만 내가 할 줄 아는 건 기껏해야 농업 관련인데….”
“그 농업의 전문가가 필요했어요. 자, 귀농 님 일단 저 밭을 봐주세요.”
“밭? 밭은 없고 토끼 목장은 보이는데…. 아이고 토끼들이 귀엽네.”
“그 토끼들이 짓밟고 뜯고 맛보고 있는 것이 바로 밭이에요.”
“아이고 저런….”
귀농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선 자신을 부른 이유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면 이제 일을 해볼까요? <밭의 수호자>!”
그가 손뼉을 치며 외치자 그의 곁으로 반투명한 사냥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울링 하는 개들의 소리를 들은 사냥꾼 토끼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희연은 불량한 외양의 토끼들이 단체로 쳐다보는 모습에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매우 위협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달릴 준비를 끝낸 사냥개들은 귀농이 신호를 보내자 일제히 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모습 탓인지 거칠게 달리는 모습과 달리 사냥개들이 지나간 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밭의 유해 동물인 토끼와 같은 동물만 쫓아내기에 안성맞춤인 스킬이었다.
토끼 떼가 지나간 밭을 내려다보며 그는 말했다.
“그러면 이제 저기 있는 밭의 작물들을 캐 주면 되는 건가요?”
“미리 감사합니다!”
희연의 외침에 귀농은 허허 웃으며 농기구를 이고 밭으로 걸어갔다. 희연과 킹스메이커가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귀농은 대략적으로 밭을 쭉 훑어보더니 밭 위로 농기구를 힘껏 내리쳤다.
시험 삼아 캐는데도 십 분은 족히 매달려 있어야 했던 희연과 달리 귀농은 몸짓 한 번에 땅을 가르며 그 안에 있던 작물이 모조리 밖으로 끄집어냈다.
“와…?”
상상보다 더한 임펙트 있는 모습에 희연은 놀라 입을 벌렸다. 곧이어 다시 땅이 아물며 순식간에 다시 열매가 자라는 모습에는 어이가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귀농은 몇 번 더 밭을 내리쳐 수확했지만 저주받은 윌로우 농장에서 수확의 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허허 이 밭 참 풍요롭네 하며 농기구를 휘두르던 귀농도 얼마 안 있어 웃음을 잃기 시작했다.
“그… 언제까지 수확해야 하는지 혹시 알 수 있을까요?”
조심스러운 그의 질문에 희연은 더더욱 조심스러운 어조로 답을 해주었다.
“그게 저도 잘….”
설마하니 3일 내리 정말 수확만 해야 하는 건가 하는 걱정이 들 때쯤 농장의 주인 윌로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이 무슨!”
그는 밭 위를 굴러다니는 수많은 열매를 보며 감격한 듯 입을 틀어막았다. 곧이어 희연의 손을 붙잡으며 사과했다.
“내가 인재를 못 알아봤네! 자네가 이렇게 밭일에 소질이 있을 줄이야! 끽해야 다섯 개는 수확했을까 걱정되어 와 본 것인데!”
“그게요….”
이 일의 공로자 귀농과 킹스메이커가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음으로써 희연은 윌로우의 수확의 신 비스름한 것이 되었다.
“이 정도 일한 자네들에게 더 이상 어떻게 일을 더 시키겠나! 물론 밀 수확량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양심이 없네?”
킹스메이커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며 윌로우는 말을 마저 이었다.
“오늘은 첫날이니 이만하도록 하지! 이만 가서 쉬어! 힐두르가 식사를 준비해놨으니 가서 먹도록 하고. 그런데 자네는 누구인가?”
뒤늦게 귀농을 발견한 윌로우가 의문을 표했지만 정말로 궁금한 건 아니었는지 금세 관심을 거두었다.
“농부 중에 나쁜 사람은 없으니 괜찮겠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자네도 우리 집에 가서 따뜻한 수프 한 그릇 들고 가게나! 나는 이 열매들을 좀 정리해야겠어!”
흥겨워하는 그를 뒤로한 채 그들은 빨간 지붕이 인상 깊었던 윌로우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윌로우가 했던 말을 주워 담고 일을 더 시킬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희연은 문득 이 일은 혼자서 해오던 힐두르가 생각났다. 헬르벨의 간호를 받고 있지만, 몸이 괜찮아지면 언제 이 지옥 같은 노동의 길에 끌려올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힐두르가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헬르벨이 치료해주기로 했으니까 지금쯤이면 괜찮아지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다행인데….”
“하지만 헬르벨이 옆에 있어서 오히려 더 안 괜찮을지도 모르는 일인 거죠.”
“?”
킹스메이커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희연과 귀농의 걸음도 멈추었다. 킹스메이커는 주변을 둘러보며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힐두르가 의심스러워요.”
“갑자기요?”
“이런 농장의 일꾼이라고 하기엔 디자인을 너무 잘 뽑았어요.”
“그건 맞기는 한데….”
그녀의 말대로 힐두르는 농장의 일꾼이라고 하기엔 그 외모가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도저히 흔하다고는 못할 하늘색 머리카락과 분홍색 눈동자를 가진 힐두르는 거기에 더해 성별을 구분 짓기 힘든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만일 외모의 뛰어남이 중요 NPC임을 알려주는 척도라 한다면 힐두르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힐두르가 만약 정말로 이곳에 숨겨진 퀘스트를 가진 NPC라고 해도 수상하다기보다는 불쌍한 쪽 아닐까요?”
희연은 아직까지도 이곳에 숨겨진 퀘스트가 있다면 악덕 농장주와 그로부터 해방일 것이라 믿고 있었다.
다른 일꾼들과 목동들이 다 도망갈 때 마음이 약해 도망가지 못한 힐두르. 월급만 잘 주는 사장 밑에서 일해봤던 희연으로선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다만 확신하지 않는 것은 윌로우와 힐두르가 보여주었던 모습 때문이었다. 기묘했던 두 사람의 대화는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희연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한 킹스메이커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웃으며 그제야 걸음을 재촉했다.
“여차하면 본인한테 물어보면 되는 거니까요. 아, 도착했다. 우리어서 들어가요!”
그녀의 말대로 윌로우의 빨간 지붕 집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조금 전에는 정신없어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작은 우물을 옆에 끼고 지어진 집은 오래된 듯했지만, 그간 잘 관리되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이 대여했던 오두막과는 달리 말이다.
“헷갈리네, 진짜….”
윌로우의 못됨과 힐두르의 수상함 중 어느 쪽이 더 비중 있을까 생각하며 희연은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