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비세스 메이커 (63)화 (63/251)

63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식탁 위에는 한솥 단지 가득 끓인 수프와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빵을 담은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입에 넣은 희연은 킹스메이커와 귀농이 그릇에 수프를 뜨는 동안 헬르벨과 힐두르를 찾아 집안을 돌아다녔다.

1층에는 두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듯해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은 그녀는 생각보다 낡은 계단에 발소리도 안 나게끔 조심히 발을 떼며 움직였다.

2층에 두 사람이 있을 거라는 희연의 예상이 맞는 듯 계단의 중간 부근에 다다르자 낮게 깔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신관님. 혹시… 의 세계를… 어떻게, 만약… 한다면… 하지만 그 끝은….”

“그런 식으로 회피할 생각은 없다.”

힐두르의 목소리와 달리 헬르벨의 목소리는 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희연은 그 이유가 그가 문을 향해 걸어 나오며 말을 해서 그렇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문이 열리며 곧바로 헬르벨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언제 왔지?”

“방금요! 내려가서 같이 밥 먹어요, 헬르벨!”

헬르벨은 희연이 그들의 대화를 얼마나 들었는지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지만, 그녀는 실제로도 들은 것이 없었기에 이 불편한 상황을 빨리 넘길 겸 전혀 모른다는 듯 굴기로 했다. 다행히 헬르벨의 의심은 금세 거두어졌다.

“아, 힐두르도 같이….”

“…….”

“…먹을까요?”

“물론이죠. 먼저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쓰러질 때의 창백함은 사라지고 혈색이 돌기 시작한 얼굴은 아름다웠다. 살며시 웃는 낯은 상냥했다. 그래서 희연은 스스로를 의심했다.

잘못 봤나?

눈이 마주친 힐두르는 기이할 정도로 무표정한 낯을 하고 있었다. 역광 속에서 빛나던 분홍빛 눈은 신비로웠으나 알 수 없는 오싹함을 안겨주었다.

순식간이었지만 그 감각은 선명했다. 코앞에서 자미엘을 마주 봤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기에 착각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희연은 목을 쓸며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

악덕 농장주로부터 해방 아닌가 봐….

1층에는 그녀가 2층에 다녀올 동안 도착했는지 닉과 뉴비 없지가 다른 이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 희연은 눈을 굴려 킹스메이커를 찾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구보다 믿음직한 아군이었기 때문이다.

“킹 님-.”

[알 수 없는 힘이 당신을 밀어냅니다.]

“!”

“오리 님!”

순식간에 계단에서 구른 희연은 얼얼한 몸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들이 그런 희연을 둘러싸고 걱정의 목소리를 냈다.

희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계단 위를 살펴보았다. 놀란 얼굴로 내려오는 헬르벨의 뒤에 힐두르가 서 있었다. 계단에서 구른 그녀의 모습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스킬 <침묵의 단죄>에 당했습니다. 일정 시간 동안 해당하는 단어와 관련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금지 단어 : 힐두르]

[<침묵의 단죄> 효과로 일정 시간 동안 모든 채팅 사용이 중단됩니다.]

“오리 님 괜찮아요?”

“…….”

“오리 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네?”

힐두르와 관련된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를 몇 번 더 시도해 본 희연은 정말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 사이 계단 밑으로 내려온 힐두르는 예의 가여운 표정을 지으며 희연의 어깨를 짚었다.

“계단이 낡아서…. 이게 다 저의 잘못이에요. 죄송합니다. 미리 고쳐놨어야 했는데.”

“…으.”

그쪽이 밀었잖아!

희연은 힐두르를 비난하는 말 또한 불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답답함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지만, 남들이 보기엔 아파서 그런 거로만 보였다.

“…저 안 다쳤어요. 괜찮아요.”

일단 걱정하는 이들을 안심시킨 희연은 자신의 건강을 어필하듯 자리에서 일어나 몇 번 걷는 시늉을 해주었다. 그래도 이제는 레벨 4라고 계단 좀 굴렀다고 피가 훅훅 깎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통각 수치 또한 여전히 낮은 편이었기에 기분이 더러울 뿐이지 크게 아프지도 않았다. 희연이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어떤 말도, 심지어 유저의 권리라 할 수 있는 채팅도 못 하는 상황에서 해결법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 저주가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힐두르는 뻔뻔스럽게도 자리에 합류했다. 그것도 바로 희연의 옆자리에.

“가여우신 분. 이거라도 좀 들어요. 식사를 못 해 쓰러진 걸지도 모르니까요.”

“이으….”

“아이고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식사를 거르면 못 써요. 어서 이것 좀 먹어요.”

그거 아니에요, 귀농 님!

힐두르의 말에 감화된 듯 귀농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희연의 앞에 수프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분한 마음으로 일단 수프를 먹었다. 이는 떨어져 가는 공복도 때문이지 결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옆에서 쳐다보는 힐두르가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오리 님 등 뒤에….”

“?”

힐두르가 내미는 빵을 눈 질끈 감고 씹어먹던 희연은 킹스메이커의 말에 자신의 등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잠시만요.”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희연의 뒤에 서더니 몇 번 손으로 등을 쓸어내렸다. 무언가 확인하듯 지그시 바라보던 킹스메이커의 눈은 자연스럽게 흘러 힐두르 쪽으로 움직였다. 희연은 그 모습에 내심 그녀가 무언가를 알아차린 것이 아닌가 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킹스메이커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보다 힐두르가 나서는 것이 먼저였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힐두르는 다시 희게 질린 얼굴을 하며 비틀거렸다.

“아이구 왜 그러세요!”

쓰러지는 힐두르의 팔을 붙잡아준 것은 귀농이었다.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말간 얼굴로 오로지 걱정을 담아 힐두르를 보았다. 힐두르 또한 귀농의 그런 점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가여움을 한껏 뿜어내며 기어이 주저앉았다.

“아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어요! 주인님을 뵐 자격이 제게는 없습니다. 이렇게 사치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해야 했던 일이 얼마나 많은데! 삯바느질을 하고 열매를 따고 우유를 짠 다음 집을 청소하고 곡식을 갈고 담금주를 만들고 양 떼들에게 풀도 먹였어야 했는데!”

“…….”

“제가 이렇게 태평하게 있는 동안 윌로우 주인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일을 홀로 하셨을지 생각하면, 아아! 신관님! 저는 죄인입니다! 신께서 저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예요!”

희연은 헬르벨의 옷자락을 붙잡고 참회하듯 고개 숙이는 힐두르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자신에게 걸린 저주가 정말 저 힐두르가 건 게 맞는 걸까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이럴 시간이 없어요! 어서 나가서 양 떼들에 풀이라도 먹여야…!”

“양 떼들에 풀 먹이는 것 정도는 제가 할 수 있어요. 옛날에 다른 농장에서 일할 때 목동 일을 맡았으니까요.”

“아…. 목동… 이셨나요?”

보다 못한 닉이 힐두르의 일을 나눠 받겠다 자처했다. 귀농 또한 열매 정도는 본인이 대신 수확해 줄 수 있다면 나섰다. 앞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뉴비 없지는 이 모습에 감동을 받았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그 또한 나서려고 했다.

“그렇다면 저는…!”

“없지는 가만히 있어.”

“어? 아? 음? 옙.”

뉴비 없지는 얼굴 가득 의문을 담았지만 킹스메이커의 말에 수긍했다. 힐두르는 잠시 킹스메이커 쪽을 보았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금세 타깃을 돌려 희연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어린 신관님. 부디 저를 도와주시겠나요?”

“…….”

“저와 함께 열매를 담그러 가요. 신관님과 함께라면 훌륭한 담금주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담금주에 담그는 게 혹시 나인가?

이런 식으로 증거 인멸을 당하는 건가 싶어 희연은 거부의 말을 하려 했지만, 저주의 효과는 대단했다. 부탁을 거절하는 것마저 힐두르에 대한 부정으로 인식하는지 벌어진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희연에게는 구세주가 있었다.

“아뇨. 미안하지만 오리 님은 우리랑 따로 해야 하는 일이 있어요.”

“아….”

“윌로우가 부탁한 분량은 충분히 채웠고, 그런데도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굳이! 굳이! 가장 연약한 오리 님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네요!”

“…맞아요, 마법사님. 제가 욕심을 부렸어요.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려고 하다니. 역시 저는 죄인이군요.”

“저런, 안타깝네요!”

힐두르도 대단했지만 킹스메이커도 만만치 않았다. 모르고 보면 인성 파탄 난 게 아닐까 싶은 수준임에도 그녀는 언제나 망설이지 않았다. 심지어 언제나 킹스메이커와 짝짜꿍 잘 맞는 뉴비 없지마저 쟤 왜 저러지? 하는 얼굴로 쳐다보는 상황임에도!

결국 힐두르 또한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겼는지 도와주겠다고 나선 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기다랗게 땋은 하늘색 머리카락이 완전히 문밖으로 사라진 뒤에야 킹스메이커는 행동했다.

그녀는 뉴비 없지와 헬르벨의 손을 잡게 만들다니 어깨를 도닥여 주며 말했다.

“자, 이참에 신전 사람들끼리 정다운 이야기 좀 해보시고. 오리 님은 나랑 잠시 이야기 좀 할까요?”

“킹? 킹? 아니, 날 이렇게 두고 가면 어떻게 해요, 님아!”

뉴비 없지의 외침은 들리지 않는지 킹스메이커는 이번에도 거침없었다. 그녀는 희연을 데리고 조금 전 힐두르와 헬르벨이 있던 2층 밖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녀는 문을 닫자마자 속전속결로 희연을 시험에 들게 했다.

“자 오리 님. 지금 당장 나한테 채팅해 보세요. 만일 채팅이 안 되는 상황이라면 날 쳐요!”

“그….”

희연은 그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 상황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손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 다행인지 아닌지 이전에 한번 총을 쏴 본 적이 있어서 결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주의 영향은 이 행동마저 제한을 걸었다.

그녀가 아무것도 못 하고 멀뚱멀뚱 앉아만 있자 킹스메이커는 그제야 방긋 웃었다.

“오리 님 저주 걸렸죠?”

“!”

“만약 아무 저주도 걸리지 않았다면 오리 님은 채팅을 치거나, 나를 치거나. 그도 아니면 왜 그런 걸 시키냐고 물었을 텐데 지금처럼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건 모든 행동에 제한이 걸려 있다는 뜻이죠.”

킹스메이커는 그 이후로도 자신의 추론을 내놓았다.

“저주를 건 용의자라고 해 봤자 윌로우 아니면 힐두르일 텐데, 아마도 높은 확률로 힐두르가 범인이겠죠. 아,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다 알게 되면 나중에 힐두르를 잡기 어려워질 것 같아서 없지는 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일단 에흐테를 한번 꺼내 볼래요, 오리 님? 저주가 풀릴지도 모르니까요.”

희연으로서는 전혀 생각 못 했던 타개 방법의 등장이었다. 그녀는 제 소중한 유니콘에게 그런 능력도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에흐테를 소환했다.

낡은 집과 어울리지 않는 자태를 뽐내며 소환된 에흐테는 금빛 뿔을 빛내며 희연에게 고개를 숙였다. 효과가 있나 싶어 입을 연 희연은 한숨을 내쉬며 조금 전 했던 말을 반복했다.

“임금님 귀 당나귀 귀….”

“이런 방식으로는 저주가 안 깨지나 보네요.”

“킹 님은 천재…! 요리왕 으읍으!”

“저주 참 이상하게도 걸어놨네. 그래도 알게 된 점은 있네요. 부정일 경우에는 아예 입을 틀어막고 긍정일 경우엔 힐두르라는 단어만 말 못 하게 하는 것 같은데.”

킹스메이커가 저주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희연은 내심 안도감을 느꼈다. 말 못 하는 이 상황에서 그래도 누구 하나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비웃듯 윌로우 농장의 사건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단 힐두르가 수상한 건 사실이니…, 어?”

“킹 님!”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점차 점차 범위를 넓히더니 곧이어 방 전체를, 아니 창밖에 보이는 농장 전체를 감싸 안았다. 암흑으로 물든 세상에 당황한 희연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킹스메이커가 서둘러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오리 님,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바로 옆에 무엇이 있는지 안 보일 정도로 짙은 어둠이었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마저 어둠에 잡아먹힌 것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