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들리는 것은 손을 잡은 상대의 말소리, 숨소리 같은 것들뿐. 그들에게 다행인 점은 얼마 안 있어 에흐테의 뿔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옆에 있는 상대의 얼굴 정도는 식별할 수 있게 된 뒤에야 희연과 킹스메이커는 입을 열었다.
“여기는 해가 지지 않는 곳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왜….”
“날이 지기 전에…. 힐두르가 쓰러졌을 때 윌로우에게 그런 식으로 말했었죠? 날이 지기 전에 어서 일해야 한다는 식으로요.”
희연 또한 가졌던 의문이 킹스메이커의 입에서도 흘러나왔다. 두 사람이 고민하는 사이 마침내 알 수 없는 어둠이 걷히고 태양이 떠올랐다.
빛에 적응하느라 손을 들어 눈을 비빈 희연은 곧바로 창가 쪽으로 가 바깥의 상황을 훑어보았다. 킹스메이커 또한 그런 희연을 따라 함께 바깥을 확인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보게 된 광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인 상황이었다.
“밭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희연과 킹스메이커가 열심히 일하던 밭이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기름기 가득했던 땅은 흉해 보일 정도로 갈라졌고 이슬을 머금었던 싱싱한 작물들은 모두 말라비틀어졌다. 저 멀리 보이는 하얀 덩어리들은 농장의 가축들인 듯 보였지만 움직임이 없었다.
그 잠깐 사이의 농장의 모든 것이 죽은 것이다. 방음이 좋지 못한 집안에 떠나가라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을 것이다.
“아이고! 또, 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윌로우…!”
킹스메이커는 곧바로 희연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낡은 계단이 삐꺽 삐꺽 불안한 소리를 냈지만 윌로우의 울음소리보다 서럽지는 못했다.
“신관님! 신관님!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매일매일 이러니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농작물이 죽고, 땅이 죽고, 가축들이 죽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윌로우는 조금 전 힐두르가 그랬던 것처럼 헬르벨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게 서 있던 뉴비 없지는 계단을 내려오는 그들을 발견하자 간절하다 싶을 정도로 외쳐댔다.
“킹-! 킹! 킹! 킹! 킹! 뭔데! 뭔 일인데! 방금 뭔데!”
그의 우렁찬 목소리는 주저앉아 울던 윌로우의 눈물마저 쏙 들어가게 했다. 아니, 그는 우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희게 질린 상태였다.
그 상태를 제일 먼저 눈치챈 것은 희연이었다. 뒤늦게 뉴비 없지로부터 눈길을 돌린 킹스메이커 또한 윌로우의 상태를 눈치챘다.
“윌로우?”
“왜, 자네들끼리만 내려오나? 힐두르는?”
“일한다고 아까 나갔는데요.”
“아, 안돼…. 힐두르! 힐두르!”
윌로우는 끔찍한 일을 목도한 것 같은 얼굴을 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뉴비 없지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어…. 따라가야 하나?”
“길마님.”
“응?”
“…길마님이랑 채팅이 안 돼.”
킹스메이커의 말에 뉴비 없지와 희연 둘 다 굳어버렸다. 현재 저주 탓에 채팅이 불가한 희연과 달리 뉴비 없지는 곧바로 손을 들어 허공에 휘적거렸다.
“어라? 이게 왜….”
그의 반응을 통해 닉에게 정말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곧바로 윌로우의 뒤를 쫓아 달려 나온 그들은 앞서 나간 그를 앞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목장! 목장 어디야! 아까 양 돌보러 간다고 했잖아!”
“네가 맡은 마구간 쪽에 있겠지! 귀농 님한테도 그쪽으로 오라고 해!”
조금 헤매기는 했지만 평범한 농장주 윌로우보다는 충분히 빠른 속도였다. 중간부터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킹스메이커에게 업혔던 희연은 황폐해진 언덕에 다다라서야 그 등에서 내려왔다.
푸른 풀로 가득 덮였던 언덕은 어디 가고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이었다. 그 위에서 풀을 뜯어 먹고 놀던 양 떼 또한 보이지 않았다. 닉조차도.
그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희연의 후드 속에서 나온 악령이가 홀로 삭막해진 언덕을 걸으며 돌아다녔다. 뒤늦게 그런 악령이를 발견한 희연이 인형을 붙잡았다.
“가만히 있어. 위험한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저기 저기! 저기로 가! 저기에 있어!”
“뭐가 있다는 거야….”
“나쁜 드래곤!”
“!”
그 말에 희연은 곧바로 악령이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그곳 또한 언덕의 일부로, 다른 곳과 다를 게 없는 황폐한 흙과 부식된 바위뿐이었다. 악령이가 착각한 것이라 여기며 희연이 뒤를 돌리려던 그때였다.
먀-, 먀마-
“…루로?”
소리가 난 곳을 찾아 헤맨 끝에 희연은 갈라진 바위틈에 숨어 있던 루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내민 손에 냉큼 올라온 루로를 힘겹게 들어 올리자 어린 드래곤은 서러운 눈물을 뚝뚝 떨구며 품에 안겼다.
“킹 님! 루로 찾았어요!”
“루로? 걔가 왜 거기 있어요?”
희연이 루로를 찾는 동안 언덕에 도착한 윌로우의 멱살을 붙잡고 그가 숨기고 있는 게 없나 알아내던 킹스메이커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로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자 안심했는지 울음을 그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루로가 여기 있다는 건 길마님이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는 건데.”
“혹시 루로가 닉 님이 어디 갔는지 알지 않을까요?”
“글쎄, 아 잠깐…!”
킹스메이커가 희연과의 대화를 위해 잠시 내려둔 윌로우가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구덩이에 다다르자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힐두르! 힐두르 괜찮은 게냐! 힐두르!”
윌로우가 도망치는 줄 알았던 희연은 뒤늦게 생각난 힐두르에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이도 저도 못 하고 망설이던 그가 내려다보던 구덩이 아래에는 정신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는 힐두르가 쓰러져 있었다.
“…….”
“…이러면 많이 곤란한데.”
희연과 킹스메이커는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수상하다고 여긴 힐두르가 피해자가 되어 발견되었다.
***
다시 윌로우의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힐두르를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눴다. 주 내용은 당연하게도 그들이 직접 보고 겪은 기이한 현상에 관해서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랬는지는 콕 집어서 말할 수가 없다네. 이 불행은 말 그대로 갑자기 시작되었어.”
윌로우는 우느라 시뻘게진 얼굴을 추스르지 못하고 고해하듯 헬르벨의 두 손을 꼭 부여잡으며 이야기했다.
“해가 지지 않는 이 농장에 어둠이 찾아오면, 목동들이 사라진다네. 언제 어느 때라고 말할 수가 없어. 나도 언제 어둠이 찾아올지 모르니 말이네. 그저 어두워지기 전에 일을 끝내는 게 언제나 최선이었지.”
“그러면 목동들이 사라지고 일꾼들이 도망갔다는 건….”
“목동의 역할은 결국 누군가가 해야만 했고, 언제 자신이 목동 역할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일꾼들이 도망가기 시작했어. 결국 가정부로 일하던 힐두르가 그 일을 모두 도맡아 하기에 이르렀지.”
“힐두르는 그 일이 있기 전부터 있었나 보네요?”
“그렇다네. 벌써 5년은 넘었지. 이 이상한 저주가 시작된 지는 이제 1년이 다 돼가고.”
윌로우가 말을 이을수록 희연의 머리는 바쁘게 굴러갔다. 차라리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것과 동시에 힐두르가 등장했거나 힐두르가 온 이후로 기이한 현상이 함께했다면 간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윌로우의 말은 힐두르의 수상함마저 착각인 게 아닌가 고민하게 할 정도로 연관성이 떨어졌다. 희연이 고뇌에 빠진 사이 킹스메이커는 압박 면접을 하듯 윌로우를 몰아붙였다.
“그런데 힐두르는 길마님께 그 위험한 목동 일을 부탁한 거네요.”
“그건…!”
“덕분에 우리 길마님은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홀로 외롭게! 힘들게!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고요.”
“물론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한다네! 하지만, 그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었어! 목동 일은 결국 해야 했던 일이고…. 사실 먼저 나서서 도와주게 한 건 그 이방인이지 않았나…. 그리고 이방인들은 어차피….”
“입이 자유분방하시네? 입이라는 기관이 왜 머리에 달려있는지 잘 모르시나 보다. 그렇죠?”
“내가 실언했네!”
곧바로 윌로우의 멱살을 잡고 보던 킹스메이커는 이런 소모전은 의미 없다는 점을 스스로 상기하며 켁켁거리던 그를 결국 놔주었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사실 내가 자네들에게 부탁하고 싶었던 건 농장 일이 아니었네. 이 농장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랐어.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도망부터 갈까 싶어서….”
마침내 그가 솔직한 심정을 내뱉은 뒤에야 윌로우의 퀘스트는 갱신되었다.
[<???> : 퀘스트 내용을 갱신해 주세요.
‘그리움의 죄, 천진한 악랄함’]
[퀘스트 조건 : 퀘스트 내용을 갱신해 주세요]
[보상 : 퀘스트 내용을 갱신해 주세요.]
“?”
희연이 퀘스트 창을 보며 의아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자 옆에 서 있던 뉴비 없지가 작은 목소리로 귀띔을 해주었다.
“아직 우리가 숨겨진 퀘스트가 뭔지 제대로 찾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그가 설명하는 사이 윌로우와 힐두르를 어떻게 할까 고민을 끝낸 킹스메이커는 통보했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윌로우 당신과 힐두르가 의심스럽다는 점은 받아들이도록 하세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협조 감사하고 자, 일단 손부터 내밀어요.”
“…?”
윌로우는 얼떨결에 양손을 내밀었고 킹스메이커는 그런 그의 손목을 한데 모아 밧줄로 곱게 묶어주었다. 입을 쩍 벌리는 그에게 그녀는 퍽 다정한 어조로 설명해 주었다.
“수상하니까 일단 구속부터 해야죠.”
“이러고 일을 어떻게 하라는 겐가?”
“이 상황에서도 일을 하게요?”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지!”
그에게는 다행히도 킹스메이커는 그 점에 대해서는 인정해 주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수상한 인물 중 하나인 윌로우를 보내준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귀농 님 조금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이고 그럼요. 어차피 나는 농장 일 도우려고 왔던 건데요. 일단 윌로우? 같은 농업인으로써 이 일에 대해선 매우 유감입니다. 뭐가 됐던 일단 나는 나가서 죽은 땅이라도 좀 살려보도록 할게요.”
귀농의 말에 윌로우는 감동한 듯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한쪽에서 나름의 감동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와중에도 킹스메이커는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다.
“마법은 아닌 것 같고…. 저주의 조건만 따지면 힐두르가 수상한 게 맞는데, 이게 함정이면 사실을 윌로우가 수상한 게 되고 그것도 아니면 다른 제삼자가 범인이라는 건데.”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일단, 귀농 님은 혹시 모르니까 다른 곳은 다 가도 목동 쪽 일은 맡지 마세요. 없지없지가 귀농 님 따라가기로 하고. 오리 님은 헬르벨이랑 떨어지지 마세요. 여기, 루로도 데리고 가고. 윌로우는 나랑 같이 힐두르의 곁을 지킬 거예요.”
“킹 님?”
“일단 뭐라도 진행돼야 알 수 있으니까요. 최소한의 안전장치 겸 둘씩 있기로 하고 좀 흩어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 둘씩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빼버렸다는 점에서 킹스메이커가 얼마나 자신의 전투력에 자신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희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일단 윌로우의 집을 나왔다. 킹스메이커가 최소한 한 공간으로 인식되는 위치에는 있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뉴비 없지 또한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는지 영 탐탁지 못한 표정으로 귀농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애매한 길목에 서 있게 된 희연은 헬르벨을 돌아보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
“일단,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목동의 집으로 가보도록 하지.”
확실히 그곳이라면 무엇이든 단서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목동의 집이 어딘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 윌로우에게 물어봐야 하나 희연이 고민하는 사이 헬르벨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희연의 힘 스텟을 믿지 않아 임시로 헬르벨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루로가 재촉하듯 희연을 돌아봤다. 그 시선과 헬르벨의 당당함에 희연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일단 그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도 그는 뒤따르는 그녀를 확인하자마자 부가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저기 저곳. 저 나무집이 목동의 집이다. 내가 살던 고향에서도 마을의 양을 책임지는 목동들은 모두 저런 나무집에서 살았지. 북극성과 지팡이가 함께하는 목패가 그들의 상징이야.”
그의 말에 희연은 그제야 나무집에 매달린 목패의 그림을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 반짝이는 북극성과 그런 북극성 아래 사선으로 놓여 있는 지팡이가 새겨져 있었다. 윌로우는 나무집에 가지 말라고 했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 말을 일일이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냄새가….”
황폐한 땅을 지나 마침내 나무집 앞에 다다랐을 때 희연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부패한 것들이 한데 모인 것 같은 냄새가 꾹 닫힌 문 틈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긴장감으로 침을 꼴깍 삼키는 사이 어느새 한 손에 총을 든 헬르벨이 언제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준비를 하며 문을 활짝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