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뉴비 없지는 희연의 물음에 답해 줄 여유가 없었다. 그가 끄집어낸 성배가 눈부시게 빛나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희연이 그것을 의아하게 보는 것과 동시에 그는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고 지진에 대피하듯 몸을 웅크렸다.
“귀 막아요, 오리 님!”
먀아아아악-!
[<드래곤 피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필멸자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일대에 있던 모든 생명체가 최상위 종족이 주는 두려움에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근처 민가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 확률이 증가합니다!]
[어린 헤츨링의 드래곤 피어입니다. 잠들었던 드래곤들이 잠에서 깨어날 확률이 증가합니다! 대륙에 이로 인한 재앙이 일어날 확률이 증가합니다!]
“…….”
“길마님부터 찾아야겠네….”
순식간에 대륙에 재앙의 불씨를 피어 올린 루로는 아직까지도 먁먁 거리며 훌쩍이고 있었다. 희연은 그 모습에 루로가 울음을 그치기 전까지 재앙이 일어날 확률이 계속해서 올라가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을 했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피어에 직격당한 헬르벨과 힐두르는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귀에서 질척하게 흐르는 피를 통해 둘 다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 짐작 가능했다.
하지만 요정이 인간보다 튼튼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힐두르는 본능으로 덜덜 떨리는 몸을 무시하며 헬르벨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계하듯 바짝 힘이 들어간 날개가 다시 신비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번뜩이는 분홍색 눈이 헬르벨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희연은 곧바로 총을 들었다. 힐두르를 다치게 하지 말라는 시스템의 권고를 그녀는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애초에 희연은 누굴 봐주고 말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회개하세요>!”
“윽…!”
운 좋게도 스킬은 힐두르의 날개에 적중했다. 건방지기 그지없는 행태에 분노한 힐두르가 희연을 노려보기까지, 헬르벨에게 다시 공격할 기회를 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을지에 모두가 고민하는 그때였다.
므아-먁-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퍼지자 그곳에 있던 모두가 몸을 움찔거리며 행동을 멈췄다. 마치 평화의 상징처럼 울먹임 하나로 싸움을 멈추게 한 루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간절하게 무언가를 찾았다.
루로가 바라는 것이 자신의 테이머인 닉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조만간 다시 울기 시작할 거라는 것 또한. 희연이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대략적으로 상황을 살핀 뉴비 없지는 입을 털기로 마음먹었다.
“힐두르-!”
힘차게 이름을 부르는 뉴비 없지에게 힐두르는 돋보이는 인성을 보여주었다.
“건방진 이방인. 감히 내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그 입을 찢어버리기 전에.”
살벌하기 그지없는 반응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넵, 요정님! 미천한 인간 주제에 몇 말씀 나불거려보고자 하니 부디 경청해 주시길 바라옵니다!”
뉴비 없지가 힐두르의 신경을 긁는 사이 희연은 남들 모르게 루로 쪽으로 기어갔다. 뉴비 없지에게 정신이 팔린 힐두르와 달리 헬르벨은 그런 희연을 발견했다. 그는 뭐하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희연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혹여나 희연이 힐두르에게 걸릴까 노심초사하게 되는 것은 헬르벨의 몫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뉴비 없지는 친구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실현했다.
“자! 우리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지성인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무언인가 하니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만약 잠들었던 대륙의 드래곤들이 눈을 뜨게 된다면 뭐부터 할까요! 애 울린 종족부터 찾아가겠죠! 그렇게 종족의 멸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
그사이 루로에게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다다른 희연은 후드에서 악령이를 꺼내 앞으로 쭉 내밀었다. 얼떨결에 드래곤에게 제물로 바쳐진 악령이가 무슨 짓이냐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소용없었다.
먀?
이미 루로가 악령이를 발견한 이후였기 때문이다. 애착 인형을 끌어안듯 일단 악령이를 끌어안은 루로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똥말똥 희연을 쳐다보았다.
희연은 일단 재앙의 눈물을 그치게 했다는 점에 만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도 힐두르는 뉴비 없지의 말에 넘어가 희연의 존재를 눈치챘음에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우리 길마님은 드래곤 로드에게서 직접 드래곤 알을 부탁받은 테이머로서 자랑스러운 뉴비세스 1기, 가 아니라 어쨌든 드래곤들은 무조건 우리 길마님 편이다 이거죠!”
“…….”
“과연 당신을 포함한 요정들이 떼로 몰려드는 대륙의 재앙들을 막을 수 있을까요?”
“감히 나를 협박해…!”
“협박이 아니라, 이것은 협상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선택지 없는 둘이 대화하니 끝날 생각을 안 했다. 어쩌면 중재해주지 않을까 했던 헬르벨도 방아쇠 위에 올려놓은 손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았으므로 희연은 목숨 걸고 대화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저기, 뭐가 됐든 빨리 해결 안 보면 루로가 다시 울지도 몰라서요….”
“…….”
“…….”
간신히 진정하고 악령이를 입에 넣고 깨무는 루로가 이대로도 울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희연은 살려달라는 듯 손을 뻗는 악령이를 애써 외면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일단… 닉 님이랑 킹 님은 무사한 거죠?”
“하찮은 당신의 말이나 들어주려고 내가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하찮은 저의 질문에 답해주지 않으면 살아 있는 대륙의 재앙 아기 드래곤 루로가 울지도 몰라요.”
“…무사합니다. 애당초 이방인은 적절한 제물이 아니었으니까요.”
“제물?”
“…….”
“혹시 요정 왕한테 바치는 제물인가요?”
희연은 짐작할 수 있는 제물의 주인은 <요정과 목동>의 보상 목록에 적혀 있던 요정 왕뿐이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당연한 도출의 결과였지만 힐두르는 그녀의 입에서 요정 왕이 거론되었다는 점에 크게 분노했다.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이런 추잡스러운 일에 그 이름을 엮지 말란 말이야!”
“어….”
“흐윽! 나의 듀이, 아… 가여운 내 아이들!”
갑자기…?
희연은 주저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하는 힐두르를 황당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약간 억울하기까지 한 마음을 담아 뉴비 없지에게 물어보았다.
“제가…그렇게 크나큰 말실수를 한 건가요? 펑펑 울게 만들 정도로…?”
“어…, 그것보다는 나의 듀이라는 말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
뒤늦게 그 점에 대해 상기한 희연은 ‘나의’라는 말이 붙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실 아이들이라는 단어도 나왔기에 결론은 하나였다.
“힐두르. 요정 왕이랑 무슨 관계에요?”
“…내 사랑. 다시 그 눈으로 나를 봐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불쌍한 내 아이들도, 나의 사랑도 모두가 내 고향에 있는데… 왜 나는….”
똑똑 떨어지는 요정의 눈물이 닿은 마른 바닥에 풀잎이 자라기 시작했다. 킹스메이커가 봤다면 신나서 시약병을 들이밀었을 거라 생각하며 희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힐두르는 싸울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저 자신의 억울한 마음을 토로하듯 주저리주저리 말을 내뱉었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인간의 피 따위 손에 묻히고 싶지 않았다고! 하지만….”
“힐두르?”
“그렇다고 해서 기회를 놓칠 수도 없는 거잖아요…”
“…야!”
힐두르는 퍼뜩 고개를 들더니 곧바로 헬르벨의 목을 움켜쥐었다. 힐두르가 헬르벨의 입안에 무언가를 욱여넣는 것과 동시에 세상을 덮던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암흑이 오갔던 지난번과는 달랐다. 마치 새벽에 동이 트듯 태양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힐두르는 사라지는 어둠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헬르벨의 붙잡고 날아올랐다.
힐두르의 급작스러운 행동에 반사적으로 소리부터 질렀던 희연은 곧바로 에흐테를 타고 그들을 쫓아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뉴비 없지도 서둘러 그 뒤를 따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어…탈 거 없는데.”
킹스메이커의 마법 혹은 탈것에 의지해 자신의 탈것은 길드 성에 두고 다니던 그에게는 당장 하늘을 나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루로가 다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오, 오리 님 잠깐….”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힐두르와 희연은 이미 저 멀리 가 버린 뒤였다. 희연이 뒤늦게 뉴비 없지가 따라오지 않았다는 점에 당황에 뒤를 돌아봤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처연하게 손을 흔드는 것밖에 없었다.
희연은 설마 자기 혼자 힐두르를 쫓게 될 거라고는 예상 못 해 잠시 당황했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자신 없다고 되돌아가 뉴비 없지를 태우고 올 수는 없었다.
바로 그때, 얼떨결에 아직까지도 그녀가 들고 있던 보석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목동의 별> : 목동이 목동에게, 그리고 그 목동이 또 다른 목동에게 물려주는 그들만의 보물이다. 두려움에 떨다 끝내 목숨을 잃고 만 목동들의 한이 서려 있다. 보석에 담긴 염원은 자신들의 억울한 죽음의 의문을 풀어 줄 사람에게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목동의 가호가 내려집니다!]
파삭-
보석은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가루가 묻은 손부터 시작해 서서히 희연의 몸이 반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에흐테의 몸까지 반투명해진 순간, 헬르벨을 붙잡고 날갯짓하던 힐두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
형형한 분홍색 눈동자에 그녀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그러나 분명 그녀 쪽을 보았음에도 힐두르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바로 했다. 희연은 방금의 일이 목동의 가호 덕이라는 걸 깨달았다.
“투명화 같은 건가?”
이전 달빛 요람에서 사용했던 산골 꼬마 요정들의 스킬과도 비슷했다. 그때의 경험을 살려 최대한 기척을 죽인 희연은 기회를 노리며 힐두르를 쫓았다.
힐두르가 헬르벨을 붙잡고 지나가는 곳은 그녀에게 낯설지 않은 곳들이었다. 저 멀리 그들이 잠시 머물렀던 오두막이 보였다. 어느새 하늘은 새벽빛을 띠며 두 개의 구체를 거닐었다. 그녀가 본 곳 중 가장 기이하고도 신비로운 장소.
“해의 동쪽, 달의 서쪽에 있는 성….”
산맥과도 같은 성 주위를 맴돌던 힐두르가 어느새 성벽과 뒤엉켜 있던 어느 절벽에 다다랐다. 거대한 우물처럼 입을 쩍 벌린 절벽의 아래로 내려간 힐두르는 유난히 커다랗고 매끄러운, 절벽에 튀어나온 돌이라고 하기엔 인위적인 모양의 돌 앞에서 날갯짓을 멈추었다.
힐두르는 그 돌에 헬르벨을 묶었다. 가까이 가지 않고 그 행위를 지켜보던 희연은 몸을 묶은 사슬이 끊어지면 절벽으로 곧바로 떨어질 헬르벨의 모습이 상상되어 목 뒤가 서늘해졌다. 절벽에 부딪힌 목소리가 웅웅 거리며 희연의 귀에도 닿았다.
“죄송합니다, 신관님. 당신께선 제게 말했죠. 홀로 남아 불행하기만 할 자신의 모습이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외면치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아니에요.”
“…….”
입에 침묵의 굴레가 묶인 헬르벨은 노려보는 것 외엔 답을 할 수 없었다. 힐두르는 눈물로 반짝이나 여전히 형형한 눈으로 헬르벨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목 위를 뾰족한 손톱으로 지그시 눌러 피를 보게 했다. 헬르벨의 피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힐두르는 두 손을 맞잡으며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제발! 이번에는 부디….”
마치 그 말에 응답하듯 돌 위로 신비로운 빛을 흘리는 덩굴무늬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힐두르는 기뻐하는 마음을 차마 다 지우지 못한 모습으로 헬르벨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날개를 접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힐두르에게선 두려움의 기색이 엿보이지 않았다. 그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헬르벨은 잠시 숨을 고르다 곧바로 몸을 비틀었다.
입을 틀어막은 굴레와 달리 몸을 묶은 사슬이 조금 느슨한 편이었기에 가능한 과감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잘못했다간 무게를 견디지 못한 얇은 사슬이 끊어져 절벽 밑으로 떨어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느라 멀리 있던 희연은 겁도 없는지 묶인 몸을 바르작거리는 헬르벨의 모습에 기겁해 서둘러 그의 곁으로 날아갔다.
“제가 풀게요. 가만히 있어요!”
절벽 밑을 바라보는 쪽에서 그 반대쪽으로 몸을 비트는 것까지 성공했던 헬르벨은 그의 등을 받치는 손길에 내심 안도하며 몸을 움직이던 것을 멈추었다. 그 또한 이 상황에서 사슬이 끊어진 다음 절벽 위를 오르는 것까지는 자신이 없었다.
희연은 사슬이 풀리자마자 그가 떨어질 것을 생각하며 움직였다. 한 손은 그의 등을 바치고 에흐테에게는 최대한 그와 가까이 붙을 것을 명령했다.
인벤토리에서 이전에 쓰던 단검을 꺼낸 희연은 그것을 얇은 사슬 사이로 집어넣었다. 목걸이에 쓰이는 줄만큼이나 얇은 사슬이었기에 충분히 끊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 이게 왜….”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끈이 끊기질 않자 희연도 헬르벨도 인상을 찡그렸다. 헬르벨은 힐두르가 순수히 자신을 묶어두고 간 이유를 깨달아서였고 희연은 이번에도 제 힘 스텟이 혹시?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