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결국 칼로 끊는 건 포기하기로 한 희연은 사슬의 고리라도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에흐테를 타고 올라가 돌 위로 발을 내린 희연은 생각보다 매끄러운 재질에 조심조심 몸을 낮추었다.
“에흐테, 헬르벨 바로 아래 있어야 해.”
헬르벨 정도의 민첩과 힘이면 떨어지는 순간 곧바로 에흐테를 붙잡고 그 위로 올라탈 수 있었다. 고개를 내밀어 헬르벨 바로 아래 에흐테가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한 희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의 끝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니 남은 문제는 희연이 사슬을 풀 수 있는가, 없는가였다. 만약 힐두르만 풀 수 있는 거라면….
[이름 없는 악령 : 너 그거 만지면 죽어.]
“아악!”
나름 긴장하던 상황에 갑자기 눈앞에 시스템 창이 띠롱 소리를 내며 떠오르자 희연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헬르벨이 위에 있을 그녀를 확인하려고 하는지 몸을 비트는 바람에 돌 위에 사슬이 드르륵거리며 움직였다.
“저 괜찮으니까 움직이지 마세요!”
일단 헬르벨부터 진정시킨 희연은 익숙한 시스템 창의 근원지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메리 인형은 보이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후드를 더듬은 희연은 마침내 잡힌 말랑말랑한 것을 끄집어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이름 없는 악령 : 나를 버렸어…, 나빠, 나쁜 드래곤보다 더 나빠….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루로에게 메리 인형 몸을 바치고 희연의 후드 사이로 도망 왔던 악령이는 훌쩍이며 자신의 서러움을 토로했다. 희연은 양심이 찔렸기에 일단은 한 손으로 악령이를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그런데 만지면 죽는다는 건 무슨 소리야?”
[이름 없는 악령 : 훌쩍…, 내가 봤으니까. 옆집 엘본 오빠가 죽었어. 방앗간 집 마리엔 누나가 죽었어. 나도 죽었지. 그래서 나는 보았어. 피리 부는 마법사는 언제나 우리에게 말했어. 자, 말 안 듣는 아이들은 요정이 벌을 내릴 거야. 목걸이, 팔찌, 사슬. 몸에 감기면 모두가 깊은 잠에 빠졌어.]
“…그 마법사가 저 사슬을 사용했어?”
악령이는 희연의 질문에 작은 몸을 꾸벅꾸벅 움직였다. 그녀는 그제야 사슬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 어두컴컴한 이야기와 엮어있다고 보기에는 믿기 힘든 물건이었다. 중간중간 꽃 모양의 체인이 이어진 얇은 사슬은 당장에 장식으로 써도 손색없을 물건이었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희연은 손을 뻗어 사슬을 붙잡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 봐. 멀쩡하지?”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았던 악령이는 희연의 모습에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웃는 모습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희연은 팔에 힘을 주었다. 역시 끊기지 않는 사슬에 속으로 혀를 차며 악령이에게 물었다.
“이 사슬을 끊어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
[이름 없는 악령 : 응. 나 할 수 있어.]
악령이는 스르륵 움직이더니 희연이 잡고 있던 사슬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그러자 마치 산성에 녹는 것처럼 사슬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촤르륵 소리 내며 풀리는 사슬을 붙잡은 희연은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일단 인벤토리에 쑤셔 넣었다.
그사이 에흐테의 위에 무사히 올라탄 헬르벨은 힐두르가 입안에 쑤셔 넣다시피 했던 굴레를 거칠게 벗어던진 뒤 그녀가 있는 돌 위로 올라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아직까지도 방울방울 피가 흐르는 그의 팔은 이전, 자미엘로 인해 크게 다쳤던 그 팔이었다. 걱정되어 자세히 살피는 그녀를 알아챈 헬르벨은 옷 소매를 내림으로써 시선을 차단했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거지?”
“그게….”
헬르벨의 신병을 확보했고, 힐두르는 현재 부재중이었다. 현재 가장 안전한 선택지를 고르라고 한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이대로 돌아가는 거였다.
하지만 여전히 킹스메이커와 닉을 찾지 못했고 그 둘을 찾기 위해서는 퀘스트를 진행해야만 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이다음 퀘스트 진전을 위한 방법은 힐두르가 사라진 저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거였다.
희연이 절벽 밑을 살피며 헬르벨이라도 에흐테의 등에 태워 돌려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실전도 나쁘지는 않지.”
“…네?”
헬르벨이 예고도 없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가 절벽으로 떨어지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며 구해낸 희연으로서는 어처구니없는 결말이었다.
“아니….”
고민한 의미가 없어져 당황하던 그녀는 일단 에흐테의 소환을 취소시키고 악령이를 잘 챙긴 뒤 헬르벨의 뒤를 따라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전에 한번 비슷한 짓을 해봤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특수지역 <요정의 성 오미크론>으로 입장합니다.]
초원에 선 희연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헬르벨의 뒤로 펼쳐진 분홍빛, 하늘빛, 보랏빛, 온갖 신비로운 빛깔로 물든 숲과 그 숲에 둘러싸인 위용 넘치는 궁전의 모습에 눈을 빛냈다.
“와….”
“쉿.”
곧바로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한 헬르벨은 고갯짓으로 꽃들 사이사이 날아다니는 손가락 크기의 작은 요정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희연과 헬르벨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목동의 가호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눈치챈 희연은 조심조심 움직여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숲길로 몸을 숨겼다.
“픽시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해라. 침입자들을 발견하자마자 페어리들을 부르려고 할 테니까.”
“픽시? 페어리? 요정 말하는 거 맞죠?”
“힐두르와 같은 종족이 페어리, 조금 전 보았던 것이 픽시다. 요정은 세 부류로 종족이 나누어지지. 자세한 건 나중에 마법사에게 듣도록 해.”
당장에 그녀에게 요정에 대한 것을 줄줄이 설명해 주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다른 요정들의 눈을 피해 힐두르를 찾기로 한 그들은 힐두르가 있을 만한 곳을 예상했다.
“역시 저 성에 있겠죠? 힐두르는 요정 왕이랑 연관된 것 같으니까….”
“어쩌면 본인도 요정 왕일지도 모를 일이고.”
“힐두르가요?”
그전에 ‘본인도’라는 것은 요정들의 왕은 둘 이상이라는 뜻이 된다. 희연의 의문에 요정들의 문화에 대해 대충 넘기려고 했던 헬르벨은 대략적인 사실은 설명해 주어야 했다.
“네가 요정 왕을 언급했을 때 자신의 연인을 부르듯 애틋하게 굴었지. 왕의 연인은 또 다른 왕이다. 그러니 힐두르 또한 요정 왕이라고 볼 수 있어.”
“그런데 왜 밖에서 가정부 겸 농부 겸 일꾼 겸 목동이 돼서 홀로 고된 노동을…?”
왕의 역할은 높은 곳에 앉아 눈에 닿지 않는 곳까지 다스리는 거다 힐두르처럼 일하면 일단 왕의 역할이 불가능하게 된다.
희연은 곰곰이 힐두르에 대해 생각했다. 퀘스트의 두 번째 조건은 힐두르의 저주 풀기. 저주에 걸린 요정 왕이 농장의 일꾼이 되었다? 하지만 노동하는 저주 같은 것이 있을까?
“…….”
그녀는 함께 걷고 있던 헬르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풋낯의 죄인. 그리고 악마와의 내기, 경험치 습득 불가, 침묵의 단죄. 희연이 아는 특이한 저주만 해도 네 개였다. 노동만 해야 하는 저주가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희연이 홀로 결론을 내리는 사이 헬르벨 또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입에 담았다.
“이상한 점은 힐두르가 요정 왕이라고 할 시 인간계에 있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야. 요정 왕은 죽을 때까지 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선 안 되며, 언제나 둘이어야 하지. 왕의 후계는 반려를 맞을 때까지 왕의 이름을 받지 못할 정도야. 그런데 왜….”
“…….”
고민하는 헬르벨의 모습을 바라보며 희연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바탕 싸웠음에도 그가 힐두르에게 별 유감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서로가 다른 것을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그들은 숲의 출구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소리 내면 안 된다는 주의사항을 나누고 조심히 발을 놀렸다. 헬르벨이 잘 따라오나 뒤돌아봤던 희연은 소리도 없이 총의 장전까지 마친 그의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요정 세계의 이변이 걱정되는 것과 경계심은 별개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총을 꺼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헬르벨처럼 소리 없이 장전하는 재주는 없었다.
요정 왕의 성은 커다란 호수 위에 세워져 있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름답다는 것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 못 할 사실이었다. 신기한 점은 수면에 비친 성과 실제 눈으로 보는 성의 모습이 달랐다는 점이다.
분홍색 광택이 도는 진주색의 성은 설탕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반짝이고 오로라를 지붕 삼았으며 벽에는 구름을 장식했다. 구름 사이로 총총히 튕기는 별 조각은 알록달록한 별사탕을 떠올리게 했다. 그 모습은 왕의 성이라는 위엄보다는 아이들을 위한 보기 좋고 예쁜 장난감 왕국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수면에 비친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깨끗하다고 생각했던 물은 가까이 다가가자 진실을 드러내듯 붉게 물들었고 수면에 비친 성 또한 새까맣게 타버린 듯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성안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은 낯설지 않은 모습을 띠고 있었다.
“악령?”
바로 희연이 끌어안고 있던 악령이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실제의 성을 보았다. 그곳에선 수면에 비친 악령의 흔적 따위 찾을 수 없었다. 헬르벨 또한 희연과 같은 것을 보았는지 자신이 생각한 것을 일러주었다.
“사라졌다는 목동들인 것 같군. 이 호수에 그들의 원한이 묶여…, 왜 그러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는 희연을 본 그가 물었다.
“그게, 제가 악령이 잘 꼬이는 체질이라….”
그녀는 악령이와의 만남에서 <죽은 자의 이야기> 업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분명 악귀가 잘 달라붙는다는 류의 경고도 함께였다. 그렇다는 건 그녀가 호수에 가까이 가는 순간 피아식별을 못 하는 상태인 저 악령들에게 붙잡혀 호수로 끌려갈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헬르벨은 희연의 말에 황당하다는 듯 반문했다.
“악령이 잘 꼬인다면서 흑마법사와 함께 다니는 이유를 모르겠군.”
“…킹 님이랑 같이 다니면 악령 꼬여요?”
그는 손을 들어 그녀가 안고 있는 악령이를 가리켰다.
“얘는 킹 님 때문에 만나게 된, 게 맞기는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저와의 개인적인 만남인데….”
“그 숲에 있었을 때, 흑마법사가 내 거처에 드나드니 주변에 있던 악령이 모여들게 된 거다.”
“아.”
생각도 못 한 진실에 충격받은 희연이 악령이를 추궁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이 헬르벨은 정화석을 만들어 호수 위로 던지기 시작했다. 호수에 잠기면서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정화석을 발견한 악령이는 희연과 눈싸움하던 것을 멈추고 다시 후드 속으로 도망쳤다.
“총.”
“네!”
뒤늦게 총을 꺼내든 희연은 헬르벨이 수면 위에 성을 향해 자신의 무기를 겨누는 것을 보며 눈을 떼지 않았다. 이전에도 보았지만 같은 스킬이라 할지라도 누가 사용하냐에 따라 그 위엄이 달랐기 때문이다.
자잘한 물방울을 튕기며 조용히 쏟아지는 하얀 총알의 비 사이로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는 악령들은 일제히 요정의 성을 가리켰다. 마치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존재가 저곳에 있음을 그들에게 말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조용히 들어가긴 글렀군.”
끼에에에엑-!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헬르벨의 말을 증명하듯 악령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최대한 힘껏 끌어모아 외치며 사라졌다. 희연과 헬르벨을 넘어 성안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다른 요정들 모두를 불러올 정도의 소음이었다.
“침입자다! 잡아라!”
“악령들이 사라졌다! 누군가 그들을 해방시켰어!”
[다수의 존재가 당신의 존재를 인식했습니다! <목동의 가호>가 풀립니다!]
“어그로를 끌고 가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미 끌린 어그로, 이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희연은 곧바로 에흐테를 꺼내 헬르벨의 팔을 붙잡았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어요, 헬르벨. 성에 몰래 들어가는 건 불가능할 것 같으니까 힐두르를 성 밖으로 나오게 만들도록 해요!”
“어떻게 하려는 거지?”
그가 에흐테 위로 잘 자리 잡은 걸 확인한 희연은 인벤토리를 뒤져 이전 킹스메이커가 주었던 암녹색 보석을 끄집어냈다. 윌로우의 비명에 서둘러 돌아갈 때 킹스메이커가 안전장치로 쥐여주었던 보석이었다.
[<공기와 보호와 영광의 에메랄드(제작자 – 21세기 킹스메이커)> :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자들의 위대한 산물 중 하나이다. 지니고 있는 자를 보호하며 주문 시 20초간 부유할 수 있게 해준다.
주문 : 날아라!]
“저도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성을 부술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