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
“훌쩍….”
“자, 우리 착한 요정님? 아, 픽시라고 부르랬나. 어쨌든 그렇게 울고만 있을 거면 날개에서 떨어지는 꽃가루 좀 여기다가….”
“울리지 마세요….”
“내가 울린 건 아닌데요?”
“…….”
닉은 손을 뻗어 훌쩍이던 픽시를 잡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픽시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머리카락 사이에 숨었다. 그런 식으로 그의 곁에 떠도는 픽시의 수만 여덟이었다.
킹스메이커는 그 모습을 보며 맥 빠진 듯 한숨을 내쉬며 꽃과 넝쿨로 만들어진 안락의자 속에 몸을 묻었다.
“우리 오리 님은 지금쯤 어디까지 퀘스트를 깼을까요? 힐두르가 범인이라는 건 확실해졌으니 이제 여기까지 오기만 하면 되는데….”
기껏 순순히 납치당해 주었더니 자신을 냅다 절벽으로 던졌던 힐두르를 떠올린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협조적으로 굴어줬더니 상대가 비협조적으로 나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와 달리 평화롭게 양을 치다 납치당했던 입장인 닉은 그저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홀로 남아 울고 있을 루로가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이유로 어서 이 퀘스트가 진행되기를 바라던 그때, 그런 바람을 이루어주듯 굉음과 함께 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쾅-! 쾅쾅-!
“…?”
머리로 떨어지는 설탕 조각 같은 천장 자재를 손으로 치우며 킹스메이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닉의 머리카락에 숨어 있던 픽시들이 사방팔방 어지럽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세요, 마법사님!”
“저희가 잘못했어요, 마법사님!”
“내가 한 거 아닌데?”
용기 있는 픽시들이 킹스메이커에게 날아와 훌쩍였지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마법사-! 지금 당장 이 행패를 멈추세요!”
“나 아니라니까.”
농장에서와는 달리 온갖 보석과 귀한 것들을 치렁치렁 매단 힐두르가 나타나 그녀에게 무어라 했을 때도, 킹스메이커는 같은 말만 해주어야 했다. 정말로 이번 건 그녀가 범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니면 누가 저 거대한 나무를 허공에 띄워 우리의 성을 부순단 말인가요!”
“나무?”
힐두르의 말에 킹스메이커와 닉은 그제야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바깥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감금당한 방은 요정의 성 중 가장 왼쪽에 있는 탑루. 그리고 거대한 나무가 타격하며 부수는 것은 성의 중앙이었다. 고개를 내밀자마자 튼튼한 거목이 성을 부수는 걸 본 킹스메이커는 가벼운 호응을 내비쳤다.
“와, 멋지네.”
“마법사!”
“그런데 힐두르, 착각했어요. 내가 이 성을 부수고 싶었다면 저런 손 많이 가는 방식이 아닌 안에서부터 다 터트리는 식으로 했을 거예요. 고로 저건 내 마법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일을 벌인 사람은….
힐두르를 상대하면서도 신경은 바깥에 쏠려있던 킹스메이커의 귀에 닿은 것은 닉의 목소리였다.
“또….”
“또?”
쾅-!!
그녀가 되묻는 것과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중앙의 벽이 허물어졌다. 간 보듯 살짝씩 벽을 공격하던 거대한 나무가 성 위로 툭 떨어진 것이다.
“아, 내가 준 마법석!”
어떻게 저 나무를 허공에 띄었을까 하던 의문이 풀려 그녀는 밝게 웃음 지었다. 시야를 가리던 거목이 사라지니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는 유니콘이 보였다.
킹스메이커는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망원경을 꺼내 에흐테의 위에서 자잘하게 공격하는 픽시들을 손으로 밀어내는 희연을 살폈다.
희연은 픽시들의 공격은 대충 맞아주다가 자신과 크기가 비슷한 요정족인 페어리가 창을 들고 가까이 가자 총으로 머리를 후려치고 있었다. 헬르벨이 그런 그녀에게 무어라 말하자 그제서야 원딜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요술을 펼치는 페어리의 날개를 정확히 맞추는 것까지 확인하고 망원경에서 눈을 뗀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기울이며 이상한 점을 짚었다.
“없지가 왜 없지…?”
탱커 없이 힐러 둘이서만 싸우고 있던 것이다.
***
“저리 가! 훠이훠이!”
마치 날파리를 쫓아내는 것처럼 손을 휘저어 픽시들을 물리친 희연은 어느새 바짝 다가온 녹색 머리의 요정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녀의 공격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눈이 부시다는 부과 효과 덕에 실질적 딜러 역할을 하는 헬르벨의 보조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보석은?”
“다시 사용하려면 5분은 기다려야 해요!”
희연은 이렇게까지 성을 부술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거목의 속이 꽉 차 생각보다 무거웠으며, 요정의 성은 부실 공사였다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성의 중앙을 완전히 박살 낸 희연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피해에 이것이 바로 <보금자리 파괴범>의 힘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찌 됐든 이목은 확실히 끌었으며 성안에 살던 요정들을 밖으로 부르는 것까지도 성공했다. 이제 힐두르까지 나와주면 되었다.
“아니야! 먹지 마!”
[이름 없는 악령 : …퉤.]
도와준답시고 가까이 온 픽시를 냅다 입에 넣는 악령이까지 통제하며 요정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정, 그중에서도 페어리는 고대 종으로서 그 긴 시간 동안 극소수임에도 종족을 유지했을 만큼 최상위 포식자에 속하는 고위 종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유능했으면 강인했다. 희연과 헬르벨이 큰 타격 없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명백히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노골적이었기에 그들 또한 왜 자신들을 봐주는 건지 의문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요정들이 희연과 헬르벨을 봐주되 대화할 의지는 없어 애매한 대치 상태만 이어질 뿐이었다.
후웅-!
“와악-!”
바로 코앞에 스치고 지나간 창이 묵직한 바람 소리를 내었다. 놀란 희연이 뒤로 넘어지는 것을 헬르벨이 붙잡았다. 동시에 조금 전 희연의 공격에 날개를 맞았던 페어리가 곧바로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에흐테는 낯선 요정을 경계하는 몸을 비틀었고, 공격을 피하던 두 사람은 중심을 잃었다. 그 결과 희연과 헬르벨을 그대로 추락해 호수에 빠지게 되었다.
귓속을 가득 채우는 물 기포 소리에 눈을 뜬 희연은 주변을 둘러보며 헬르벨을 찾았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물살을 헤치고 총알 한 발이 날아들었다. 그 궤적을 쫓아 고개를 든 희연은 자신에게 올라오라 손짓하며 헤엄치는 헬르벨을 발견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 뒤를 따르려고 했다. 함께 떨어진 악령이가 그녀에게서 벗어나 호수의 밑바닥 쪽으로 가지 않았다면 말이다.
“?”
[이름 없는 악령 : 여기에 있어….]
악령이는 아무것도 없는 호수의 밑바닥에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희연은 슬슬 숨이 막혀옴을 느꼈지만 헤엄치던 방향을 악령이 쪽으로 바꾸었다. 그녀는 내심 걸리는 것이 있었다.
힐두르가 사용한 사슬을 보며 반응한 악령이와 수많은 악령들이 잠들어 있던 이 호수.
햇빛이 투과해도 호수의 밑바닥은 어두웠다. 희연이 악령이의 곁으로 다가갔을 때 그 어둠에서 보이는 건 희미하게 녹색으로 반짝이는 무언가뿐이었다. 그녀는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지 않고 일단 손으로 잡고 보았다.
악령이까지 잊지 않고 챙긴 뒤에야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최선을 다해 위쪽으로 헤엄쳤다.
“헉! 허억….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간신히 수면 위로 목을 내민 희연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경계했다. 어찌된 일인지 당장에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던 요정들이 조용했다. 그녀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헤매는 사이 악령이는 꾸물거리며 그녀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일단 호수에서 헤엄쳐 나온 희연은 물에 젖어 눅눅하고 무거운 옷에 물기를 쥐어짜며 헬르벨을 찾았다.
“저, 저기… 인간님!”
“?”
조그마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희연이 발견한 것은 훌쩍거리고 있는 픽시였다. 바쁘게 날갯짓하는 날개에서 가루 같은 것이 홀홀 떨어지고 있었다.
“나 부른 거야?”
그녀의 물음에 픽시는 답하듯 날개를 더 빠르게 파닥거렸다. 희연이 보기에는 그 날갯짓이 퍽 힘겨워 보였다. 픽시가 작기는 했지만, 날개는 그보다 더 작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심히 손을 내밀어 손 위에 픽시를 올렸다.
날갯짓을 멈춘 픽시는 그 행동에서 그녀가 여느 마법사처럼 포악한 성격이 아니라는 점을 눈치챘다.
“마법사님과 힐두르 님께서 전하라고 하셨어요! 마법사님은 요들송이 들리면 몸을 낮추라고 전하라고 했고요!”
“요들송?”
“힐두르 님은 감히 요정의 성을 부수고도 당신이 무사할 줄 아…, 어라? 인간님 성을 부수셨나요?”
“…….”
픽시는 뒤늦게 배신감 서린 얼굴로 희연을 보았다.
“그러면 성의 중앙을 부순 범인이….”
“여기에는 깊은 사정이 있는데….”
변명은 듣기 싫다면 서럽게 훌쩍인 픽시가 희연의 손에서 도망가려던 그때였다.
“산골짜기 타고 흐르는 요를레이-히요이!”
낯설지 않은 요들송이 저 멀리서부터 울려 퍼진 것이다. 일단 도망가던 픽시와 악령이를 품에 끌어안고 전달받은 대로 몸을 낮춘 희연은 요들송에 이어 울려 퍼지는 굉음에 왜 킹스메이커가 그녀에게 그런 말을 전달했는지 깨달았다.
쾅-! 콰과광-!!
예술적인 폭발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듯 성이 연쇄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새까만 불길이 일어 잔해를 삼키고 다시 폭발이 일어나고, 성이 무너지고 재가 되고. 마치 자비를 베풀듯 성의 3분의 1 정도만 남고 나서야 그 폭발을 끝맺었다.
호수의 중앙을 메워 그 위에 성이 세워졌기에 물에서 갓 빠져나온 희연은 폭발의 현장과 제법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 열기가 얼굴에 닿았고 건물의 잔해가 발치로 떨어질 정도로 폭발의 위력은 강력했다.
“와….”
재가 되어 바람에 사라지는 성의 모습을 바라보며 희연은 반짝이는 설탕공예 같았던 모습을 회고했다.
“성이….”
[이름 없는 악령 : 성이….]
픽시와 악령이 또한 눈앞에서 벌어진 참극이 충격인지 말을 잇지 못했다. 희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무너진 성의 잔해에 떡하니 발을 올리고 서 있는 킹스메이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앗! 오리 님 찾았다!”
그녀는 품 안 가득 진한 보랏빛의 마름모꼴 보석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희연은 그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마법사인 그녀가 들고 있을 만한 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폭탄….”
폭탄 테러범이 된 킹스메이커의 뒤에는 닉과 헬르벨이 함께 하고 있었다. 희연은 그들 주변에 흐트러진 나무줄기를 통해 닉이 헬르벨을 폭발로부터 보호하고 있었음을 눈치챘다.
어찌 됐든 간에 일행의 무사함을 확인한 점에 내심 안도하던 그녀는 곧이어 느껴지는 오싹함에 다시 몸을 긴장시켰다. 악마와 요정 같은 고대 종을 앞에 둘 때면 느끼고는 하는 감각이었다.
“감히….”
보석과 꽃으로 꼬아진 하늘색 머리카락은 그 색도, 장식도 모두가 무척이나 화려했지만 희연의 눈에 가장 띈 것은 바로 백색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왕관이었다.
은은히 빛을 내는 그 나뭇가지에는 아무런 장식물도 없었지만, 그 형이상학적인 모양새만 보아도 보통의 물건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즉, 헬르벨의 예상대로 힐두르는 정말 두 요정 왕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뜻이다.
성을 부순 사람만 둘이고 성 주인이 매우 분노한 이 상황에서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힐러 둘이서만 이 많은 요정을 상대하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어디서나 당당한 킹스메이커였다.
힐두르는 그런 킹스메이커의 말에 당장이라도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희연은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킹스메이커 쪽으로 발을 옮기려고 했다.
“인간님, 인간님! 저는 두고 가셔야죠!”
“아.”
희연의 품에 안겨있던 픽시의 외침에 힐두르의 시선을 그녀 쪽으로 움직였다. 분홍색 눈을 마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은 희연은 일단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성 부술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죄송합니다.”
그녀가 사과하는 것을 본 킹스메이커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희연에 이어 힐두르에게 사과했다. 단, 그 태도는 힐두르의 입장에선 여전히 건방졌다.
“잚탬슴다.”
“…….”
“하지만 애초에 그쪽이 우리를 납치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건 그렇지.
희연은 킹스메이커의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당당하게 굴기엔 힐두르는 너무 강했고, 그녀 자신은 약했기 때문이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킹스메이커의 목이라도 날려 먹을 것처럼 굴던 힐두르는 성의 없는 사과에 오히려 머리가 차갑게 식었는지 고요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마치 희연에게 함께 담금주를 만들러 가지 않겠냐고 물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