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물론 페어리의 외모만으로 문제의 뱀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요정 왕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힐두르의 잘못이 비단 혼자만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힐두르는 요정 왕의 역할을 인지하지 못했다. 쓰러졌다는 또 다른 요정 왕이 알려주지 못해서라면 그 어머니라는 눈앞에 페어리가 힐두르에게 말해줬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랬다면 힐두르는 괜한 사람들을 납치하고 희생시키는 것이 아닌 이곳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찾 거나, 자신을 추방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보려고 했을 것이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역할만 하는 존재를 뱀이 아니라고 의심하기에는 어려웠다. 더불어 킹스메이커가 슬쩍 귀띔해준 내용이 상대를 더 의심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부모 자식 관계라면 쓰러진 자식을 병간호한다는 핑계로 곁에 있기에 아주 좋은 위치네요. 못 일어나게 손 쓰기에도 편한 위치고.”
그 말에 동의하며 희연은 총을 꺼내 등 뒤로 숨겼다. 언제든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애매한 긴장감이 감도는 방안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헬르벨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희연은 그쪽으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곧바로 옆에 놔두었던 총을 들어 힐두르의 멱살을 붙잡으려 손을 뻗는 페어리의 머리를 쏠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탕-!
“헤, 헬르벨?”
“이미 죽은 몸이군.”
“죽은 몸?”
힐두르는 급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듯 자신의 멱살을 붙잡고 쓰러진 상대를 조심스레 불렀다.
“어머님? 요옌?”
“내, 내, 내, 내가 너, 너는, 안 되, 된다고, 마, 말했, 는데, 너, 너, 너, 때문, 이, 이야, 너, 때문…!”
“요옌-!”
고장 난 인형처럼 덜그럭거리던 요옌이 입을 쩍 벌리자 그 안에서 새까만 검은 뱀이 튀어나왔다. 힐두르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뱀에 요옌을 던지다시피 밀어냈다. 어찌나 세게 밀었는지 벽으로 날아가 부딪힌 몸이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사심을 섞어서 던진 것 같은데요?”
“킹 님….”
한참을 주저앉아 움찔거리던 요옌은 마치 거미처럼 기어 가장 가까이에 있던 희연에게로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기겁한 그녀는 넝쿨 의자 위로 뛰어 올라가며 총을 쐈다.
일단 쏘고 보는 희연의 공격이 나름 위협적이라고 느낀 것인지 요옌은 방향을 바꿔 킹스메이커 쪽으로 달려들었다. 하필 골라도 왜 그녀를 골랐을까 탄식하던 희연은 곧이어 지금의 킹스메이커에게 무기가 없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이코야.”
자신에게 달려드는 모습에 킹스메이커는 조금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희연이 놀라 그녀에게 달려가려 하고 헬르벨이 총의 위치를 바꾸는 순간이었다.
“짜증 나게 하네 진짜.”
킹스메이커는 발을 들어 그대로 요옌의 머리를 짓밟았다.
“어…?”
한참을 바르작거리던 요옌의 몸은 입 밖으로 빠져나왔던 검은 뱀과 함께 축 늘어지는 것으로 끝을 맞았다.
“후… 내가 처리하면 의미가 없는데.”
킹스메이커는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듯이 말했다. 희연은 그제야 왜 닉이 놀란 기색 하나 없이 가만히 있었는지 깨달았다. 애당초 킹스메이커에게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기가 있어도, 없어도 최강자는 그녀였다.
“해치웠나…?”
희연이 서먹한 표정으로 킹스메이커를 보는 사이 시어머니가 어느새 죽고 마법사의 손아귀에서 그 시신마저 놀아났다는 점을 깨달은 힐두르가 뒤늦은 반응을 내비쳤다.
“대체 언제부터….”
“제법 된 것 같군. 흑마법 쪽이라 정확한 판단은 마법사에게 듣는 게 좋을 테지만.”
헬르벨의 말에 당대 가장 뛰어난 마법사인 킹스메이커가 앞으로 나섰다.
“이건 정확히 말하면 흑마법보다는 네크로맨서 쪽에 가까워요. 그렇다고 흑마법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고, 여태껏 눈치 못 챈 걸 보면 생전의 모습까지 다 구현해냈다는 건데…, 아 진짜 귀찮게 구네.”
축 늘어져 있다 킹스메이커가 가까이 다가오자 되살아나 달려들었던 검은 뱀은 그녀의 손에 곧바로 붙잡혀 패대기쳐졌다.
근성이 무엇인지 보여주듯 다시 빳빳하게 고개를 든 뱀이 이번에는 희연을 노리며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크게 입을 벌리는 존재가 있었다.
“악령아?”
어느새 희연의 품에서 벗어난 악령이었다.
와작- 와그작-
순식간에 뱀의 머리를 으깨어 삼키고 남은 몸통과 꼬리까지 호로록 삼킨 악령이는 훌쩍이며 희연에게 다시 돌아왔다.
[이름 없는 악령 : 이 뱀이 아니야. 내가 찾는 뱀이 아니야.]
“그거를 먹어버리면 추적을 못 하는데….”
킹스메이커의 탄식이 함께였다. 그녀는 악령이의 입을 벌려 남은 흔적이라도 없나 찾았지만 소용없었다. 어찌나 깨끗하게 먹어 치웠는지 비늘 한 조각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악령이의 입속을 뒤지는 것을 포기한 킹스메이커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어쨌든 문제의 뱀은 처치했으니 퀘스트는 완료했지만 뱀도 그 피리 부는 마법사라는 것도 흔적이 안 남았네요. 그나마 걸어볼 만한 건 또 다른 요정 왕 정도인데. 원인이 없어졌으니 이제 일어났으려나?”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듯 한 페어리가 나타나더니 힐두르를 애타게 부르기 시작했다.
“힐두르 님! 요정 왕이시여! 듀이 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잠들었던 모두가 깨어나고 꽃으로 돌아간 픽시들도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헉! 요옌 님?”
힐두르에게 소식을 전하던 페어리는 방 안에 널브러진 요옌의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날개 끝을 바르르 떨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이 힐두르에게 향해 있었다.
“아, 이건….”
이상한 오해 사기 딱 좋은 상황에 힐두르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모습에 페어리의 눈에는 점점 더 불신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건 그러니까….”
“내 부모 요옌은 이미 오래전에 자연으로 돌아가셨고, 마법사로 인해 죽음을 모욕당한 것이니 괜한 이를 추궁하지 말아라.”
“…듀이?”
익숙한 이름에 희연 또한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어느새 입구에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던 페어리와 픽시를 밀어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긴 장미색 머리가 인상적인 페어리였다.
어느새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힐두르를 꼭 끌어안으며 듀이는 희연의 일행을 돌아보았다.
“마법사가 하나, 신을 모시는 이들이 둘. 하나는 동물을 사랑하는 자로군.”
“?”
“환대에 불온함으로 답하는 자가 있었으나 그대들은 아니겠지. 설탕에 꿀을 부어 잔을 빚고 술을 부어 꽃을 장식하라. 우리를 도운 이방인들을 환영할 시간이다!”
그들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듀이는 픽시들에게 명령했고 페어리들을 재촉했다. 돌아온 왕의 명령에 정신없이 움직이던 요정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간 뒤에야 듀이는 다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 이방인들. 우리는 많은 대화를 해야 할 것으로 사료되는군. 감사도, 그에 따른 보상도. 내가 잠들었던 긴 시간의 나날을 들려준다면 충분히 감사를 표하고 응당한 보답을 약속하도록 하지.”
그에게 지난날에 대해 설명할 힐두르가 쓰러질 정도로 울고 있었기에 말을 해줄 수 있는 건 그들밖에 없기는 했다. 슬그머니 서로를 바라보던 그때 킹스메이커가 희연을 등을 살짝 밀어 그녀를 앞으로 내보냈다.
“?”
“오리 님, 파이팅!”
희연이 조금은 당황스러운 심정으로 킹스메이커를 돌아봤지만 얼마 안 있어 자세를 바로 해야 했다.
“어린 신관. 그대가 내게 지난날의 이야기를 들려줄 참인가?”
“어, 네에…. 어디서부터 말할까요?”
“그대가 아는 모든 것을.”
어련히 무슨 생각이 있어 그런 것이겠지 생각하며 희연은 듀이의 앞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읊었다. 듀이는 담담한 얼굴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내 요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의외로 담담히 받아들였다.
“요옌, 나의 어머니이자 어버이신 분. 결국 그리 가셨군.”
“저기, 더 이상 궁금한 게 없다면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무엇을?”
듀이의 되물음에 희연은 곧바로 뱀이 새겨진 배지와 목걸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곳에 왔었다는 마법사에 대해서요! 혹시 아는 게 있나요?”
장미색에 잘 어울리는 연한 녹빛의 눈이 사르륵 움직여 희연에게 매달려 있는 악령이를 잠시 바라보았다. 힐두르처럼 신비롭게 빛나는 눈이었다.
“그래… 이참에 지금 보답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린 신관. 그대에게는 가장 마지막에 답하도록 하지. 잠시 기다리도록 하게.”
“?”
듀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더니 뒤편에서 기다리던 킹스메이커와 닉에게 각각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마법사. 그대가 원하는 건 무엇이지? 대륙의 명운이 달린 흔적인가 그대 개인의 성장을 도울 발판인가? 동물을 사랑하는 그대는 무엇을 바라지? 그대 또한 대륙의 명운인가 그도 아니면 병든 나무에서 피어날 꽃 한 송이인가?”
희연은 그 말을 들으며 퀘스트 창을 돌아보았다. 보상 목록 중 하나인 ‘작은 단서’. 무엇에 대한 단서인지는 쓰여 있지 않았다. 닉과 킹스메이커에게 한 질문이 다르다는 점에서 각자에게 필요한 것에 대한 단서를 준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와…이게 여기서 나오네.”
킹스메이커 또한 작은 단서라는 의미를 깨달았는지 한편으로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을 아꼈다. 그녀에게 있어 대륙의 명운, 메인 퀘스트의 단서도 중요했지만, 그녀 개인의 성취도 중요했기에 섣불리 결정 내리지 않았다.
반면에 닉은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듀이의 질문에 답했다.
“병든 나무에서 피어날 꽃.”
“되돌아볼 시간이 필요하군. 그대는 이미 답을 안다.”
답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지 닉의 입매가 조금 굳어 있었다. 킹스메이커는 아직 답을 정하지 못했는지 입을 꾹 다문 상태였다. 듀이 또한 그녀가 답하기엔 시간이 오래 걸리다 여겼는지 타깃을 바꿔 희연에게 질문했다.
“그대는 알고 싶은 것이 많으나 지금으로선 이게 가장 바라는 단서겠군. 악마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원하나, 가여운 영혼을 달래는 방법을 원하나?”
“…저는.”
설마하니 악마와의 내기에 관해서도 나올 줄은 몰랐기에 희연은 잠시 숨을 고르며 답을 망설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정말로 자미엘과 이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헬르벨이 그녀에게 죄책감을 가지는 것도 싫었다.
[이름 없는 악령 : ]
“…….”
악령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혹여 자신이 눈치 주는 게 아닐까 싶어 눈도 못 맞추는 상태였다. 여전히 희연이 꽂은 꽃을 떨어트리지 않는 모습에선 작은 애정 하나도 놓치기 싫어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희연은 손을 들어 말랑말랑한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어주며 답을 내놓았다.
“저는 영혼을 달래는 법이요. 그걸 듣고 싶어요.”
“곤란하군. 내심 전자의 것을 고르기를 바랐거든.”
“어째서요?”
듀이는 손을 내밀어 악령이의 이마를 손끝으로 툭 쳤다. 손길이 조심스러워서인지 악령이는 큰 거부감 없이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뱀은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똬리를 틀었지. 그 몸통이 길어 거대한 강을 만들 수 있을 정도야. 그렇기에 어느 대목에 이르러서야 이 가여운 악령이 구원받을지 나 또한 잘 모르겠다네.”
“…….”
“다만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 어린 그대, 뱀의 꼬리를 밟고 싶다면 왕관을 쓴 자 앞에 서게나. 독수리를 등에 진 자의 앞에 선다면 꼬리나마 밟을 수 있을 거다.”
독수리? 왕?
희연이 듀이가 말하는 왕이 누구인지 헤매는 것을 눈치챈 닉이 그 답을 풀이해주었다.
“시드론의 왕을 뜻하는 거예요.”
“아…. 그런데 제가 시드론의 왕 앞으로 갈 수가 있을까요? 연관이 전혀 없는데….”
“아마 가능할 거예요.”
그리 말하며 닉은 킹스메이커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답을 고르지 못해 헤매는 중이었다. 겸사겸사 보게 된 헬르벨은 불만이 있는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희연은 왜 그가 불만인지 알 것 같아 일단은 모른 척하기로 했다.
“후…결정했다. 대륙의 명운. 난 그걸로 할게요!”
“흐음…. 자유란 좋은 거지.”
“…그게 끝?”
당장이라도 마폭탄을 터트려 남은 성마저 폭발시킬 것 같은 킹스메이커의 얼굴에 듀이는 하하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면 이제 달콤한 꿀과 술, 꿈같은 설탕과 꽃의 시간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