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어처구니없기는 했지만, 듀이의 명에 따라 벌어진 잔치는 이방인인 그들에게도 오랜만에 즐거움을 만끽하는 요정들에게도 좋게 작용했다.
“맛있다…!”
특히 요정의 술을 처음 맛보는 희연은 크게 데였음에도 임시 성인 인증 받기를 잘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꽃으로 장식되고 꿀로 굳힌 설탕 잔에 가득 담긴 요정의 술. 향 좋고 맛 좋은 술을 마시며 기분이 나쁠 사람은 없었다. 곤란한 점이라고 하면 안주라고 자꾸 꽃을 내미는 픽시들 정도였다.
받는 족족 악령이의 머리에 꽃을 꽂아주던 희연은 술을 석 잔 정도 비운 뒤에야 주변을 살펴보았다. 킹스메이커는 듀이의 답이 마음에 안 들었다는 점을 빌미로 스스로 부족한 보상을 채우겠다며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요정 날개의 꽃가루 같은 재료를 수집하는 중이었다.
닉은 기껏 풀어낸 머리가 무색하게도 다시 픽시들에게 붙잡혀 머리카락을 내준 상태였다. 각양각생의 다채로운 꽃들로 장식된 머리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힐두르는 듀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신기한 것은 둘을 비롯한 다른 요정 모두가 요옌의 죽음을 금세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힐두르가 요옌을 해친 것만 아니라면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저 자연으로 돌아간 것뿐이다. 듀이는 그런 식으로 말했다. 만일 그것이 요정이라는 종족의 사고방식이라면 힐두르가 목동들을 죽인 것에 대해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픽시가 새로 건넨 술잔을 받아 든 희연은 그것을 마시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오로라는 조명이 되었고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구름에서 튀어나온 별 조각이 호수에 빠지면 연주가 되었다. 부서진 성마저 아름답게 보이는 착각에 희연은 자신이 취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헬르벨은 어디 있을까?”
희연의 질문에 악령이가 흘러내리는 꽃을 바치던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희연과 킹스메이커가 박살 낸 성 쪽이었다.
“하필 골라도 왜 저길….”
듀이가 어쩔 수 없었음을 인정해 주며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혀를 차며 픽시로부터 술잔을 하나 더 받아들였다. 터만 남은 성안 쪽으로 들어갈수록 떠들썩하던 소음은 차츰차츰 잦아졌다.
“헬르벨.”
“…….”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조용히 있는 헬르벨의 손에는 픽시들이 강제로 씌어주었던 화관이 들려 있었다. 희연은 들고 있던 술잔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화났어요?”
그녀가 조심스레 물어보자 헬르벨을 그제야 술잔을 받아주었다. 그 모습에 안도하며 희연은 성의 잔해에 걸터앉았다. 그가 왜 기분이 안 좋은지는 내심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희연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본인이 먼저 이야기 꺼내봤자 헬르벨의 속을 뒤집어놓는 것과 그리 다를 게 없음을 알아서였다.
헬르벨은 느릿느릿 술잔을 기울여 그 안에 있는 것을 삼켰다. 희연은 그런 그를 살피며 속도를 맞추듯 천천히 술을 마셨다. 두 사람이 술을 기울이는 소리만 울리는 빈 성터에서 그가 입을 연 것은 희연이 잔속의 술을 다 비웠을 때였다.
“너는 왜 항상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만 선택하는지 모르겠다.”
“…….”
“희생자가 되지 말라 했더니, 기껏 악마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눈앞에 두고, 저 좋은 일은 하나 하지 않고 남 좋은 일만 하는군.”
달기 그지없는 술잔을 잘근잘근 깨물며 시선을 피하던 희연은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에 못 이겨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그냥 그렇게 된 거죠, 뭐. 그리고 헬르벨이 너무 상황을 나쁘게만 보는 거지 저는 나름 괜찮아요.”
“…낙천적으로 구는군.”
역시 그렇게 보이려나.
희연은 조금은 씁쓸한 생각을 아득아득 깨문 술잔과 함께 삼켜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헬르벨은 반쯤 갉아먹은 희연의 잔에 제 몫의 술을 반절 덜어 주었다. 아릴 정도로 단 입을 술로 헹군 뒤에야 희연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뭐 할 거예요?”
“…….”
“신전으로는 안 돌아갈 거고, 언제까지 숲속 오두막에 숨어 살 수도 없잖아요.”
“…가족에게 돌아갈까도 했지만, 글쎄. 그저 가기만 하면 되는데 막상 그러려니 쉽지가 않아.”
헬르벨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금색이라 하면 명백히 난색일 텐데, 신기하게도 그의 금발은 빛바래서인지 한색 계열의 색과 함께할 때 더 반짝거렸다. 이런 새벽이나 밤하늘에서 말이다.
새벽 시간의 감수성이 술과 더해지자 꾹 다문 그의 입도 결국 열렸다.
“그 숲에 홀로 있을 때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 그 생각의 끝은 항상 나라는 주체에 닿았다. 나는 왜 살아가는 걸까. 무엇을 하겠다고. 그런 생각이 잠 못 이루게 하며 나를 지배하는 것 같았지.”
“…….”
“그래서 나는 내가 이 이상 무엇을 바라는지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 차라리 신전에서 하라는 대로 움직이던 그때가 도리어 쉬웠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희연은 헬르벨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전, 킹스메이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는 말했다. 헬르벨에게 바람을 갖게 하는 것까지가 희연이 해야 할 일일 거라고. 그것은 삶의 목적을 갖게 해주라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 목적이라는 게 꼭 있어야 하는 걸까?
“있잖아요 헬르벨. 사람이 꼭 뭘 하겠다고 정하고 살아가는 건 아니에요. 저 같은 경우도 제가 어…, 저는 이방인이잖아요? 그런데 무슨 목적을 갖고 여기서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물론 하루하루 스트레스를 받으며 사는 자신과 달리 자유로워 보이는 백희준이 얄밉고 좀 쉬는 김에 힐링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게임을 시작한 거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만일 그녀가 정말로 저 목적만이 뚜렷했다면 메르헨 호라이즌이 힐링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캐릭터를 삭제하고 다른 게임을 해야 했다. 목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계기일 뿐이었다.
“…너희 이방인들은 다른 곳에서 왔지. 그곳에선 어땠지?”
“솔직히 말하면 나쁘지 않았어요. 마법도 없고 칼부림 날 일도 없고 악마도 없으니까요. 안전하죠. 정해진 루트만 잘 타도 먹고 사는데 문제없는 삶을 얻을 수도 있고요.”
“…….”
“그런데 그렇게 남들이 하라는 대로, 편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는 삶이 정말 좋기만 했으면 여기서 이방인으로 살고 있지 않았겠죠. 머리 아픈 일이 없다고는 못 하는데요.”
앞으로 벌어질 모든 불확실한 것들에 대해, 차라리 그 달빛의 요람에서의 삶이 더 낫지 않았나 고민하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위로는 의미가 없었고 조언을 하기엔 그녀 자신의 인생 고찰도 부족했다.
하지만 적어도 목적 없는 그에게 동조는 해줄 수 있었다.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지금 당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저도 뭘 하겠다 정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기껏 익숙해지고 나름 편하다 싶은 일상을 버리고 여기에 있는데요.”
“…그렇다면 너를 이곳에 있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이지?”
“그냥, 그때그때 중요한 일들이 터져서 열심히 움직였고, 재밌어서, 정들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
“그러니까 헬르벨도 꼭 뭘 하겠다고 정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정말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 찾는 건 천천히 해도 되니까,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정해진 것들에 목매어 사는 게 익숙해진 그에게 희연이 해주고 싶은 말은 별거 아닌 말이었다.
“…괜찮다고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몰라도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헬르벨은 손안에 술잔을 굴렸다. 남은 술이 넘실거리다 땅을 적셨다. 마침내 꿀에 굳힌 잔이 녹아 그의 손에 끈적하게 달라붙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웃으며 희연을 돌아보았다.
“…그래.”
[퀘스트 <낭만의 악의>의 세 번째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낭만의 악의 : 죄인의 후손 헬르벨. 그는 자신의 죄악을 경멸하고 씻어내려 했으나 그의 재능은 그것을 거부했다. 잊히지 않는 죄악에 절망한 그에게 평온을 가져다주자.
‘낭만과 악의는 한 끗 차이’]
[퀘스트 조건 : (1) 헬르벨에게 인정받기 (2) 헬르벨의 제자 되기 (3) 헤매는 자]
“아주 긴 시간을 헤매더라도. 설령 그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그마저 때론 답이 되어주겠지.”
“…아.”
희연은 조금 감정이 울컥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녀를 악령이가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래봤자 약령이는 조그마했기에 손목을 끌어안는 정도였고 헬르벨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의 흔적은 옅어졌지만.
그 순간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요정의 잔치는 날이 밝을 때까지 이어졌다. 호수를 메울 만큼 가득했던 술이 떨어지자 어린 픽시들은 꽃봉오리 사이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페어리들은 술에 취해 언제 싸웠냐는 듯 어깨동물 하며 노래를 불렀다. 리라 연주자라는 이유로 밤새도록 연주해 주던 닉이 지쳐 성의 잔해에 기대 눈을 감았던 시간이기도 했다.
“자. 그러면 남은 보답을 이만 주도록 할까? 날이 밝았으니 좋든 나쁘든 옛일을 모두 술과 함께 흘려보내야지.”
악령이와 함께 설탕 잔해에 드러누워 있던 희연은 그제야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밤새도록 술을 마셨는데 숙취가 없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런데도 정신적 피곤함은 남는다는 점에서 아직까지도 흥이 넘치는 페어리들이 놀라웠다.
비실비실 움직이는 희연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듀이는 자신의 요술을 이용해 그녀를 자신의 앞까지 끌어다 앉혔다. 조금 알딸딸한 기분으로 다른 이들을 기다리며 희연은 듀이의 옆에 있던 힐두르를 보았다.
힐두르는 어린 꽃나무가 심어진 작은 화분 두 개를 끌어안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두 나무는 그들의 자식이었다. 희연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신의 알코올 수치를 의심했다.
부모의 손길을 느끼듯 작은 꽃봉오리를 흔드는 나무를 보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무엇이죠?”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힐두르, 성별이 어떻게 되세요?”
첫 만남부터 내심 궁금했던 점이었다. 힐두르는 성별을 구분하기 힘든 모호한 외모였다.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을 몰랐다는 듯이 힐두르는 분홍색 눈을 깜빡이더니 재밌다는 듯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마법사가 알려주지 않았나 보네요. 나와 같은 고대 종에겐 성별을 나누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린 때때로 원하는 성별을 선택하니까요.”
“그러면 양성인 거예요?”
“보통은 무성을 유지할 때가 많죠. 필요할 때만 성별을 갖는 편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를 가질 때?”
“아, 네에.”
“그 외에 궁금한 것은 없나요?”
“…악마와의 내기를 피하는 법?”
“술에 취해도 알려줄 리가 없는 걸 바라지 마세요.”
단호하게 선 긋는 말에 희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퀘스트 보상으로 얻을 수 있던 걸 술 몇 잔에 얻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벼운 문답을 주고받는 사이 픽시들에게 이끌려 온 닉이 머리에 꼬인 꽃을 털어내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닉은 옆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쳐다보는 픽시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안 보이는군.”
“…….”
듀이의 말에 희연과 닉은 서로를 힐끔 바라보았다. 모두가 술에 취해 헬렐레하던 사이 킹스메이커는 재료 수집을 하겠다며 신나서 호수 건너 있는 숲에 들어갔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아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멋대로 채집한 것들을 이 밖으로 들고 나가도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듀이와 힐두르가 알았을 때 마냥 좋게만 보기 힘든 일이기도 했다. 희연은 두 요정 왕이 그녀에게 갖는 관심도 끊을 겸, 시간을 벌 겸 가벼운 문답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요술이랑 마법은 다른 건가요?”
“마법은 인간의 것이고 요술은 요정의 것이죠.”
“그러면 마법은 인간만 쓸 줄 아는 거네요?”
“그건 아니고….”
“?”
힐두르는 정확한 지식적 측면은 잘 모르는지 대답을 망설였다. 요정에게 있어 요술은 그저 당연하기에 탐구해본 적이 없어 그런 거였다.
“요술은 문과, 마법은 이과. 그 정도로 구별 지어서 생각하면 돼요, 오리 님.”
“킹 님!”
어느새 그들 곁으로 돌아온 킹스메이커는 어찌나 알찬 시간을 보낸 것인지 깨끗했던 옷이 알록달록 풀물이 들어 있었다.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내며 그녀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마법은 공식이 있기에 재능과 머리만 있다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요술의 경우 정통한 혈통으로 이어지는 힘이기에 특정 종족이 아니면 아예 사용을 못 해요.”
“재능과 머리가 필요하면 누구나가 아닌데요…?”
“단 요술의 단점은 흔적이 남으면 그만큼 들키기 쉽다는 거지만요.”
그렇게 말하며 킹스메이커는 희연을 등을 콕 찔렀다. 그 행동에 희연은 힐두르가 그녀를 밀고 난 뒤 왜 킹스메이커가 그녀의 등을 살펴보았는지 깨달았다. 요술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이방인들 모두가 모였으니 일을 진행해도 되겠군. 가져와라.”
듀이의 명령에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페어리들이 자신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절도 있는 모습으로 물건을 가져왔다. 각각의 커다란 방석 위에 올려진 것들은 주머니와 비단 한 필이었다.
[<신비로운 요정의 주머니> : 장난을 좋아하는 요정들의 주머니에서는 언제나 예상 못 한 선물이 들어 있다. 사람의 운을 실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짓궂은 요정들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물건이다.]
[<요정의 옷감> :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하는 요정들이 만든 옷감. 요정의 날개에서 떨어지는 꽃가루를 뭉쳐 만든 실로 빚은 비단이다.]
“와….”
요정의 날개처럼 신비로운 비단을 슬쩍 만져 본 희연은 그 남다른 부드러운 감촉에 탄성을 자아냈다. 제법 두께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볍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질기고 튼튼했다.
희연이 비단에 감탄하는 사이 무슨 결심을 내렸는지 힐두르가 그녀에게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받아주세요, 어린 신관님. 사과의 의미이자 친구의 의미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이게… 뭔데요?”
힐두르는 손을 활짝 펴 그녀에게 내민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나의 결혼반지입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