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잠시 굳어 있던 희연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남의 결혼반지를 함부로 받으면 안 되지 않을까요…?”
“아, 괜찮아요. 2058번째 결혼반지니까요. 우리는 매해 새로운 반지를 맞추거든요. 이건 피리 부는 마법사가 찾아왔던 해에 맞춘 반지죠.”
2058번째쯤이면 결혼반지에서 느낄 수 있는 설렘 같은 감정을 못 느끼지 않을까? 희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섣불리 반지를 받지 않았다. 남의 결혼반지라는 건 원래가 그랬다.
희연이 망설임을 버리지 못하자 힐두르는 반지를 내주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좋은 기억이 그리 많이 담기지 않은 반지입니다. 우리는 새 반지를 맞출 거고요. 그리고 당신 혼자만 처음이더군요.”
“뭐가요?”
힐두르는 고갯짓으로 닉과 킹스메이커를 가리켰다.
“저 둘. 이미 요정 세계에 발 디딘 적이 있더군요. 남들은 두 번째인데 그대 혼자 아니기에 안쓰러워 주는 겁니다. 작물 하나 제대로 못 캐던 것이 안쓰러워서.”
“…….”
“그리고 그 사슬도 당신이 갖도록 해요. 언젠가 한 번은 사용하게 될 겁니다. 윌로우에게는 사과와 안부를 전해주세요. ”
희연에게 반지를 쥐여준 힐두르는 할 말은 그게 전부라는 듯 망설임 없이 뒤돌아 듀이에게 돌아갔다. 5년이라는 세월을 윌로우와 함께했지만 그게 전부라는 게 느껴지는 태도였다.
힐두르가 말하는 사슬이라 함은 헬르벨을 묶었던 것을 뜻했다. 남의 영혼을 묶는 물건 따위 과연 자신이 쓸 날이 올까 싶었지만, 희연은 일단 보관하기로 했다.
“화려하네.”
반지는 힐두르의 눈과 같은 진한 분홍색 보석이 박힌 은반지였다. 보석을 둘러싼 나뭇잎 모양의 은장식이 보석의 색만큼이나 퍽 화려한 물건이었다.
[<요정 왕의 반지> : 열다섯 번째 요정 왕국 오미크론의 요정 왕 힐두르의 2058번째 결혼반지다. 요정의 축복이 담겨 있다. 힘(50), 민첩(150), 마력(250) 추가로 HP 2000, MP를 3000 올려준다.
특수스킬 : 요정 왕의 축복 / 숲의 결계]
“…어?”
희연은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비볐다. 숫자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참을 그러고 난 뒤 다시 본 0의 개수는 여전히 이상했다.
“내가 아직 취했나?”
그녀가 스스로를 의심하던 그때 한참을 눈만 비비는 희연을 이상하게 본 닉이 무슨 일이냐 물으며 곁으로 왔다.
“닉 님. 제 눈이 이상해요. 이 반지 하나가 힘을 막 50씩 올려주고 민첩을 150, 마력을 막 250을 올려주고 HP를 2000이나 올려준대요, 심지어 MP는 3000이나!”
“이상한 건 아니에요. 원래 액세서리 종류의 아이템은 능력치를 더 많이 올려주거든요.”
“그래도 이건…! 너무, 너무 막 주니까 무섭잖아요! 벌써부터 이런 게 나오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나중에 불법이라고 계정 정지당하거나 신고당한다거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그리고 어차피 지금은 착용 못 할 거예요.”
“?”
닉의 말에 희연은 뒤늦게 반지를 들어 자신의 손가락 끼워보았다.
“어….”
[착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닙니다. (사유 : 레벨 부족 -146)]
“에이…. 좋다 말았네.”
무섭기는 했지만 내심 기대했던 그녀로선 그만큼 아쉬움도 클 수밖에 없었다. 계륵이 되어버린 반지를 보며 곰곰이 생각하는 희연의 머릿속이 훤하다는 듯 닉은 선수를 쳤다.
“저나 다른 사람한테 줄 생각하지 말고 레벨을 높인 뒤 사용하도록 해요.”
“어차피 지금 당장은 못 쓰는 물건인데….”
“반지 같은 액세서리류는 착용 개수 제한이 있고, 이미 다들 본인들 장비는 다 맞춘 상태니까요.”
그러니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희연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반지를 손을 내미는 악령이에게 쥐여주었다. 악령이는 반지를 제 팔에도 껴보고 머리 위에도 얹으며 갖고 놀더니 금세 흥미가 사라졌는지 희연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면 이제 진짜로 윌로우 농장으로 돌아가야겠네요. 루로한테 인형을 쥐여주고 왔기는 한데…. 울고 있겠죠?”
“울고 있어요.”
단호하게 답하는 닉은 테이머이기에 따로 상태를 볼 수 있는지 어느 한 곳을 힐끔 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나가던 픽시를 붙잡아 떠나기 전 마지막 부탁을 했다.
“혹시 요정의 꿀을 얻을 수 있을까?”
“물론이죠! 금방 가지고 올게요!”
얼마 안 있어 픽시는 혼자 들기엔 버거워 보이는 꿀단지를 들고 그들 앞에 나타났다. 닉은 그것을 품에 받아들었고 고마움의 표시로 머리의 나뭇잎을 뜯어 픽시에게 내밀었다.
“…진짜 나뭇잎이었구나.”
희연이 감탄하는 사이 듀이와 협상을 끝낸 킹스메이커가 요정의 비단 세 필을 품에 끌어안고 뛰어왔다. 이제는 정말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하루 꼬박 훌쩍이던 드래곤과 단둘이 남겨졌던 뉴비 없지는 돌아온 그들을 보자마자 반가움의 눈물을 흘리며 달려왔다.
“왜 이제 왔어…!”
“야-!”
정확히는 달려오다가 킹스메이커의 날아 차기에 쓰러졌다. 옆구리를 붙잡고 쓰러진 뉴비 없지의 멱살을 붙잡으며 킹스메이커는 말했다.
“와 친구야. 나는 내가 게임을 하면서 힐러 둘이서만 요정 수십을 상대하는 광경을 볼 줄 몰랐단다.”
“마리아는 혼자서….”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죄송함다. 잚탬슴다. 저도 제가 하늘을 못 나는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점을 깜빡해 버렸습니다.”
한참을 탈탈 털리고 난 뒤에야 뉴비 없지는 멱살의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때마침 그와 함께 그들을 기다렸으나 차마 말은 걸지 못하던 윌로우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힐두르는? 힐두르는 어떻게 된 건가? 자네들을 한나절 동안 어디 갔었던 거고!”
“그게….”
어디서부터 설명할까 고민하던 희연은 다른 이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킹스메이커는 윌로우에게 친절히 설명해 줄 생각 자체가 없는 듯했고 닉은 먀먀 우느라 난리인 루로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고 답답해라! 어서 말해보게나!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게야! 응?”
“…힐두르는 요정이었고 지금까지 농장에서 벌어진 일의 범인이었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어요. 이 농장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자네 진심으로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 하는 건가?”
윌로우는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지만 희연은 최대한 축약한 지난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힐두르가 완전 무죄는 아니듯 윌로우도 썩 좋은 농장주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렇게 사라지면 당장에 농장 일은 어떻게 하라고! 힐두르 그 애를 믿었건만 다른 이들처럼 도망을 가다니! 이러니 내가 품삯을 인색하게 줄 수밖에 없는 거야!”
임금도 제대로 안 줬구나.
희연은 속으로 혀를 차며 윌로우에게서 뒤돌았다. 그녀에겐 악덕 농장주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닉에게로 간 그녀는 그의 품에 착 달라붙은 루로의 등을 조심스레 콕콕 찌르며 물었다.
“루로. 악령이 메리 인형 어디에다 뒀어?”
먀-!
루로는 간신히 자신의 테이머를 만난 이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닉이 그러지 말라는 듯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준 뒤에야 루로는 꼬리를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앗….”
[이름 없는 악령 : 내 몸….]
그곳에는 내팽개쳐진 게 분명한 모습의 메리 인형이 침과 흙 범벅이 되어 애처롭게 땅을 구르고 있었다. 악령이가 빙의되기 전의 그 스산한 도자기 인형 모습으로 말이다.
눈이 마주친 메리 인형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본 희연은 루로가 왜 인형을 냅다 던져놓은 건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내가 깨끗하게 만들어줄게!”
악령이의 비난 서린 눈빛에 그녀는 그것을 잘 챙긴 뒤 언덕을 내려갔다. 바로 밑에 시냇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희연이 덜그럭거리는 인형의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물에 잘 씻기자 꾸물거리던 악령이가 그제야 메리인 형의 몸으로 다시 들어갔다.
“…몸이 무거워. 옷도 너덜너덜해졌어! 팔도 뜯어졌잖아!”
“잘 말려줄게! 나 바느질할 줄 알아! 그리고 옷은… 에빌론에 가자마자 예쁜 옷 사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이걸로 봐주라.”
인형에 빙의되느라 원래 몸에 붙어 있던 꽃이 모두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희연은 그중 가장 흙이 묻지 않고 생생한 것을 골라 인형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분이 제법 풀렸는지 악령이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희연의 품에 안겼다.
“꽃이 좋아?”
“…꽃을 내게 주는 게 좋은 거야!”
그녀는 토라진 악령이를 달래며 다시 언덕을 올라갔다. 힐두르가 사라진 것을 납득하지는 못했지만 농장에서 벌어지던 악몽을 끝낸 것을 이내 농장의 일을 도운 것으로 윌로우가 인정했기에 퀘스트는 완료되었다.
“떼잉… 언제 또 일꾼들을 모아 이 넓은 농장을 가꾸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정말로 농장 일을 도와줄 생각들은-.”
“안녕히 계세요 윌로우! 우린 이 농장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우리의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아요, 윌로우!”
[<윌로우 농장의 도우미> 퀘스트 성공!]
[윌로우 농장의 싱싱한 농작물을 지급받습니다. (두근두근 랜덤 열매x5 / 싱싱한 당근x10 / 기름기 가득한 밀 포대x10….)]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 업!]
[소정의 사례금이 지급됩니다.]
[파티 퀘스트 <파드의 싱싱농장> 이용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영차영차 일 잘하는 누런 소> 업적 달성!]
[업적 효과 : 농작물 채집 시 성공 확률이 올라갑니다!]
“…왜 업적을 달성했는데 기분이 더럽지?”
희연은 시스템 창을 노려보았지만, 아직 보상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요정과 목동> 퀘스트 성공!]
[보상이 이미 지급되었습니다.]
[<요정의 친구> 업적 달성!]
[업적 효과 : 자연이 머무는 땅에 발을 디딜 시 마법과 관련된 스킬의 공격력이 5% 증가하며 적 공격 시 2%의 확률로 속박 마법이 발동합니다]
백분율 중 겨우 5와 2라는 숫자에 희연은 이걸 기뻐해야 하나 고민되어 눈을 가늘게 떴지만, 어찌 됐든 있으면 좋은 거겠지 하고 넘겼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퀘스트 정산은 따로 있었지만 여태껏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퀘스트를 준 장본인에게 가야 하는 듯했다.
“에빌론….”
여기서 그곳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던 희연은 잔잔한 바람을 맞으며 그들을 기다리던 헬르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눈이 마주친 그에게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에빌론으로 가야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에빌론? 전쟁 지역이자 정치적 유배지라 불리는 그 땅에는 왜?”
헬르벨의 바깥의 기억은 달빛 요람으로 들어가기 전에 멈추어있었기에 그곳으로 가자 하는 희연의 말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희연은 이걸 무어라 설명해야 하나 고민되었지만, 그에게 중요한 점만 짚어 일단 설명했다.
“저한테 헬르벨의 이야기를 해준 신관이 거기에 있어요.”
그 말에 그는 잠시간 고민하는 듯 입을 다물었지만 얼마 안 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녀의 의견에 긍정을 표했다. 희연은 그 모습에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윌로우에게서 더 털어먹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킹스메이커는 듀이 때와는 달리 얌전히 뉴비 없지와 함께 희연과 헬르벨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연과 눈이 마주치자 킹스메이커는 쪼그려 앉아 있던 다리를 쭉 피며 어느새 챙겨 온 낫을 땅 위에 툭툭 쳤다.
“루로는 삐져서 우리를 안 태워줄 것 같으니까 어쩔 수 없네요. 자, 윌로우. 저 마차 얼마예요?”
“…뭐?”
빠르게 흥정을 마친 킹스메이커는 제법 커다란 짐마차에 이전 희연에게 주었던 에메랄드를 가득 박아 버리는 것으로 순식간에 하늘을 나는 탈것을 만들어냈다.
금화를 받아 좋기는 하지만 일이 한창 바쁠 이때 짐마차를 팔아버린 것이 정말 잘한 것인가 혼란스러워하던 윌로우가 자신의 판단이 정말 옳았는지 결정 내리기도 전 킹스메이커는 보석에 새긴 마법을 발동시켰다.
“<날아라>!”
희연은 마법은 참 편리하다고 생각하며 천막 밖을 슬며시 내다보았다. 쿠션 대용으로 쓰기 위해 두었던 지푸라기가 한 올 한 올 나르며 하늘에 수를 놓고 있었다.
“우와.”
평소에도 에흐테 덕에 하늘을 날아다니고 드래곤도 타 봤던 그녀였지만 이런 식으로 비행하는 것은 또 처음이기에 마음이 들떴다.
희연과 함께 밖을 내다보던 악령이가 바람에 휩쓸려 날아갈 뻔한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잔잔하게 즐거운 순간이었다.
“엣취.”
“…인형도 재채기를 해?”
루로가 짓씹는 바람에 너덜너덜해진 옷을 꼭 쥐며 악령이가 재채기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