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Dead end』
“엣츄! 에잇츄! 헷츄!”
희연의 물음이 증폭제가 된 것처럼 악령이는 연신 재채기를 했다. 격한 움직임에 비틀거리더니 이내 털썩 주저앉기에 이르렀다.
당혹스러움에 메리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희연은 고개를 들어 인형의 원주인인 킹스메이커를 찾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희연의 눈빛에 킹스메이커는 짐마차의 고삐를 뉴비 없지에게 넘기고 그들의 곁으로 왔다.
병아리 소리 같은 재채기를 연신 남발하는 악령이를 받아 간 킹스메이커는 메리 인형의 몸을 꾹꾹 누르기도 하고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하며 원인을 찾았다.
“흠… 이건.”
심각한 표정에 희연과 악령이는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심각한 거예요?”
“아뇨. 속이 덜 말랐네요.”
“아.”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희연은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악령이를 받았다. 확실히 꾹꾹 눌러보니 몸 안쪽의 솜이 축축하게 밀도 있는 느낌이 났다.
악령이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제 몸을 꾹 눌러보다 고개를 들어 희연에게 말했다.
“어쩐지. 내 몸이 무지 차가웠어!”
“미리 말을 하지….”
“드래곤한테 물려서 그런 줄 알았어!”
“…….”
할 말이 없어진 희연은 인형의 몸을 몇 번 더 꾹꾹 누르다가 햇빛이 들어오는 자리로 위치를 바꿔주었다. 햇빛 아래 달궈지기 시작한 악령이가 만족한 듯 눈을 감는 것까지 확인한 그녀는 그제야 길게 하품을 했다.
날 좋고, 햇빛은 뜨듯하며 바람은 선선했다. 조금씩 흔들리는 마차까지 더해지자 졸음이 몰려왔다. 바짝 긴장한 사람의 신경마저 흐물흐물 풀게 만드는 조건의 총합이었다.
언제나 등을 꼿꼿하게 피던 헬르벨이 짚더미에 몸을 기대어 휴식을 취할 정도로 나른한 분위기였다. 킹스메이커 또한 고삐를 뉴비 없지에게 맡긴 김에 쉬기로 했는지 인벤토리에서 책 한 권을 끄집어냈다. 희연은 읽을 수 없는 이상한 문자가 책 표지에 양각되어 있었다.
마차 안에서 가장 신경이 예민한 축인 두 사람이 그러니 희연 또한 지금은 정말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요정의 세계에서 벌인 잔치가 쉬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내내 완전히 긴장을 풀지는 못했다. 언제 요정들이 돌변해 그녀를 호수에 담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성을 부순 죄는 컸다. 선물을 받고 나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잠시 요정 왕에게 받았던 선물에 대해 생각하던 희연의 생각은 그곳 호수에서 주웠던 목걸이에 다다랐다.
햇빛에 녹는 멜팅 치즈가 된 악령이를 힐끔 바라본 희연은 조심스레 그 물건을 끄집어내 살펴보았다. 뱀이 입에 꼬리를 물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에메랄드는 비늘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손끝으로 쓸면 그 결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보석은 차가웠기에 실제 뱀을 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덜그럭, 덜그럭-
“응?”
한참 동안 보석을 만지작거리던 희연은 꼬리를 문 뱀의 입이 조금 헐겁다는 걸 깨달았다. 꼬리와 머리를 잡고 손에 힘을 주자 조금씩 덜그럭거리며 움직였다.
희연은 그것을 눈앞으로 끌고 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뱀이 꼬리를 문 모양으로 세공한 것이 아니었다. 세공 이후 입에 구멍을 만들어 그 안에 뱀의 꼬리를 넣은 거였다.
굳이 이런 식으로 만들 필요가 있던 걸까? 절로 그런 의문이 들었다.
“잘하면 빠질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생각과는 달리 아무리 손에 힘을 줘봐도 뱀은 입에 문 꼬리를 뱉지 않았다. 되레 희연이 힘을 주는 만큼 꼬리를 문 입에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왜 그러지?”
홀로 낑낑거리는 희연에게 헬르벨이 물었다. 희연은 그새 얼얼해진 손을 흔들며 그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이거 꼬리를 입에서 빼낼 수 있는 구조 같은데 잘 안 돼서요. 혹시 뺄 수 있어요?”
목걸이를 받아간 헬르벨은 잠시 그것을 눈으로 살펴보더니 그녀처럼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뱀은 꼬리를 입에서 놓지 않았다.
“힘을 더한다면 가능할 것 같기는 하나, 그렇게 하면 물건을 못 쓰게 될 것 같군.”
힘 스텟만으로는 안 되는 건가?
지금 상황에선 안 된다는 점을 인정한 희연은 그것을 잠시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보석을 투과해 나타났던 빛무리가 그녀의 얼굴 위로 일렁거렸다. 그 눈부심에 잠시 인상을 찡그렸던 희연은 이내 다시 목걸이를 인벤토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어느새 햇빛에 몸을 다 말렸는지 말똥말똥 앉아 지켜보던 악령이가 곧바로 달려와 희연의 다리에 찰싹 매달렸다. 희연은 그런 악령이의 모습에 슬쩍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줬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인형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무엇을 바라는 건가 싶어 희연은 악령이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었다. 슬쩍 눈치를 보던 인형은 슬금슬금 그녀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평소 악령이는 그녀의 모자나 머리 위, 어깨 혹은 팔다리에 매달려 다녔다. 평소보다 더한 접촉을 원한다는 점에서 희연은 조금 의아했다. 그런 그녀의 의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악령이의 까만 눈은 어느 한 곳을 연신 힐끔거렸다. 그 시선 끝에 있는 건 닉의 품에 안겨 꿀을 탄 우유를 받아먹는 루로였다.
우유에 섞었음에도 꿀의 단내가 진했는데, 그것과 함께 더해진 평화로운 분위기가 악령이는 탐이 난 듯했다.
“…에치.”
이미 몸은 다 말랐으면서 재채기 흉내를 내는 속내는 뻔했다. 희연은 그런 악령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어느새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든 닉은 소분해 놓은 작은 꿀단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악령이는 희연의 팔에 바짝 달라붙었다. 희연은 그 모습에 싱겁게 웃으며 꿀단지를 열어 악령이 앞에 내밀었다.
“와아….”
단지 속으로 팔을 쏙 담갔다 뺀 악령이는 꿀 묻은 자신의 손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더니 조심히 제 입안에 집어넣었다.
“맛있어! 엄마가 만들어줬던 케이크보다 맛있어!”
“어머니가 속상하시겠네.”
“킹 님….”
책을 보며 반사적으로 말했던 킹스메이커는 희연의 부름에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다행인 점은 악령이가 킹스메이커를 무서워하는지 그쪽으론 웬만해서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팔에 묻은 꿀을 다 먹은 악령이는 뚜껑이 닫히지 않은 꿀단지를 빤히 바라보다 희연에게 채근했다.
“더 줘!”
“안 돼. 단 걸 많이 먹으면 이빨이 썩어.”
“나는 썩을 이빨이 없으니까 괜찮아!”
“어…?”
희연은 일단 악령이의 손에 닿지 않게 꿀단지를 높이 들고 고민했다. 악령이는 그것을 가볍게 빼앗을 수 있으면서 폴짝폴짝 뛰기만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킹스메이커는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으음….”
“왜?”
무언가 고민되는 듯 낮은 침음을 흘리는 킹스메이커에게 뉴비 없지가 슬쩍 물어보았다. 겉으로는 희연과 악령이의 모습을 보며 평화로움을 만끽하듯 웃고 있었지만, 그 속은 아니라는 것을 오랜 친구인 그는 금세 눈치챘다.
그런 그의 생각대로 킹스메이커는 고민 중이었다.
저대로 둬도 되나?
‘악령’은 명백히 흑마법사인 그녀의 힘에 이끌려 희연과 만나게 되었다. 바라던 대로 달빛 요람의 숲을 나왔고, 힘이라면 진즉 회복했다. 햇빛 아래에서 젖은 몸을 말린다는 게 그 증거였다.
인형의 몸을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돌아다니기에 이미 충분한 상태임에도 그리 싫어하는 신관에, 성기사까지 함께하는 희연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싶었다. 정에 목말라 그런다기엔 부족하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어때 보이나 싶어 그녀는 못 이기는 척 답을 재촉하듯 톡톡 치는 뉴비 없지에게 말을 흘려 보았다.
“악령이 말이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되어서.”
“악령이? 왜? 나름 귀엽잖아. 오리 님도 좋아하고.”
“글쎄.”
금서를 덮은 킹스메이커는 옷에 붙은 지푸라기를 손으로 털며 말했다.
“너 그거 알아? 악령이는 너한테 싫다고 소리라도 질렀지? 나한테는 말 한마디 건 적 없어.”
“…….”
“조금 전에 내가 자기 몸을 꾹꾹 누르는데도 아무 말 안 하더라고. 남의 손 타는 걸 아주 싫어하는 것 같던데 말이야.”
“감이 좋은가 보다.”
“그러게. 피아 식별 없기로 유명한 악령이 눈치를 볼 줄 아네.”
“그래서? 위험하다는 거야?”
“글쎄요오? 말 안 해줄 건데요오.”
말끝을 늘리는 그녀를 짜증 난다는 듯 바라보던 뉴비 없지는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자신이 삐쳤다는 것을 어필했다. 그래 봤자 에빌론에 도착했을 때쯤엔 알아서 풀릴 거라는 걸 알았기에 킹스메이커는 그쪽으론 신경 쓰지 않았다.
슬그머니 이쪽으로 바라보다 눈이 마주친 악령이 움찔 어깨를 떨더니 희연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이런다고 꿀 더 안 줘.”
“…….”
“아야…?”
악령이가 두 팔을 들어 희연의 몸을 투닥투닥 때리는 것까지 확인한 킹스메이커는 다시 금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은 두고 보아도 괜찮다는 결론을 내렸다.
***
“거기! 하늘을 나는 여행객들! 이 밑으로 내려와 검문을 받으시게!”
우렁찬 목소리에 악령이와 함께 선잠에 들었던 희연은 지푸라기를 흩날리며 슬금슬금 일어났다. 요정들과의 술잔치로 인해 피곤했던 것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는지 루로와 낮잠 자던 닉과 짚더미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헬르벨도 느릿느릿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에 분명 누구보다 바빴던 킹스메이커는 지친 기색도 없이 벌떡 일어나 짐마차에 박아 넣었던 보석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체력 스텟이 정신력까지 좋게 해주는지 알 수 없었으나 생생한 것은 뉴비 없지도 마찬가지였다.
서서히 밑으로 하강하기 시작한 짐마차 속에서 그들은 나갈 채비를 했다. 악령이는 희연의 후드 속으로 들어갔고 잠이 덜 깬 루로는 한참을 밍기적거리다 소환 해제되었다. 헬르벨의 경우 킹스메이커가 내민 시꺼먼 망토를 뒤집어썼는데, 밝은색의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도록 후드까지 뒤집어쓰는 그의 모습이 희연은 참 수상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비단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는지 실제로 짐마차에서 내려 병사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도 헬르벨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가 끊이지 않았다. 의외인 것은 병사들이 섣불리 헬르벨에게 얼굴을 보이라 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타깃이 된 것은 유저인 희연이었다.
“이제 보니 저번에 보았던 어린 이방인이구먼!”
희연에게 말을 건 병사는 이전 그녀가 처음 에빌론에 도착했을 때 만났던 그 병사였다. 그는 반갑다며 손을 흔들더니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 차분히 읽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도시에서 범법자가 된 적이 있구먼! 죄목은… 도시의 규칙을 깼군. 리퍼 공작께서도 함께하셨고. 성기사 친구도 한몫했고. 아이고야. 테이머께선 웬일로 같이 죄를 저질렀대.”
저거 다 기록되는구나….
그녀는 초조함에 병사의 손에 들린 종이를 힐끔거렸지만,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 닉은 태연한 모습으로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공작께서도 좀 자중하시지 그럽니까. 우리 에빌론에 기록된 공작님의 죄목만 해도 얇은 책 한 권은 되는데…. 어이구야 최근에 이런 짓도 하고 저런 짓도 하셨군! 게다가 이건… 어, 수도 재판으로 넘어갈 정도의 중범….”
“어이쿠 손이 무거워라!”
킹스메이커는 곧바로 묵직한 주머니를 끄집어냈다.
“하핫! 거참, 이러면 안 되는데. 아유 이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좋-은 데 쓰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병사는 짤랑거리는 주머니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었다. 그들을 들여보내 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에 희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희연을 발견한 킹스메이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래 보여도 실제로도 좋은 데 써요.”
“?”
“보육원에 기부금으로 보내고 도시 발전 기금에 내고 신전에 보여주기식으로 조금 낸 다음에 남은 돈으로 병사들끼리 가볍게 한잔하고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서 돌아가거든요. 그러고 나면 실질적으로 남는 돈은 없는 거죠.”
“도시 발전 기금도 내요?”
그 질문의 답은 헬르벨에게서 나왔다.
“…다스리는 자가 없으니 스스로 도시가 발전할 자금을 마련하고 사기를 돋운다는 뜻이군.”
관문소를 지나 푹 눌러썼던 망토를 벗는 그를 보며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드론이라는 나라에 속한 도시니 물론 나라에는 세금을 내죠. 하지만 이곳은 영주도 없고, 시장이나 도지사 개념도 없어서 도시 단위의 세금을 걷기가 애매해요. 결국 도시 발전을 위해선 주민들이 알아서 돈을 모아야 했다나 봐요.”
“아….”
“그리고 우리 같은 유저들이 돈 뜯기 제일 좋은 대상이죠.”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