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곳을 되살리기 위해 스스로 나섰던 주민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감동했던 희연은 이어지는 말에 맥이 빠졌다. 그런 희연의 반응에 킹스메이커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 정도 뒷돈은 유저들에겐 크게 문제 되는 금액은 아니니까요. 돈 낼 자신 없으면 도시에서 얌전히 지내라는 경고 의미도 되고요. 이게 내 돈으로 발전한 도시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부가효과도 있으니 여기 주민들이 신나서 돈 뜯는 것도 있지만요.”
희연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녀의 돈으로 저 성벽이 지어지고 이 거리가 정돈되고 도시가 발전했다고 생각하면 이곳은 단순히 지나가는 어느 마을처럼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내가 저 회사의 유리창 하나 정도 값은 했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말이다.
왜 그렇게 많은 유저들이 툭하면 평화의 상징이 있는 분수대 앞에서 싸우고 범법을 저지르고 말을 안 들어도 안 쫓아내나 했더니 다 나름의 규칙과 속내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에빌론의 구조를 깨달은 것처럼 아직은 낯선 이곳에 적응하기 시작한 이는 한 명 더 있었다. 오랜 시간 도시는커녕 사람 냄새 맡을 수 있는 작은 마을에조차 가본 적 없던 헬르벨이었다. 그는 에빌론의 모습이 생경한지 이곳저곳 훑어보았다.
“헬르벨이 기억하는 에빌론과는 많이 달라요?”
“…비약적인 발전이지.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전쟁 참여를 위해서였고, 그떄의 에빌론은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
“신기하군. 외부인이라면 질색하던 곳이었는데.”
“…좀 더 구경할래요?”
희연의 말에 헬르벨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것이 일종에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료하고 즐거움 따위 모르겠다는 듯이 구는 그에게 에빌론은 좋은 자극제가 되어줄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짐작했다는 듯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도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에빌론에는 관광할 게 많죠! 오리 님도 안 가본 곳이 많으니까 이참에 한번 쭉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좋다 좋다! 우리 다 함께 돌아다녀 봅시다! 전에는 뭐 알아본다고 제대로 돌아보지도 못했는데 잘됐네요!”
“같이 구경해요, 우리!”
희연까지 그 흐름에 합세하자 결국 그는 백기를 들었다. 사실 그 또한 내심 자신이 지켜냈던 전쟁의 중심지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고 싶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그러면 어디로 갈까요? 장인 거리? 그쪽이 볼 게 제일 많기는 해요. 중앙의 광장을 기준으로 각각 특징을 뽑아 여러 갈래의 길로 나뉘는데, 거리마다 특색이 있어요.”
“상업지구도 있어요! 거긴 장인 거리에서 만든 완성품들을 갖다가 팔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 들여온 것들도 많아서 구경하기에 좋죠!”
이곳저곳을 어필하는 두 부길마의 말을 꼼꼼하게 새겨들으며 희연은 헬르벨에게 물었다.
“헬르벨은 어디가 좋아요?”
“무엇이든.”
재미없는 대답이었지만 싫다고 안 한 게 어디인가 생각하며 희연은 고민했다. 에빌론 상세 지도를 꺼낸 쭉 훑어봤지만, 막상 보고 나니 그녀가 실질적으로 가본 곳이 많지 않아 어디가 좋다고 특정 지을 수가 없었다.
“일단 골목길은 빼고, 행정지구도 빼고….”
대표 관광지라는 신전은 절대 안 되고. 분수대는 어차피 싸움터라 구경의 의미가 없고.
지도를 쭉 훑다 발견한 이름에 희연의 손끝이 멈추었다.
“여기는 어때요?”
희연의 물음에 킹스메이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상관은 없는데 콕 집어서 여기인 이유가 있나요?”
“네! 옷 사주기로 약속해서요.”
그 말에 반응하듯 여태껏 조용히 있던 악령이가 슬그머니 모자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희연이 가리킨 곳은 네 갈래로 갈라지는 장인 거리 중 하나인 염색 거리였다.
“음… 그러면 여기 먹자골목 거리를 지나 장인 거리 중앙으로 가서 염색 거리로 들어가면 되겠네요.”
킹스메이커는 가는 길에 주전부리를 먹을 수 있는 루트를 추천해 주었다. 희연은 그 말에 동의하며 지도에 맞는 길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잡힌 인물이 있었다.
“어, 레이?”
그들이 관문을 통과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행정지구 직원 레이가 익숙한 깃발을 흔들며 새로 온 누군가를 환영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그녀 자신을 제외하곤 처음으로 보는 검은 머리의 남자였다.
청산가리와 이전에 만난 마담 또한 검은 머리였지만 두 사람의 머리카락 색은 정확히 말하면 약간 푸른색이 돌도록 커스터마이징이 되어 있었기에 평범한 색은 저 남자가 처음이었다.
함께 있는 백금발의 남자는 뒷모습이었기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차림새로 보아 상당한 고렙의 유저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저쪽도 뉴비 키우기를 하는 걸까, 하고 예상해보던 희연은 문득 검은 머리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잘못한 건 없었지만 빤히 바라보다 들켰다는 점이 조금 멋쩍었다.
“안녕히 가십쇼, 백작님!”
때마침 관문소 병사의 힘찬 외침이 울려 그의 시선이 돌아갔다. 희연이 서 있는 곳과 제법 거리가 있었으나 그녀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백작이라고 불린 금발의 남자가 병사에게 제법 두둑한 주머니를 챙겨주는 것을. 그리고 주머니의 묵직함으로 보아 어지간히 이 도시에서 사고 쳤던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백작이면….”
또한 칭호를 들으니 희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전에 킹스메이커가 신전에서 주최한 경매장에서 끝내 놓치고 말았다며 분노한 목걸이. 그 목걸이를 낚아챈 주인공이 백작 작위를 갖고 있었다고 했다.
유저가 작위를 가진 경우가 흔치 않기에 저 남자가 그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와 킹스메이커가 마주쳐봤자 좋을 것 없다는 생각에 희연은 걸음을 서둘렀다.
다행히도 킹스메이커는 뉴비 없지, 닉과 함께 맛집 목록을 뽑느라 관문소 쪽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의외로 그쪽에 관심을 두었던 것은 헬르벨이었다.
그는 깃발을 팔랑팔랑 흔드는 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연은 그런 그의 모습에 조심스레 질문했다.
“혹시 아는 사이에요?”
“정확히는 나 혼자 아는 사이지. 그는 나를 모르니까.”
“…그래요?”
희연은 그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예상했던 범위의 답이었다. 이전 레이에게 헬르벨에 관해 물을 때, 그는 전혀 모른다는 듯이 굴었다. 반면에 헬르벨은 레이를 아는 눈치였기에 한 번 질문했을 뿐이다.
수도의 정치판에서 패해 이곳으로 온 유배자인 레이와 촉망과 책망을 동시에 받던 전투 신관 헬르벨. 그 둘이 아는 사이였다고 했다면 희연은 내심 걱정했을 것이다.
채도 낮은 붉은 머리를 잠시 눈에 담았던 희연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오리 님, 오리 님! 여기 어때요? 에빌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먹을거리인 설탕 제비꽃!”
“아 그거….”
희연에게는 인맥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던 음식이었다. 레이의 심부름을 하는 김에 나중에 본인도 사 먹어 볼까 하는 생각을 했던 음식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 요른의 빵집에선 하루에 딱 40개만 파는 스페셜 메뉴가 있어요. 둘 다 빨리 안 사면 없는 거라 서둘러야 해요. 어떤 걸 먹으러 갈까요?”
“저는 요른, 이 아니라 설탕 제비꽃이요!”
설탕 제비꽃은 아는 맛일 듯해 요른의 빵을 고르려던 희연은 서둘러 말을 바꿨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이 악령이가 머리를 내밀며 외쳤다.
“나는 빵!”
“…단 거 좋아하잖아.”
“빵도 좋아해! 그거 맛있는 거야!”
요른의 빵이 맛있다는 건 직접 먹어 본 희연이 더 잘 알았다. 하지만 그 빵을 지금 당장 사러 가도 되는가가 문제였다. 희연이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지 못하자 킹스메이커는 그녀가 둘 중 하나를 고르느라 고민한다 생각했는지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러면 우리가 설탕 제비꽃을 사러 갈게요, 여기서 거리가 제법 있어서 살 거면 빨리 가야 하거든요. 오리 님은 헬르벨이랑 같이 요른의 빵집에 가 있어요.”
“어….”
상대적으로 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는 희연을 배려한 킹스메이커 덕분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다만 희연은 그 배려가 조금 곤란했다. 그에 대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인기 많은 물건을 공수하기 위해 출발한 그들의 걸음은 감히 희연이 붙잡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어색하게 든 손을 휙휙 휘저은 희연은 악령이를 모자에서 빼내 안아 들며 헬르벨을 돌아보았다.
“일단 갈까요…?”
내심 헬르벨이 거절하기를 바랐지만, 그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희연이 들고 있던 지도를 본 그는 길을 찾아 먼저 걸음을 옮겼다.
“빨리 가자, 빨리!”
“그래…”
악령이의 재촉에 한숨을 내쉬며 희연은 그의 뒤를 따랐다.
먹자골목 거리는 골목이라는 이름이 붙기에는 길이 좁지는 않았다. 다만 야시장처럼 펼쳐진 좌판 탓에 길이 좁아졌기에 영 어울리지 않는 이름은 아니었다. 어쩌면 먹을거리가 늘어져 있는 모습에 유저들이 익숙한 이름을 갖다 붙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길목이 좁을 뿐 정돈된 거리는 음식을 파는 상인들이 몰린 거리답게 활기찼고 시선을 끄는 향이 가득했다.
불 냄새, 향신료 냄새. 그것들이 한데 섞여 오묘하지만, 입맛을 돋우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악령이는 연신 냄새를 맡으며 침을 꼴깍거렸다.
그 모습을 본 희연은 이거다 싶었다. 그녀는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돈을 꺼내 악령이가 눈을 떼지 못하던 닭꼬치, 솜사탕에 이어 머루 열매즙을 차갑게 굳혔다는 과자와 과연 먹을까 싶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까지 사들였다. 그 끝없는 사치는 지켜보던 헬르벨이 말릴 정도였다.
“…그걸 굳이 살 필요가 있나?”
“맛있어 보이지 않아요?”
어색하게 웃으며 치즈가 들어간 빵을 내미는 그녀의 모습에 헬르벨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에 몇 개 없다는 빵을 사러 가면서 밍기적거리는 것도 모자라 종류가 같은 음식을 굳이 샀으니 의심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어색하게 대치한 두 사람이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악령이는 희연의 팔에 매달려 닭꼬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헬르벨은 마지못해 희연이 내미는 빵을 받아들었다. 가벼운 핀잔은 덤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치하다간 남는 게 없을 텐데.”
“괜찮아요! 나중에 돈 들어올 곳이 있거든요.”
희연은 잠시 아직까지도 만나기는커녕 게임 속에서 연락 한번 안 해본 그녀의 혈육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희연도 백희준도 서로의 닉네임을 몰랐고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당당히 아이템과 돈을 준다고 큰소리쳐놓고 연락이 없다는 점에서 사실 그 말은 허세였고 줄 게 없어 도망 다니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제 혈육을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리는 희연이 신경 쓰였는지 이것저것 먹기에 바쁘던 악령이가 솜사탕을 뜯어 입 앞으로 내밀었다. 희연은 그것을 순순히 받아먹었다가 곧이어 후회했다.
“…솜사탕에서 닭꼬치 맛이 나.”
“앗.”
그제야 제 손에 묻은 닭꼬치 소스를 발견한 악령이가 그것을 제 옷자락에 문질렀다. 덕분에 컨셉상 헤지고 루로의 입질에 구멍 났던 옷이 더더욱 엉망이 되었다. 그사이 희연에게 받은 빵을 한 입 베어 문 헬르벨은 몇 번 씹는가 하더니 변함없는 반응을 내비쳤다.
“어째 죄다 달고 짜군.”
“그게 맛있는 거라니까요.”
“전부 이런 식이라면 더 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그…렇죠.”
더 이상 시간 끄는 것은 불가능했다. 희연은 그 뒤부터는 딴짓하지 않고 제대로 요른의 빵집을 향해 걸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는 사람 냄새가 가득했기에 과거 이곳이 전쟁의 중심이었다는 말을 믿기 힘들게 했다. 그녀는 물론이고 모든 유저들은 모르는 과거의 이야기. 그들에게는 단순히 설정일 뿐이지만 그 시대의 전쟁 참가자였던 헬르벨과 생존자들에게는 다를 이야기였다.
그녀가 망설인 것은 이 이유 때문이었다. 요른. 그는 이곳에서 장인이라 불리었고 그 뜻은 과거 전쟁에서 살아남아 폐허가 된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것이 아닌 뿌리 내리는 것을 택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헬르벨에게 에빌론이 좋은 자극제가 되어주기를 바란 거지 괴로웠던 전쟁 당시를 상기시키려던 게 아니었다, 요른과 헬르벨이 아는 사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짧지만 많은 일을 겪은 희연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둘은 무조건 아는 사이일 것이라고.
“어? 오리 님!”
요른의 빵집의 문을 열기 전, 잠시 심호흡을 하던 희연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냉큼 뒤로 돌았다.
“킹 님!”
“이제 도착한 거예요? 혹시 오는 길에 길 잃었어요?”
“아뇨 길을 잃은 건 아니고 관광을 좀 해서….”
희연의 말에 시선을 내린 킹스메이커는 그녀의 품 안 가득한 먹거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금세 수긍했다. 볼이 빵빵할 정도로 음식을 밀어 넣는 악령이를 보면 누구나 납득 가능했기 때문이다. 킹스메이커는 희연에게 예쁜 보라색 꽃장식이 붙은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여기 설탕 제비꽃 사 왔어요! 요른의 빵 산 다음에 먹으면서 염색 거리로 가요 우리!”
“저, 혼자 들어가서 사 와도 되는데….”
킹스메이커가 희연을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헬르벨이 빵집의 문을 열었다. 내내 수상하게 구는 그녀의 태도에 말이 없다 싶더니 이런 식으로 불만을 표출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답지 않은 행동력이었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활짝 열린 문을 황망하게 바라보는 그녀에게 헬르벨은 말했다.
“안 들어가나?”
“들어… 가야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