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왜 고민했던 걸까 싶을 정도로 허무한 끝이었다. 희연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안에서 그들을 마주한 것은 다행히도 요른이 아니었다.
“요른의 특제 빵 없고, 요른도 없습니다. 저는 일개 알바생이고요, 요른과 내기하러 온 사람은 이따 오세요.”
누가 왔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말하는 그녀는 이전 빵이라는 이름의 빵이 아닌 무언가를 만들어냈던 그 사람이었다. 여전히 요란하기 그지없는 옷차림에 쉽게 그녀를 기억해낸 희연은 조금 반갑다고 생각했다. 물론 요른이 자리를 비웠다는 상황도 그 생각에 한몫했다.
물론 그녀의 존재가 달갑지 않은 존재도 있었다.
“빵 없어…?”
세상이 끝난 것 같은 목소리의 주인은 악령이었다. 어찌나 서럽게 들리는 목소리였는지 내내 이쪽은 보지도 않던 사람의 시선을 끌 정도였다.
“새로 나온 펫? 인형이 말을 다 하네.”
“펫은 아니에요.”
희연의 말에 궁금증이 생겼는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 나왔다. 햇빛이 드는 곳으로 나오자 요란한 그녀의 요리복이 더 눈에 띄었다.
마치 인어의 비늘처럼 요리복에 다닥다닥 붙은 다이아몬드가 빛을 산란시켜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움직일 때마다 울렁거리는 프리즘이 다이아몬드 아래에서 은은하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어떻게 프리즘을 천 안에 담아냈는가 하는 의문이 절로 드는 의상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희연은 새삼 화염 방사기를 무기로 쓰는 요리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참을 요리조리 악령이를 살펴보던 그녀는 희연으로부터 악령이에게 별다른 이펙트나 부가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아낸 뒤에야 몸을 바로 했다.
잠시나마 구경거리가 됐던 악령이는 평소와는 달리 얌전히 희연의 품에 안겨 있었다. 원래라면 진즉 시선을 피해 모자 속으로 숨었을 애가 그러자 희연은 고개를 기울였다.
“아, 빵 없는 게 아쉬워서 그러는 거야?”
축 처진 인형의 심리에 대한 그녀의 추측은 정답이었다. 악령이는 자신이 오는 길에 호로록 삼킨 음식들은 떠오르지도 않는 것인지 먹지 못한 빵만을 그리워하며 시무룩해했다.
인형이 시무룩해 한다고 신기해하던 요른의 빵집 알바생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아쉬우면 내가 만든 거라도 대신 사 갈래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어느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제법 부피 있는 상자의 등장은 모두의 시선을 주목시키기 충분했다. 상자를 열자마자 코끝을 스치는 향이 제법 익숙했다.
“이거… 누네띠네?”
“와 누네띠네다. 저번에 한 박스 6,000원에 샀는데.”
뉴비 없지가 반가운지 질린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상자 안을 보며 말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요리사는 반박했다.
“누네띠네가 아니라 스폴리아티네 글라사테인데요.”
“스폴라티네 글르르르…?”
“스폴리아티네 글라사테.”
킹스메이커가 뉴비 없지에게 제대로 이름을 알려주는 사이 희연은 상자 안을 보며 머뭇거렸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음식이었으나 그녀는 당장에라도 인벤토리에서 끄집어내 무기로 써도 될 정도의 강도를 가진 빵에 대해 알고 있었다.
쉽게 부서지곤 하는 저 누네띠네도 입안에 넣는 순간 강력한 대미지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희연의 생각을 눈치챈 것인지 요른의 빵집 알바생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좋아요. 특별히 시식할 기회를 드리죠.”
“괜찮은데….”
“자! 그쪽도 받고. 어허, 손 펴세요, 어서 받으라니까.”
어느새 각자의 손에는 한입 크기의 누네띠네가 들려지게 되었다. 헬르벨은 자연스럽게 악령이에게 제 몫을 넘겨주었다. 설마 진짜로 먹으면 죽겠어, 라는 생각으로 입안에 넣은 희연은 다행히 부드럽게 씹히는 누네띠네를 삼키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누네띠네 맛이네요.”
“누네띠네네.”
“우리 집에 있는 거랑 똑같다.”
“…짠데요.”
홀로 다른 맛을 느낀 닉의 발언이 있었지만, 다수결의 의견만 듣기로 했는지 누네띠네의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해. 이 정도면 사장님도 내 실력을 인정하겠지.”
“멀었다 이놈!”
갑작스러운 호통에 놀란 악령이가 들고 있던 누네띠네를 떨어트렸다. 바스러진 머랭 조각을 줍기 위해 몸을 숙이는 희연을 발견한 요른이 서둘러 말했다.
“됐다 내가 치우마. 놔둬라! 그리고 너는 내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음식을 팔면…!”
“…안녕하세요.”
잔소리 하던 요른과 눈이 마주친 희연은 뒤늦게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인사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만남을 기억하는지 요른이 희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그래! 그 레이 놈이 제일 최근에 보냈던 이방인! 이제 보니 신관이 되었구나!”
“네! 그렇게 됐어요.”
“이왕지사 직업을 얻을 거면 좀 더 건실한 것을 고를 것이지 어쩌다 신관을 골랐냐. 요즘 신관들은 다 돈에 눈이 멀어 하나같이 찝찝한 것들뿐인데. 쯧쯧쯧!”
그는 순식간에 두 사람을 건실하지 못하고 돈에 눈이 멀었으며 찝찝한 직업을 가진 존재로 만들었다. 희연 본인은 그 말에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헬르벨의 안색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희연을 본 요른이 뒤늦게 헬르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너는….”
요른이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분노한 그의 제자가 테이블을 두들겼다.
쾅쾅-! 쾅쾅쾅! 쾅-쾅쾅-쾅- 쾅쾅쾅!
리듬감이 느껴지는 그 격한 움직임에 요른이 허리에 손을 올렸다.
“또! 또 괜히 화풀이해서 세간살이 망가트리지!”
“장사 좀 합시다, 사장님! 맨날 안 된다고만 하니까 내 이름 걸고 팔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미완성작을 내 가게에서 팔게 해줄 것 같으냐!”
“그러면 차라리 하산시켜 달라! 독립해서 내 가게 차릴 거예요!”
“내 제자랍시고 내 이름 걸고선 이상한 걸 맞는 것처럼 팔려는 그 속셈을 내가 모를까 보냐!”
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킹스메이커가 희연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
“빵 사기는 그른 것 같고, 구경도 할 만큼 했으니 이만 갈까요?”
희연은 잠시 헬르벨 쪽을 보았다. 요른은 그를 아는 눈치였는데 헬르벨의 표정 변화는 워낙에 적었기에 그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요른을 아는 걸까 모르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모른 척하려는 걸까.
이대로 나갈지 말지 결정짓기도 전에 요른의 빵집에는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딸랑-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들어오는 이는 노인이었다. 몸을 지탱한 지팡이는 단단한 검은 나무 지팡이였는데, 신기하게도 생생한 나뭇잎이 달려 있어 가공된 물건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잠시 지팡이에 시선을 빼앗겼던 희연은 곧이어 그 비범한 지팡이의 주인이 그들에게 있어 낯선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눈치챘다. 색이 바래고 먼지가 껴 불투명해진 창문을 보는 것 같은 눈동자의 주인도 시선을 느꼈는지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톨러?”
희연의 목소리에 성성한 머리카락 위에 쓴 모자를 슬쩍 들어 올린 톨러가 눈을 깜박거렸다. 톨러는 마치 오래된 것을 더듬는 것처럼 희연을 보았다. 그러나 끝내 기억해내지는 못했는지 흐린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린 신관님이 나를 아시나 보오?”
“그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그녀가 헤매는 사이 이런 일이 익숙했는지 금세 요른이 앞으로 나서 톨러를 부축해 주었다.
“왜 또 혼자 오셨어! 딸이랑 사위는 어쩌고.”
“사위? 무슨 사위? 그보다 요른 자네 언제 그렇게 나이를 먹었나? 혼자 얼굴에 세월을 맞은 것도 아니고 왜 이리되었어. 어쩌다 얼굴이 이리되었을꼬.”
“…그쪽 얼굴보다는 내가 젊으니 걱정하지 마쇼.”
톨러가 빵집에 오는 일이 잦았는지 세간살이를 부수며 항의하던 요른의 제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 빛을 흩뿌리며 의자를 끌고 나왔다.
“아이고 눈부셔라.”
“오늘도 칭찬 감사합니다. 어르신.”
의자에 앉은 톨러는 제법 긴 시간을 걸었던 것인지 손으로 다리를 콩콩 두들겼다. 그가 손에서 놓은 지팡이는 쓰러지지 않고 꼿꼿하게 세워져 있었다. 마치 주인인 톨러가 지팡이를 잡기 위해 몸을 숙이거나 하는 수고로움을 없게 하려고 만든 것 같은 물건이었다.
그리고 희연은 저런 물건을 만들만한 이들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내심 궁금했던 산골 꼬마 요정들의 근황을 엿볼 수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요른은 이빨이 좋지 않은 사람도 쉽게 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종류의 빵 몇 가지를 담은 접시를 톨러에게 넘겨준 뒤에야 희연의 일행에게 이곳에 온 이유를 물었다.
“그래서. 너희는 왜 내 빵집에 왔지?”
“그야 빵 사러 왔죠?”
“이미 늦은 것 같지만 요른의 스페셜 빵! 있습니까 선생님?”
두 부길마의 말에 요른은 코웃음 치며 거만하게 말했다.
“진즉 다 팔렸다 이 게으른 이방인들아! 내 자랑거리인 빵이 이 시간까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냐!”
늦장 부린 범인인 희연의 양심을 찌르는 발언이었다. 덕분에 희연은 변명하듯 말해야 했다.
“…닭꼬치랑 솜사탕이랑 이것저것 사 줬잖아.”
“…….”
“차라리 말로 하면 안 될까?”
악령이는 은근히 먹을 것을 밝히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악령이가 먹고 싶은 것은 그녀 자신인데 다른 먹거리로 봐주는 게 아닐까 하며 매번 응석을 받아주었던 희연이지만 이쯤 되면 궁금하기는 했다. 진짜로 그런 이유로 먹을 것을 밝히는 거라면….
“킹 님. 원래 유렁들은 항상 배가 고파요?”
“응? 글쎄요. 걔들 먹는 것까지 신경 써 본 적이 없어서요. 음…, 아마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고우니까 먹는 거 아닐까요?”
“…?”
킹스메이커의 말에 따르면 악령이가 음식을 먹는 건 스스로를 단장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희연은 일단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아쉬운 대로 다른 거라도 사서 먹일 생각을 했다.
“그러면 요른, 다른 빵은 살 수 있나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네?”
의아해하는 희연을 보며 요른은 손을 들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자신 몫의 카스텔라를 작게 잘라 악령이에게 내미는 톨러의 손이 있었다.
“…….”
“어서 먹으렴, 아가. 배가 많이 고픈가 보구나. 괜찮아요. 어서 먹으렴.”
악령이는 머뭇거리다 그것을 받아들였다. 톨러는 그 모습에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자, 아가. 이리로 와 보겠니? 여기 빵이 아주 많은데 나 혼자 먹기엔 너무 힘이 드는구나. 나 좀 도와주겠니?”
손을 내미는 톨러에 악령이는 고개를 들어 희연을 보았다. 마치 가도 되냐고 묻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희연은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톨러에게 악령이를 넘겨주었다.
“착하기도 하지.”
빵 접시가 놓인 테이블 위에 얌전히 자리 잡은 악령이는 슬쩍슬쩍 톨러의 눈치를 살피며 빵을 집어 먹었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요른은 희연의 곁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톨러는 훌륭한 무덤지기지. 너는 신관이라는 게 왜 악령을 데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만, 자신 없다면 어서 빨리 헤어지는 게 좋을 거다. 무덤지기와 부두술사, 흑마법사라고 해도 좋은 꼴 못 보는 게 악령이야.”
희연은 내심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지금이야 악령이가 봐주고 있어 무사히 보내고 있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희연이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의 힘인지 둥글둥글하게 구는 악령이에 대한 경계심이 없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이미 악령이라는 존재보다 더한 걸 만나봤기에 유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괜찮아요. 이미 악령보다 더한 거랑 엮여서…. 그래도 쟤는 제 존재를 자기한테 소속시키려고는 안 하잖아요.”
“뭘 하고 돌아다녔길래…, 쯧쯧.”
이 이상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요른은 혀를 끌끌 차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현재 빵집에는 그의 시선을 끄는 존재가 한 명 더 있었기에 희연에게만 잔소리하느라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그것을 눈치챈 희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발을 빼는 것으로 요른이 헬르벨에게 갈 수 있게 길을 터주었다. 요른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말없이 서 있던 헬르벨의 팔을 붙잡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빵 구울 거니까 다 먹고 가든가 해라! 지금이 전쟁하던 그때도 아닌데 왜 이리 삐쩍 곯았어! 내 눈에 띈 이상 그냥은 못 간다!”
“삐쩍? 누가?”
“시끄럽다! 공작은 그렇게 말 많이 하는 거 아니야!”
“아닌데요. 윗사람일수록 말만 많아지는데요?”
“시끄럽대도!”
정작 삐쩍 곯은 사람이 된 헬르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 상황이 당황스럽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