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킹스메이커와 짧게 말다툼하던 요른은 이 장소가 불편하다는 듯 발끝을 움찔거리는 헬르벨을 눈치챘는지 손을 들어 소모적인 말싸움을 끝냈다.
“제자야!”
“넵 사장님!”
허구한 날 싸우는 듯 굴었던 스승과 제자는 오랜 시간 함께했었는지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도 죽이 척척 맞았다. 요른은 그의 제자가 가져온 의자를 톨러의 옆에 두더니 그곳에 헬르벨을 앉혔다. 요른은 희연의 일행에게도 으름장 같은 친절을 베풀었다.
“너희들도 온 김에 갓 구운 빵 먹고 가던가 해! 이방인이랍시고 매일 이상한 것만 먹지 말어! 보기 안 좋아! 저쪽에 의자 있으니 알아서 꺼내던가 말던가!”
화가 난 것 같은 어투와는 달리 굉장히 친절한 말이었다. 어느새 톨러 몫의 카스텔라를 다 먹은 악령이는 요른이 빵을 만들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가자 고개를 까딱까딱거렸다. 그가 무슨 빵을 만들러 갔는지 아는 눈치였다.
의자를 넘기는 것으로 임무를 다한 요른의 제자는 낯선 사람 사이에 홀로 남았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은 듯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눈이 마주친 희연에게 물었다.
“오늘 장사 그른 것 같죠?”
“네?”
“글렀다고 해주세요.”
“글… 렀네요?”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요른에게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어차피 그른 것 같은 오늘 장사! 가게 문 닫고 시원하게 말아먹는 거로 하죠! 사랑스러운 제자는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저, 저, 틈만 날면 아주 놀고 먹을 생각만 하지! 알아서 해라 이웬수야!”
“감사합니다, 사장님!”
요른의 제자는 자신이 언제 불성실한 알바생이였냐는 듯 빠릿빠릿한 움직임으로 문에 걸려 있던 팻말을 뒤집었다. 생글생글 올라간 입꼬리로 보아 조기 퇴근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허리에 매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던지며 가게를 나가려던 그녀는 발걸음을 뒤로 물리더니 누네띠네가 가득 들어있던 상자를 챙겨 와 희연에게 내밀었다.
“?”
“퇴근을 앞당겨준 보답이요. 어차피 못 파는 거고 맛도 나쁘지 않으니까 가지고 다니면서 입 심심할 때 드세요. 그러면 나는 이만!”
[<스폴리아티네 그라사테라고 불러주기 바랐던 누네띠네(제작자 : 사실 내가 굽고 싶었던 건 이 썩어 빠진 세상이었단다)>
: 아직은 제빵이 익숙하지 않은 어느 제빵사가 만든 스폴리아티네 그라사테. 20%의 확률로 소금이 뭉친 누네띠네가 섞여 있다. 먹을 때 주의하자.]
“짠맛 났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닉이 왜 짜다고 했는지 그녀가 깨닫는 사이 굽고 싶었던 세상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곧바로 가게를 탈출했다.
그런 그녀에게 나름 반가웠다는 의미를 담아 손을 흔들던 희연은 조용해진 가게 안 분위기에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악령이는 테이블 위를 돌아다니며 접시에 남은 카스텔라 조각들을 주워 입속에 넣고 있었다. 톨러는 자신 몫의 빵이 가루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헬르벨을 보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묘한 대치를 킹과 뉴비 없지는 매우 흥미롭게, 닉은 덤덤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헬르벨이 고개를 들어 희연을 보았다. 답지 않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은 눈빛에 희연은 잠시 고민하다 냉큼 뛰어가 킹스메이커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지금, 이 순간에는 끼어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신을 그대로 지나쳐가는 희연의 모습에 헬르벨은 손끝을 움찔거렸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를 바라보는 톨러의 눈빛이 굉장히 집요했다. 결국 그 눈빛에 패한 헬르벨이 입을 열었다.
“왜 그리 보시는지요, 어르신.”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나?”
“초면입니다.”
“아니네. 아니야. 자네 같은 금발은 드물지. 금발은 많지만 이렇게 오묘한 색은 흔하지 않아. 내가 자네를 어디서 봤지? 어디서….”
톨러의 손이 헬르벨의 얼굴에 닿았다. 헬르벨은 잠시 움찔거렸지만,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주름진 손은 해가 들지 않는 숲속에서만 사느라 하얗게 변해 버린 뺨을 쓸다 눈꼬리에 다다라서야 떨어졌다. 톨러의 흐릿한 눈 안에 헬르벨의 푸른 눈동자가 담겼다.
“아, 그래. 기억나네. 그 눈. 참 예쁜 청자색이라고 생각했지. 내 아내가 좋아하던 꽃과 비슷한 색이었어. 그래 자네는 분명…, 분명히….”
“…어르신.”
“나는 자네를 기억해. 물론 기억하지. 내 아내의 명복을 빌어주던 그때, 그…, 그 어린 숲지기…. 나와 함께 내 아내의 명복을 빌어주던….”
노인의 눈에는 순식간에 서글픔이 서렸다. 기억을 더듬는 톨러는 그것을 금세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듯, 마치 기록하는 것처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전쟁, 왕의 선택이 늦어서…, 아주 늦었지. 신관들이 왔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은 마을 사람들이, 병사가, 기사가 죽었으니까. 나는 자네를 기억하네. 하얀 옷의 무리들. 그중 가장 어렸던 자네를.”
“…….”
“…신관들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결코 하지 않았지. 산 사람을 돌보기에도 바쁜 신의 손길이 다른 곳을 향할까 봐서. 그래서 자네는…, 신관이 아닌 숲지기로서 명복을 빌어주었지. 그 때문에 함께 왔던 신관들에게 비난받았던 것도, 그래 나는 기억하네.”
톨러는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갑작스럽게 주저앉았다. 놀란 그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톨러는 헬르벨의 손을 붙잡았다.
“유일하게, 자네만이 죽은 이들의 손 하나하나를 붙잡고 기도해줬어. 다른 신관들이 죽지 않은 이들을 돌볼 때 자네만이 죽은 이들을 돌보아주었지.”
“…신관으로서는, 틀린 행동이었습니다.”
“아니, 아니네. 그곳에서 틀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 그곳에 있던 모두가 그저 살고 싶었던 사람이었을 뿐이니까. 비난받을 사람은 없어.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도 없지.”
“…….”
“그리고 나는, 자네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네. 아주, 아주 오랫동안…. 그러니 이름을 알려주겠나? 내가 감사함을 전해야 할 이가 누군지 알려주지 않겠나?”
저주가 풀리지 않았더라면 톨러는 헬르벨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헬르벨이 달빛 요람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전해지지 못했던 톨러의 마음은 그의 기억 저편으로 완전히 넘어가 의미 없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이 장소에 헬르벨은 그 자신으로서 서 있었고 톨러의 기억은 오래전 흔적을 더듬고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는 반짝였다.
“나는 동문 언덕의 오두막에서 사는 톨러라고 한다네. 전사들의 무덤을 지키는 무덤지기이지.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날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었던 자네는 누구이지?”
“…신전의….”
“그래그래. 자네는?”
“…….”
헬르벨은 망설였다. 자신을 보는 노인의 눈을 보다가도 고개 숙여 그 시선을 피했다. 검은 망토를 두른 그는 흰색 일색인 신관복 차림이 아니었기에 스스로를 소개하기 전까지는 신관이라는 사실을 알기 힘들었다. 그는 검은 천 자락을 한참을 바라보다 마침내 자신을 정의하는 말을 내뱉었다.
“…저는, 혜미안 영지의 숲, 그곳 숲지기의 아들인 헬르벨입니다.”
“그래. 어린 숲지기 친구. 나는 자네를 환영한다네.”
[어린 숲지기, 마탄의 사수 ‘헬르벨’]
[<낭만의 악의> 퀘스트 성공! 돌아가서 보상을 받으세요!]
“아….”
헬르벨의 머리 위에 떠오른 그의 설명이 바뀌는 것을 본 희연은 이어 나타난 시스템 창에 탄식을 내뱉었다. 그제야 요정의 성에서 세 번째 조건을 달성했다는 말만 있었지 퀘스트에 성공했다던가, 돌아가 보상을 받으라는 말이 없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조건만 달성한 거였구나….”
에빌론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도 저도 아닌 게 되어버릴 뻔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희연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드디어 헬르벨이 스스로를 인정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단 이 상황을 웃으며 받아들이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뉴비 없지는 감동했다는 듯 훌쩍거리며 두 사람을 보고 있었고, 어느새 따끈따끈한 빵이 올라간 쟁반을 들고 나타난 요른 또한 부릅뜬 눈에 담긴 눈물이 흐르지 못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희연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세요?”
“뭐가, 끄읍, 뭐가 말이냐! 빵 나왔으니까 먹고들 떠들어! 나는, 난 눈에 밀가루가 들어간 것뿐이야!”
쟁반을 테이블에 올린 요른은 앞치마를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하얀 앞치마에 눈물 콧물 자국이 묻어난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희연은 그 점을 모른 척했지만, 킹스메이커는 놓치지 않고 놀렸다.
“우와. 그 앞치마 흡수력 되게 좋네요. 무슨 천으로 만든 거지?”
“끄으읍, 흐엉-!”
“야….”
하지만 이내 요른보다 더 서럽게 우는 뉴비 없지의 곡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놀리고 달래기를 반복한 그들은 데일 정도로 뜨거웠던 빵의 온기가 한숨 간 뒤에야 그것을 맛볼 수 있었다.
“…….”
“?”
악령이는 희연이 먹기 좋게 잘라 건네준 빵을 끌어안고도 한참 동안 멀뚱히 앉아 있기만 했다. 어느새 헬르벨과 톨러와 어깨동무를 하고 우는 듯 웃는 듯 이야기하는 뉴비 없지 덕에 가게 안은 시끌벅적했다.
희연은 그 분위기와 달리 가라앉은 악령이의 머리를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조심히 물었다.
“왜 그래?”
악령이는 희연의 질문에도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까만 두 눈에는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담겨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 있는 건 헬르벨이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희연은 따끔거리는 감촉에 악령이에게서 손을 뗐다.
“…….”
피가 닳았네…?
정전기가 난 것처럼 얼얼한 손끝을 문지르며 희연은 닳아버린 피통을 힐끔 바라보았다. 악령이가 일부러 그녀를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엔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몬스터 비율이 올라간 거다.
뻔히 악령이가 몬스터 쪽에 가까워졌다는 걸 알면서도 희연은 손을 뻗어 악령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매끈한 나뭇결을 따라 희연의 쪽으로 끌려온 악령이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닿은 것만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통 덕에 희연의 심장은 긴장감으로 빠르게 뛰었다. 애써 그것을 티 내지 않으며 희연은 악령이에게 말했다.
“헬르벨이 부러워서 그래?”
“아냐.”
“…헬르벨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부러운 거야?”
“…아냐.”
말과는 달리 악령이의 고개는 푹 수그러졌다. 희연은 그 질투심을 어쩔 수 없는 감정이라고 여겼다. 악령이와 헬르벨은 똑같이 달빛 요람의 숲에 갇혀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악령이는 같다고 생각한 것이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햇빛을 피해 숨어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살아 있었으며, 살아 있는 그를 반겨주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기다렸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자신의 고향을 알며 돌아가 반겨줄 가족이 있다.
헬르벨은 가족을 꼭 끌어안을 수 있고, 어린 동생과 놀아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악령이는 아니었다.
자신을 기억해주는 가족을 찾는다 한들 어스름한 밤에야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는 걸, 반기기보다는 두려워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악령이는 수많은 원혼의 결정체였고, 그만큼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나 이전의 모습은 무엇도 남지 않았다.
반가워할 수만은 없는 존재라는 걸 악령이가 스스로 깨달은 지는 제법 되었다. 희연이 헬르벨에게 걸린 풋낯의 죄인이 되는 저주에 대해 악마에게 따졌던 그 순간부터 알았다.
알아보지 못하면 만나도 의미가 없는 거구나.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꼭 끌어안을 수 없구나. 나를 보지 못하는구나.
악령이는 그것들을 깨달았지만, 숲을 나왔다. 그럼에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훌쩍….”
인형의 까만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빵 위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작은 훌쩍임은 말소리에 묻혀 가까이에 꼭 붙은 희연에게만 들렸다.
희연은 악령이의 눈물 젖은 빵을 받아 내려놓고 작은 인형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어느새 죽음을 경고하는 메시지가 나타났지만, 그녀는 자신이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너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을 거야.”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할 때쯤부터는 더 이상 체력이 닳지 않았다. 요른의 앞치마에 났던 눈물 자국이 희연의 옷에도 똑같이 나타났다.
악령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지만, 희연은 그 자국이 완전히 말라 사라질 때까지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희연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센 악령이도 품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둘은 제법 오랜 시간 서로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