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비세스 메이커 (77)화 (77/251)

77화

***

“자주 찾아와. 너 하나 삼시 세끼 꼬박 빵 먹여 줄 정도는 되는 사람이다 나.”

요른의 목소리는 언제 울었냐는 듯 쩌렁쩌렁했지만, 퉁퉁 부은 눈까지는 가리지 못했다. 톨러는 홀홀 웃더니 헬르벨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래서 자네가 어디서 왔다고 했지?”

“혜미안 영지의 숲에서 왔습니다.”

“그래그래, 그렇구먼. 그래서 어디서 왔다고?”

“…….”

다행히도 끝없는 톨러의 질문은 그의 딸, 잉거가 나타나면서 끝을 맺었다.

“아버지! 또 말도 없이 이곳에 오시면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음, 우리 딸, 잉거인…, 가?”

“맞아요, 아버지. 저는 동문 저택의 주인 톨러의 딸 잉거죠. 오늘도 저 몰래 마실 나온 아버지를 잡으러 왔답니다.”

“그것참 나쁜 아버지구나!”

잉거는 이전에 보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진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챙겼다. 아버지의 팔에 정답게 팔짱을 낀 뒤에야 그들을 발견한 잉거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맑은 미소를 짓는 것으로 인사했다.

“자, 아버지. 이만 집으로 돌아가요. 따뜻한 우유죽을 만들어 드릴게요.”

“그래, 그러자꾸나. 그런데 그거 아니 아가? 사실 난 우유죽을 좋아하지 않았단다. 하지만 가장 많이 먹어 본 음식은 우유죽일 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좋아하니까.”

“그럼요. 제가 가장 잘 알죠.”

잉거의 팔을 꼭 잡고 지팡이를 짚으며 나아가던 톨러는 문득 몸을 틀더니 헬르벨을 향해 다정히 말했다.

“그러면…, 어린 숲지기 친구. 고향을 찾아 잘 돌아가기 바란다네.”

“…예, 어르신.”

헬르벨이 검은 망토를 팔에 걸쳤기에 그가 입은 금색 수가 놓인 하얀 신관복이 잘 보였다. 누구라도 그를 보는 순간 신관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것, 중요한 것 모두 잊고 마는 톨러는 이럴 때면 상대가 가장 바라는 점만큼은 기억해주었기에, 헬르벨은 어느 검은 눈의 꼬마 요정이 그랬던 것처럼 눈을 크게 뜨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오리 님, 오리 님.”

“네?”

배웅하고 인사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웃고 있던 희연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팔을 톡톡 두들기던 킹스메이커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헬르벨의 퀘스트, 완료된 거죠?”

“네!”

“음…, 그러면 이제 보상을 받으러 신전으로 가야 하는데. 염색 거리로 간다고 했으니 그곳부터 갈까요, 아니면 신전 먼저 갈까요?”

선택권을 주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며 고민하던 희연은 얼마 안 있어 결정을 내렸다.

“염색 거리부터요. 옷 사주기로 약속했으니까요.”

그리 말하며 그녀는 품에 안긴 악령이를 힐끔 바라보았다. 울다 먹고 잠든 인형은 노곤노곤한 모습으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자는 척일 텐데.”

희연은 킹스메이커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인형을 안고 있는 본인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킹스메이커의 말을 듣자마자 괜히 꼼질거리는 악령이를 잘 챙긴 희연은 헬르벨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신전부터 가면 아무래도….”

“아하. 아무래도 그렇죠.”

그녀의 의중이 무엇인지 눈치챈 듯 킹스메이커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음에도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선 종이 한 장을 끄집어내더니 한참을 그 위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없지 없지. 가서 이것 좀 사다주라.”

“이게 뭔데?”

뉴비 없지는 종이 안을 빼곡하게 채운 목록을 훑어보더니 헬르벨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에 희연은 그 안에 써진 목록이 헬르벨과 연관된 것들이라는 걸 눈치챘다.

“나 혼자 사러 가?”

“없지는 몇 살?”

“혼자 가면 외로운데….”

그의 시선은 어느새 조용히 서 있던 닉에게로 향해 있었다.

“…….”

“길마님. 없지는 외롭찡.”

“…….”

희연은 닉이 저렇게까지 싫어하는 건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달라붙는 뉴비 없지에게 패배한 닉은 찰싹 붙은 거구의 성기사를 떨쳐내며 빠르게 걸어 나갔다.

“같이 갑시다, 길마님!”

“…빨리 와요.”

멀어지는 두 사람을 멀거니 바라보던 희연은 킹스메이커의 재촉에 그제야 고개를 바로 했다.

“자, 그러면 우리도 염색 거리로 가볼까요? 그리고 이거!”

“?”

눈앞에 내밀어지는 연한 보랏빛 꽃을 보며 눈을 깜박이던 희연은 꽃을 이루는 자잘자잘한 알갱이를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어 그것을 받아먹었다. 킹스메이커가 대신 사러 갔다 온다고 했던 설탕 제비꽃이었다.

“와….”

희연의 입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요정의 성에서 씹어 먹었던 설탕 잔과 비슷하지 않을까 했던 그녀의 예상을 뒤엎는 맛이었다. 입에 넣자마자 사르륵 녹은 설탕은 단순한 설탕의 단맛 이상을 맛보여 주었다. 꽃잎처럼 부드러웠고 과일즙의 단맛처럼 상큼했다. 삼키고 난 다음엔 조금의 텁텁함도 남기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금 맛본 것을 머릿속에 되새기는 희연을 보며 킹스메이커는 작게 웃었다.

“맛있죠?”

“네!”

희연은 단것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이왕지사 먹을 거면 머릿속까지 화끈해지는 매운맛이 그녀의 취향이었다. 그러나 이건 달랐다. 취향을 넘어서는 맛이었다.

연신 눈을 빛내는 희연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설탕 제비꽃이 든 봉투를 건네주었다.

희연은 언제 잠들었냐는 듯 초롱초롱 눈을 뜬 악령이의 입에 그것을 물려주었다. 톨러가 간 길목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헬르벨과 그런 헬르벨을 힐끔거리기만 하는 요른에게도 내밀었다. 킹스메이커는 오는 길에 먹었다며 거절했다.

“맛있죠? 맛있죠!”

“…그래.”

심심한 대답이었으나 한 입 베어 물었던 것을 다시 입안에 넣는다는 점에서 헬르벨 또한 설탕 제비꽃이 마음에 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흥! 이런 달기만 한 것보다는 배가 든든한 내 빵이 훨씬 낫지!”

요른은 툴툴거리며 설탕 제비꽃을 와작와작 씹어 삼켰다. 아무래도 요른의 빵과 설탕 제비꽃이 에빌론을 대표하는 명물이다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나는 아저씨 빵도 맛있었는데!”

“그 인형 참 맛볼 줄 아네! 훌륭한 미각이야!”

“…….”

“…잠깐, 인형이 미각이 있나?”

새로운 설탕 제비꽃 하나를 더 입에 문 악령이를 본 요른은 어딘가 찝찝한 얼굴을 하더니 희연의 품에서 인형을 잡아 헬르벨의 품속으로 욱여넣다시피 넘겼다.

“?”

“?”

봉변을 당한 한 인형과 한 사람이 서로를 당황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이 요른은 희연의 목덜미를 붙잡더니 그대로 그녀를 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요른?”

“톨러가 가기 전에 물었어야 했던 건데, 너! 저 악령이랑 같이 다녀도 괜찮은 것 맞냐?”

“그렇죠?”

“한 번도 공격당해 본 적이 없어? 공작이 저 악령이 위험하다 뭐 이런 경고도 안 줬어?”

“…그건 왜 물어보는 거예요?”

그의 질문에 차마 부정할 수는 없었던 희연은 질문의 의중을 물었다. 악령이가 위험하다는 것 자체는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심지어 이젠 헬르벨이 안고 있어도, 뉴비 없지가 가까이와도 싫다고 난리 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몸이야 진즉 회복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걸 숨긴다는 점이 수상하다는 것 또한.

요른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게 얌전히 착한 척 있는다고 정말로 순하다고 믿지 말아라. 악령이랑 엮이면 좋은 꼴을 못 봐. 네가 이방인이라고 해도 말이다.”

“괜찮아요.”

“아니, 괜찮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

“…너. 다 알고 있었구나?”

곤란한 듯 웃기만 하는 희연을 보며 요른은 인상을 찡그렸다.

“악령이가 저를 한번 살려준 적이 있어요. 그래서 한 번쯤은 죽어줄 수도 있어요. 보는 눈이 없는 죄로 대가를 치른다, 하면 되니까요.”

“속도 좋다!”

“별로 그런 건 아닌데….”

희연은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어색하게 있다 헬르벨에게 설탕 제비꽃을 넘기는 악령이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는 이번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악령이가 저를 죽일 것 같지 않거든요.”

요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악령이는 정에 약했고 그건 희연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마주친 인형은 어서 빨리 와 자신을 챙기라는 것처럼 짧은 손을 흔들었다.

***

염색 거리는 의상과 관련된 모든 것이 있는 곳이다. 염색약, 염색 천, 직물, 재봉기술자, 실, 가죽, 레이스, 장식품. 처음 그 설명을 들었을 때 희연은 염색 거리가 아닌 재봉사의 거리나 패션의 거리 같은 이름이 더 어울리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먹자골목 거리를 지나 광장에 도착해 염색 거리로 가는 길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염색 거리라는 이름이 이곳에 가장 알맞은 이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와….”

쨍쨍한 햇빛 대신 그녀의 얼굴을 덮은 것은 불그스름한 그늘이었다. 곧이어 푸른 그늘이, 보랏빛 그늘이, 기하학적인 무늬의 그늘이 얼굴 위를 일렁거리며 뜨거운 햇볕을 막아주었다.

위층에 사는 집집의 창가에는 기다란 줄이 매달려 있었고 이곳의 사람들은 염색한 천을 그곳에 걸어두었다. 어떤 것은 햇빛을 완전히 막을 정도로 두꺼운가 하면 어떤 것은 바람 한 점에도 흔들릴 정도로 얇디얇았다. 진주 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이는 것도 있었고 금실을 뽑아 천을 만든 것처럼 눈이 부신 것도 있었다.

희연은 그중 다른 것들에 비해 확연히 길어 그녀의 앞에서 살랑거리는 천을 슬쩍 만지작거리다 손을 뗐다. 눈이 어지러운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조금은 독한 염색약 냄새라던가 가죽 냄새, 그것을 정제하기 위한 약품 냄새가 이곳저곳에서 풍겨 왔지만 바람이 많이 부는 길목이었기에 크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바람이 불 때면 냄새와 함께 흘러가는 것들이 많았다. 줄에 걸린 천이 그러했고, 작은 행상인들의 천막이 그랬고, 반짝이는 장식들, 실타래 등이 그러했다. 짤랑거리고 눈부신 거리였다.

“살려는 게 악령이 옷인 거죠?”

“네!”

좌판에 늘어진 깃털 장식에 한눈 팔렸던 희연은 킹스메이커의 물음에 그제야 고개를 바로 하며 인형 옷을 팔 만한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먹을 것 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던 악령이 또한 화려한 염색 거리의 모습에 푹 빠졌는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고, 그런 악령이를 힐끔거리는 상점 주인들이 많았다.

요른과 톨러가 아무렇지 않게 대하길래 유령 들린 인형이 흔한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생각하며 희연은 비교적 멀찍이 서서 걸어오는 헬르벨을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악령이 옷 말고도 따로 사고 싶은 게 있는데….”

소곤거리며 말하는 희연의 뒷말이 무엇인지 예상된다는 듯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서히 걷는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인형 옷은 저쪽의 골목을 돌자마자 보이는 빨간 천막을 따라 쭉 가다 보면 나와요. 그리고 헬르벨에게 선물할 만한 물건도 그쪽 방향에 있죠. 천막의 색이 초록색으로 바뀌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는 사냥꾼을 위한 물건이라는 뜻이에요. 선물은 몰래 해야 의미가 있겠죠?”

그녀는 생글생글 웃더니 어느새 그들의 곁으로 온 헬르벨의 목에 팔을 걸었다. 킹스메이커의 키가 그보다 작았기에 그녀는 폴짝 뛰어야 했다.

“무슨….”

“웃어요. 웃어. 우리는 저쪽 골목길로 갈 거니까.”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불량스러운 말과 달리 헬르벨에게 매달린 킹스메이커의 발끝은 대롱대롱 흔들렸다. 그 모습은 자칫 우스워 보일 수도 있었지만, 킹스메이커의 그 완력만큼은 진짜배기였기에 웃는 이는 없었다.

희연은 킹스메이커를 떨치기 위해 손등에 핏줄이 설 만큼 힘을 준 헬르벨을 슬쩍 보다 악령이를 데리고 그녀가 말했던 골목을 향해 뛰어갔다.

“우리끼리 가는 거야?”

“응!”

품에 얌전히 안겨 있다 꾸물거리며 머리 위로 올라간 악령이는 오랜만에 희연과 둘이 있다는 점이 좋은 것인지 연신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희연은 골목길을 돌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며 빨간 천막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시끌벅적한 좌판이 아닌 막다른 골목이었다.

“어…?”

한낮임에도 어둡게 느껴질 정도로 높게 쌓여 있는 벽에 잠시 당황한 희연은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그녀는 분명 일직선으로 뛰어왔었다. 그런데 앞에는 막다른 골목길이 있었고 그녀가 왔던 길은 사라졌다. 어두운 골목길에 갇히게 된 희연은 일단 침착하게 킹스메이커에게 연락을 했다.

[채팅 불가 지역입니다.]

“…….”

희연은 이 상황이 낯설지만은 않다는 것이 단순 착각이 아니리라 생각했다. 고립과 함께하는 채팅 불가. 한 사람의 게임 인생에서 겪기엔 그리 흔한 일이 아님에도 별로 놀랍지가 않았다.

“왜 자꾸…,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그녀의 첫 고립 때 공격하던 당사자인 악령이에게 물어봤지만, 당연하게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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