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희연은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듯 말했다.
“이번엔 진짜 별다른 조짐이 없었는데…. 나 뭐 이상한 곳에 들어올 만한 조건 같은 걸 갖췄나?”
“몰라!”
“그치… 나도 몰라.”
영양가 없는 대화에 희연은 허허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대략이나마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원래 그녀가 있던 염색 거리는 염색한 천들을 잘 말리기 위해 바람이 많이 부는 길목을 골라 자리 잡은 거리다. 그렇기에 어디서든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도 습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희연이 선 골목길은 같은 구역의 골목길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바람 한 점 없었고, 축축했다. 오래된 이끼가 낀 벽은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희연은 일단 총을 꺼내 들었다. 하늘을 향해 몇 번 쏘고 기다려봤지만, 범법자다, 를 외치며 잡으러 왔어야 할 병사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에흐테.”
[펫 소환 불가 지역입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고립임을 알려주는 글귀였다.
“우리 어디에 갇힌 걸까?”
“우리 갇힌 거야?”
“응, 갇힌 거야.”
길을 잃었을 때는 돌아다니지 말라는 말에 따라 가만히 서 있었던 희연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변하는 것이 없자 그제야 슬금슬금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저쪽으로 가려고?”
“저곳 말고는 길이 없으니까.”
원래라면 희연이 들어왔던 골목길의 입구가 있어야 했던 곳. 환한 햇빛과 알록달록 좌판이 있어야 했을 그곳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길게 이어진 길을 눈으로 훑으며 희연은 일단 미로가 아닌 것 같다는 점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골목길의 길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갈래였다면 어지간히 머리가 아팠을 것이다.
“일단…, 가자.”
마음을 굳게 먹고 걸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햇빛이 들지 않을 뿐 어둡지는 않던 골목길에 뉘엿뉘엿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희연은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현실의 시간과 이곳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안에서 있는 동안에 유저들은 그 현실과 비슷한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그런데 지금 희연은 기이할 정도로 해가 빨리 진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길게 늘어지던 그림자가 사라지고 어느새 밤이 되었다. 희연이 평범하고 눅눅한 이끼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밤이 되자 은은히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산골 꼬마 요정들의 동굴에서 보았던 탄자냐처럼 말이다.
희연의 시선이 잠시 이끼 쪽으로 홀린 사이 그녀의 발끝은 어느새 길목의 끝에 다다랐다. 희연은 머리 위를 톡톡 두들기는 악령이의 행동에 퍼뜩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광장?”
평화의 상징이라 불리는 거대한 분수대가 있는 에빌론의 광장을 똑 닮은 장소였다. 다만 이곳은 그곳처럼 활기 넘치지 않았다. 넓은 광장에 있는 것은 분수대가 유일했다. 그 분수대는 오랜 시간 동안 관리받지 못한 것처럼 물이 메말라 있었고 이곳저곳이 부식되어 있었다. 녹슨 장식은 야광 이끼의 빛조차도 반사 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 분수대 앞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염색 거리에 좌판을 낸 다른 상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검은 천막을 두른 작은 좌판을 차린 사람이.
희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실제 광장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이곳으로 오는 길은 그녀가 걸어온 길뿐이었다. 사방을 둘러싼 벽은 얼마나 두꺼운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곳은 마치 거대한 덫처럼 보이는 장소였다.
묵직해 보이는 검은 망토를 쓴 상대는 두터운 러그 위에 물건을 늘어트려 놓았는데, 가짓수는 많았지만 그중 용도를 알아볼 수 있는 물건은 얼마 되지 않았다.
희연은 손안에 쥔 총을 다시 한번 잘 잡은 뒤 천천히 검은 망토의 상인에게로 걸어갔다. 그녀는 한 발 한 발 조심히 내디뎠지만 거대한 벽에 둘러싸인 광장 안에선 그 작은 발소리마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든 상인은 검은 망토 사이에서 주름진 손을 내밀더니 그녀를 향해 살랑살랑 흔들기 시작했다.
“이리 오게나. 가까이. 더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옳지.”
어느새 희연의 발끝에는 두터운 러그가 닿았다.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물건은 읽을 수 없는 문자로 적힌 책이었다. 그 옆으로 이름 모를 말린 풀 한 묶음, 아주 아주 얇고 투명한 비단, 오래되어 악취를 풍기는 손목시계와 연한 가죽신, 사람의 형상을 닮은 뿌리 식물이 담긴 모래시계가 차례로 눈에 띄었다. 그 외에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물건들이 잔뜩 있었다.
그 기이함에 희연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떨떠름해 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그런 그녀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상인은 껄껄 웃으며 질문했다.
“겁먹은 이방인 친구. 무엇을 사기 위해 왔나?”
“…저는 그냥 길을 잃어버린 거예요.”
“으음? 그럴 리가. 자네, 내게로 오는 열쇠를 갖고 있잖나. 그가 보내어 온 게 아닌가?”
“열쇠요?”
희연이 열쇠가 무엇인지 영 모르는 눈치이자 상인은 그제야 정말로 그녀가 그저 길을 잃었을 뿐이라는 걸 눈치챘다.
“허허, 거참. 그런 거였군. 그런 거였어. 이런 우연이 있나. 나는 자네가 영락없는 그자의 수하인 줄 알았다네. 손에 든 것도 그렇고 우연에 우연이 겹쳐 얻은 그 장물도 그렇고.”
손에 든 거?
상인은 손에 든 것이라고 표현했지만, 시선은 그녀의 머리에 매달린 인형을 향해 있었다. 악령이와 장물. 희연이 가진 물건 중 장물이라고 불릴 물건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그중 가장 값져 보이고 반짝이는 걸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뱀?”
뱀 모양으로 통째로 세공된 에메랄드 목걸이.
“옳거니. 자네도 아예 모르는 건 아니구먼.”
추측이 정답이었으나 희연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맞다고 맞장구치는 상인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나며 희연은 러그 위 물건들을 다시 쭉 훑어보았다. 뱀과 관련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상인은 그런 희연을 재밌다는 듯 웃으며 지켜보았다.
“그렇게 본다고 답이 나오겠나? 보아하니 파이퍼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거군!”
“파이퍼요?”
희연은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악령이는 아니었다. 누구보다 그 이름의 주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파이퍼.”
“악령아?”
“파이퍼…, 파이퍼, 파이퍼!”
쾅-!
희연이 상황을 파악한 것은 시야를 가린 먼지와 돌가루가 가라앉은 다음이었다. 그녀의 머리에 매달려 있던 인형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녀의 시선은 절로 밑으로 향했다.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발 바로 앞에서부터 분수대 너머까지 땅이 모두 갈라져 있었다. 명백하게 상인을 노린 공격이었다.
희연은 떨어진 인형을 주워들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시야에 다 잡히지 않을 만큼 거대한 모습을 취한 악령이가 광장의 벽을 짚으며 검은 천막의 주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막은 뒤집혔고 두터운 러그는 갈가리 찢어졌다. 그 위에 전시되다시피 올려져 있던 물건들이 돌바닥 위로 널브러져 있었다. 상인은 뒷짐을 지고선 여유로운 태도로 악령이를 올려다보았다.
[이름 없는 악령 : 파이퍼….]
“이보게 자네. 이 악령이 뭐라고 하는 겐가?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군. 짐승의 소리를 알아듣는 재주가 내게는 없거든.”
허허 웃는 상인의 태도는 지금 이 상황을 조금도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희연은 들고 있는 총을 보며 고민했다.
이 거리에서 저 상인을 맞출 수 있을까?
콰르릉-!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악령이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새까맣게 변한 손이 벽을 쓸자 기왓장이 무너지는 것처럼 벽돌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희연이 올라오는 먼지구름에 눈이 따가워 앞을 제대로 못 보는 사이 악령이는 상인을 낚아챘다.
[이름 없는 악령 : 나는 너를 알아. 너는 손목시계 장수야. 약초꾼이고, 사서이지. 들판의 야시장을 찾아온 상인이며 상인들 사이에 섞여 들어온 이방인이지.]
[이름 없는 악령 : 우리는 너를 봤어. 밤마다 불붙인 약초를 들고 거리를 돌아다녔어. 우리는 너를 봤어. 동화책을 읽어주겠다며 밤사이 광장으로 오라고 했지. 우리는 너를 봤어. 네가 죽은 우리를 파이퍼에게서 샀어. 수레에 이고 가 버렸어.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
“콜록-! 콜록-!”
아무리 먼지구름이 많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했다. 희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빨갛게 충혈된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옷소매로 입가를 가려도 소용이 없었다. 끝없는 기침에 괴로울 지경이었다.
발끝에 차이는 잔해를 피하며 간신히 걸음을 옮기던 희연은 잔해 밑에 섞여 타오르고 있던 향을 발견했다. 먼지구름에 섞여 향에서 피어오른 연기를 보지 못한 것이다. 희연은 계속해서 나는 기침이 이것 때문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녀는 보이는 족족 그것을 발로 짓밟아 끄며 서둘러 악령이가 있는 쪽으로 뛰었다.
“인벤, 콜록, 콜록, 인벤토리…!”
[이름 없는 악령 : 너도… 뱀이구나.]
[숨겨진 퀘스트 <길을 잃은 아이들>의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검은 천막의 상인들]
상인은 품 안에서 사슬을 끄집어냈다. 희연이 힐두르로부터 받았던 그 사슬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상인은 그것을 곧바로 악령이를 향해 집어 던졌다. 영혼을 속박하는 사슬은 악령이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물건이었다.
쾅-! 쾅-!
사슬에 묶인 악령이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다 상인을 놓쳤다. 높이 날아올라 떨어져 한참을 잔해 속을 뒹굴다 일어난 상인은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지 사뿐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두건이 벗겨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의 반절에 비늘이 돋아난 기이한 외모였다.
손에 쥔 사슬 끝을 잡아당기며 뱀같이 웃던 상인은 발버둥을 멈춘 악령을 바라보며 히죽였다. 어느새 힘이 빠진 악령이는 다시 조그마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후우…. 파이퍼 그놈은 일 처리가 매번 완벽하지를 못하니 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이방인, 자네. 그만 나오시게나. 거기 있는 거 다 안다네.”
상인은 악령이를 묶은 사슬을 질질 끌며 희연을 찾기 위해 잔해 사이를 돌아다녔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먼지구름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구역의 특성상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나마 시야가 트인 곳은 악령이로 인해 바람이 일어나 먼지구름이 가신 상인의 주변뿐이었다.
탁, 타닥.
잔해가 많은 장소에서 사람이 소리 내지 않기는 힘들었다. 조금만 발을 잘못 내디뎌도 작은 돌조각 같은 것들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상인은 여유롭게 웃으며 사슬을 쥐지 않은 손으로 품에서 칼을 끄집어냈다.
귀 기울이고 있던 그는 기침도 참고 숨어 있는 희연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돌 조각 떨어지는 작은 소리에 금세 반응했다.
“잘 가시게나 이방인 친구!”
먼지구름을 헤치고 뒤쪽에서 달려오는 인영을 향해 상인은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그의 칼이 벤 것은 희연이 아니었다. 그가 벤 것은 밤 한 자락이었다.
[<열흘 달밤의 꿈>이 상대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희연은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면서도 상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이거나 먹어라!”
쨍그랑-!
희연은 뒤집어썼던 망토를 거두며 손에 쥐고 있던 유리병을 휘둘렀다. 유리병은 정확히 상인의 머리를 맞추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 안에 담겨 있던 검은 액체를 뒤집어쓴 상인이 비틀거리는 사이 희연은 발을 들어 그의 명치를 발로 찼다.
“커헉…!”
상인이라 내구력이 약한 것인지 그는 희연의 발차기에도 쉽게 뒤로 넘어졌다.
[<악의의 응집>을 명중시켰습니다. <검은 천막의 상인 필루스>가 혼란에 걸립니다. 절망합니다. 의욕이 상실됩니다.]
[복합적 저주에 걸립니다!]
“아아악-!”
머리를 내리친 유리병으로 인한 고통인지 복합적 저주로 인한 고통인지 모르겠으나 상인은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을 굴렀다. 서둘러 총을 꺼낸 희연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곧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콜록, <회개하세요>!”
머리와 심장. 전형적인 약점이 되는 위치였다. 희연은 둘 중 상대적으로 더 맞추기 쉬운 머리를 노렸다. 검은 액체로 범벅이 된 머리에 환하게 빛나는 빛의 총알이 날아가 박혔다.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희연은 자신의 공격력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개하세요>, <회개하세요>, <회개하세요>, <회개하세요>… <회개하세요>! 콜록, 콜록!”
그러나 상인은 죽지 않았다.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며 희연은 아연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이래도 안 죽는다고…?”
아, 이건 좀 많이 곤란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