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물론 희연이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머리 한가운데에 명중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머리라 함은 관자놀이, 눈 등 약점으로만 이루어진 신체 기관으로 조금만 잘못 맞아도 위험한 부위였다. 그녀가 발로 찼을 때 넘어졌던 점을 생각해 보면 상인은 방어력이 그렇게 높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상인은 처치되지 않았다.
그나마 희연이 추측할 수 있는 건 얼굴 반절을 차지한 비늘이 장식이 아닌 방어구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 추측의 사실 여부는 얼마 안 있어 확인할 수 있었다.
상인이 손을 들어 얼굴을 덮은 악의의 응집의 끈적한 검은 액체를 닦아내자 비늘로 덮이지 않은 쪽의 얼굴에 난 자잘한 생채기가 드러났다.
머리가 약점이 아니었네….
심장을 노렸어야 했다. 희연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상인은 쉭쉭거리며 숨을 내뱉었다. 희연은 상대가 언제 자신에게 달려들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도 따끔거리는 눈에서 눈물이 났기에 부릅뜬 눈이 마를 일은 없었다.
상인이 내는 쉭쉭 소리는 단순한 뱀의 소리 같기도 했고, 방울뱀의 방울 소리 같기도 했다. 뭣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굉장히 위험해 보이는 소리였기에 희연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스스스슥-스스스슥-
소리는 점차 점차 커지더니 어느새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희연은 상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은 함정이고 소리가 들리는 쪽에 진짜 상인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 생각에 확신할 수 없던 것은 희연은 정말로, 단 한 번도 상인에게서 눈 뗀 적이 없었다는 거다. 비늘에 덮인 얼굴을 손에 묻고 희연을 노려보고 있는 상인은 환상 같은 게 아니었다. 먼지구름이 그의 주변을 맴돌 때면 흐트러졌고, 뚝뚝 떨어지는 악의의 응집은 바닥에 검은 자국을 만들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소름 끼치는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바로 뒤에서 들렸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고개를 돌릴 것인지 계속 앞만 볼 것인지.
그 순간, 앞만 보던 그녀의 시야에 반짝하고 익숙한 창이 떠올랐다.
[이름 없는 악령 : 뒤….]
“후우.”
희연은 숨을 들이마시며 재빨리 뒤돌았다.
[탄환이 변경됩니다. 일반 탄환 >> 마법 탄환]
희연의 총구 앞에 작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마법 탄환으로 변경해 생긴 효과였다.
그녀에게 남은 MP는 고작해야 30. 원래라면 유일한 공격 스킬인 <회개하세요>를 두 번은 쓸 수 있는 수치다. 하지만 마법 탄환으로 변경했기 때문에 한 발당 MP 5가 필요하다. 여기에 공격 스킬까지 사용한다면 필요한 MP는 20. 실질적으로 그녀에게 남은 공격 스킬 기회는 단 한 번뿐.
남은 10이라는 수치로 할 수 있는 건 변경된 탄환으로 하는 평타 두 번. 희연은 부디 그 두 번이 일반 탄환보다 훨씬 뛰어나기를 바랐다.
탕-!
첫발은 버리는 패였다. 악령이의 말만 듣고 뒤돌았기에 희연은 상대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다행히 우려심에 쏜 첫 총탄은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 있던 상인의 왼쪽 뺨을 맞췄다. 뱀 비늘이 덮이지 않은 쪽의 얼굴이었다.
마법 탄환은 확실히 일반 탄환과는 달랐다. 작은 폭발과 함께 터진 총알은 상대에게 확실한 대미지를 주었다. 만약 조금만 더 망설이며 뒤도는 것이 느렸다면 당하는 건 그녀였을 것이다. 폭발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의 거리였다.
상인은 마법 탄환의 대미지는 예상 못 한 듯 주춤거렸다. 그러나 금세 고통을 떨쳐내더니 눈을 희번덕하게 떴다. 세로로 쭉 찢어진 뱀눈을 보자 목덜미가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희연은 비늘이 덮이지 않은 얼굴 쪽으로 총을 휘둘렀다.
퍽-!
MP가 부족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또한 도발이기도 했다. 그녀의 경험상 언제나 적은 총으로 맞는 것에 대해 매우 당황해하고 분노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처구니없는 공격에 분노한 상인은 곧바로 희연을 물어뜯기 위해 입을 쩍 벌렸다. 아무런 방어 기제도 갖지 못한 새빨간 입안의 내부가 보였다. 사람과 뱀의 구강 구조로 반반씩 닮은 그 안은 뾰족한 이빨로 빽빽했다. 혀는 길고 얇았으며 목구멍은 한 번에 큰 먹이를 집어삼키기 위함인지 무척이나 넓었다.
희연은 팽창하는 입안의 동굴을 끝까지 바라보며 총을 들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총을 들었는지 눈치챈 상인은 서둘러 입을 닫았다. 아주 짧은 시간, 수두룩 빽빽한 이빨이 닫혔고 마법진을 거치며 강화된 탄환이 그 이빨을 부수며 폭발했다.
탄환이 코앞에서 터졌기에 희연 또한 피해를 보았다. 위협적으로 날아오는 이빨 조각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려 했던 그녀는 상인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구멍 뚫린 이빨은 아무런 방어 기제를 갖진 못한 약점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남은 기회는 한 번이었고 지금 실패하면 다신 기회가 없다는 생각으로 희연은 총을 든 손을 이빨의 구멍 사이로 쑤셔 넣었다.
“<회개하세요>!”
넓게 팽창되어 있던 목구멍 안으로 스킬을 담은 마법 탄환이 삼켜졌다. 희연은 서둘러 손을 빼내며 상인의 몸을 걷어찼다.
쾅-!
[<검은 천막의 상인 필루스>를 처치하였습니다!]
[압도적인 상대에게서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경험치 상승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아 제한에 들어갑니다.]
[레벨 업! x5]
“…콜록, 콜록.”
마법 탄환에 공격 스킬이 더해지자 그 위력은 산골 꼬마 요정들의 동굴을 부수던 사냥꾼들의 마폭탄과도 비슷했다. 사냥꾼들이 사용하던 것은 싸구려 하급 마폭탄이였고, 희연의 공격 또한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대단한 위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둘 다 몸 내부에서 터지면 위험하다는 점은 사실이었다.
희연은 기침을 내뱉으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코앞에서 터진 폭발의 충격 탓에 바닥을 구르느라 꼴이 엉망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새까맣게 그을려 죽은 상인을 보던 희연은 뒤늦게 팔을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안 물린 거 맞나?”
급한 마음에 입에 총부터 쑤셔 넣었다. 독이 뚝뚝 떨어지는 독니에 팔이 물렸던 건 아닌지 뒤늦게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도 팔은 잘 움직였다.
그나마 여유가 생긴 희연은 힘이 풀린 다리를 질질 끌며 상인의 옆으로 갔다. 인벤토리에서 물약을 꺼내 입에 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콜록, 콜록…. 어쩐지 느리더라.”
상인을 자세히 살펴본 희연은 자신이 이길 수 있었던 게 단순 운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의 다리는 얼굴처럼 비늘로 덮여 있었는데, 마치 곰팡이가 핀 것처럼 희끗희끗한 것들이 묻어나 있었다. 악의의 응집이 내린 복합적 저주였다.
물약을 모두 마신 희연은 병을 대충 아무 곳에나 던진 뒤 여전히 눈만 희번덕 할 뿐 움직임이 없는, 그녀가 뒤를 돌 때까지 내내 지켜보았던 상인 쪽으로 움직였다.
조심히 손을 들어 툭 쳐보자 상인의 모습을 한 그것은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희연은 어렵지 않게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등 쪽으로 쭉 찢어진 흔적이 있는 얇은 외피. 뱀. 그건 일종에 허물이었다.
허물의 손에 꽁꽁 묶여 있던 사슬을 풀어내 자신의 손목에 감은 희연은 그 사슬을 쫓아 걸었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쓰러져 있는 악령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잔해더미를 밀쳐내자 작은 유령이 꼼질거리며 짧은 팔을 내밀었다. 희연은 곧바로 그 손을 잡아주려다 멈칫했다. MP 물약만 먹은 게 떠올라서였다.
남은 피가….
상인은 그녀의 바로 앞에서 폭발했다.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는 않았다곤 해도 멀쩡하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그렇다고 보는 앞에서 물약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대놓고 악령이를 몬스터 취급한다는 뜻이었다.
악령이는 그런 희연의 잠깐의 망설임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슬그머니 내밀었던 팔을 뒤로 물렸다. 먼지투성이가 된 희연보다도 더 짙은 색을 띤 자신의 모습에 대해 자신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 모습을 보며 희연은 요른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악령과 함께하면 좋은 꼴을 못 본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닐 테지만 지금의 상태가 엉망진창인 건 사실이었다.
희연은 먼지투성이인 손을 옷에 슬쩍 문질렀다. 하얗기만 하던 옷도 지저분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변하는 건 없었다. 악령이는 그런 희연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보았다.
얼룩덜룩한 손을 활짝 펴 악령이의 앞에 내밀며 그녀는 물었다.
“나 손 더러운데 괜찮아?”
악령이는 눈을 끔벅끔벅거리더니 사슬에 꽁꽁 묶인 몸을 일으켰다. 작은 유령이 날아오는 내내 사슬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광장을 울렸다.
“…다음부터는 다짜고짜 덤비면 안 된다, 너.”
희연의 손에 몸을 냅다 파묻은 악령이는 답인지 꼬물꼬물 움직이며 몸을 웅크렸다. 그런 악령이의 몸을 반대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사슬을 풀어내려 하던 희연은 역시나, 이번에도 풀리지 않는 사슬에 한숨을 삼켰다.
“크흠, 나가서 풀어달라고 해야 하나….”
킹스메이커라면 풀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몇 번 더 사슬을 잡아당겨 보던 희연은 본인이 푸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인형 속으로 들어가면 사슬이 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팔에 걸쳐놨던 망토 속에서 메리 인형을 꺼냈지만, 희연은 그 생각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나름 조심한다고 챙겼던 것이 무색하게도 인형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악령이가 인형 속에서 뛰쳐나오며 내던져질 때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칠 수 있겠지?”
도자기 인형의 섬세함을 얕본 자신을 원망하며 희연은 그것을 인벤토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들고 다니기엔 더 망가질까 봐 겁났고, 저주받을 것 같아 겁났기 때문이다.
여전히 목은 칼칼하고 눈물이 찔끔 났으나 연기가 많이 가신 덕에 희연의 상태는 썩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대충 옷을 털고서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기 위해 광장 안을 차근차근 돌아다녔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광장의 유일한 통로는 희연이 나왔던 골목뿐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왔기에 그 끝은 막힌 길이라는 걸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검은 천막의 상인을 해치웠으니 혹시나 다른 길이 나오지 않을까 했던 희연은 한참을 둘러본 뒤에도 다른 길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으음….”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뒤집힌 천막 아래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물건을 발견했다. 용케 그 난리 통에도 찢어지지 않은 알 수 없는 문자의 책이었다.
그 외엔 건질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손목시계는 유리판이 깨져 바늘이 사라졌고, 천과 가죽신 같은 경우엔 찢어져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풀 다발은 흩어졌고 모래시계는 깨졌다. 그 안에 들어 있던 사람을 닮은 뿌리 식물은 이미 썩어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책을 챙겨 먼지를 털어낸 희연은 전리품으로 이거 하나는 챙겨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펼쳤다.
“와….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
표지의 제목에서부터 예상했지만, 종이를 빼곡하게 채운 문자 중 희연이 읽을 수 있는 건 단 한 글자도 없었다. 그것을 요리조리 돌려보던 희연은 눈만 침침해진다는 결론을 내리고 책을 덮었다. 킹스메이커에게 준다면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은 덤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이 광장에선 챙길 것도, 얻을 것도 없다 생각하며, 이곳의 유일한 길이자 자신이 나왔던 길 앞에 섰다. 분명 그녀가 처음 있었던 곳은 막다른 골목이었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다. 검은 천막의 상인을 해치워도 나타나지 않았던 길이 사실 그녀가 처음 있었던 그 골목 끝에 있을지.
희연이 골목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악령이는 사슬을 질질 끌며 희연의 어깨에 올라탔다. 나름 제 딴에는 그녀의 다리가 사슬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다만 그 배려 하나로 해결되기엔 사슬이 길다는 게 문제였다.
악령이가 실망하지 않도록 희연은 몸에 엉켜드는 기다란 사슬을 잘 추스른 다음 손목에 빙빙 둘러맸다.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감고도 남아 흘러내리는 사슬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두었다. 덕분에 걸을 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뱀 소리와 함께.
“…….”
툭, 걸음을 멈춘 그녀 앞에 때마침 있던 작은 돌조각이 채이며 날아갔다. 짤랑이는 소리는 멈추었지만, 비늘이 바닥을 쓰는 듯한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곳저곳에서 벽의 작은 잔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희연은 어깨에 떨어지는 잔해를 힐끗 바라보다 뒤를 돌았다. 저 멀리, 광장의 벽. 악령이의 공격으로 쩍쩍 금이 갔던 그 벽의 틈새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희연은 굳은 상태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움직인 것은 뺨을 톡 치는 차가운 손길에 흠칫 놀란 뒤였다.
[이름 없는 악령 : 무너진다!]
“아….”
설마설마하던 생각이 사실임을 알려주는 악령이의 메시지에 희연은 침음을 흘렸다. 희망과 동심의 동화 세계가 테마인 주제에 이 게임은 언제나 그녀에게 그와 반대되는 것들만 주었다.
희연은 입술을 짓씹으며 팔에 걸쳤던 검은 망토를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누군가의 공격이 아닌 이런 무너지는 잔해물로 인한 공격도 무효 처리해 주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열흘 달밤의 꿈>이 상대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진짜 막아주나?”
공격으로 인식될 정도로 큰 잔해가 떨어진 건가 걱정하는 사이 희끗희끗한 무언가가 희연의 앞을 스치고 날아갔다. 반사적으로 뛰던 것을 멈추고 궤적을 쫓아 고개 돌린 그녀는 발견한 물건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끼의 푸른 빛을 반사하는 그건 분명 단도였다. 이제 공격 무효 효과를 받을 수 있는 횟수는 단 한 번뿐. 언제 어디서 다시 단도가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점에 희연은 간담이 써늘해졌다. 그러나 희연은 앞으로 달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광장의 벽은 골목길의 벽과도 이어져 있었다. 굉음이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붙은 상황이었다. 단검의 위협보다 생매장의 위협이 더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