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달리는 내내 희연을 노린 단검의 수는 총 다섯이었다. 그중 둘은 망토를 피해 팔다리 같은 위치에 자잘한 생채기를 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셋은 악령이가 막았다.
악령이는 입을 동그랗게 말아 후, 하며 바람을 불어내는 것으로 단검을 막아냈다. 지친 상태에서 힘을 쓴 탓인지 악령이는 그 세 번의 입김 이후 다시 기절했다.
다행인 점은 길목에 장난질은 없었다는 거였다. 이제 와서 미로 같은 함정이 있으면 어쩌나 했지만 그런 희연의 우려와 달리 골목길은 여전히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것은 막다른 벽. 그리고 그 벽에 흩뿌려진 야광도료의 불빛이었다.
“마법진…!”
벽에 그려진 마법진을 희연은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 푸른 빛은 이끼의 색과 같았고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두서없이 흐트러진 얼룩 덩어리로 보였다.
하지만 점차 벽과 가까워지면서 그려진 그림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 희연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발을 더 빠르게 놀렸다.
이끼의 빛마저 마법진을 잇는 선이었다. 벽에 새겨진 빼곡한 문양과 글자를 알아보는 재주가 희연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 마법진을 보자마자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중앙에 차지한 문양만큼은 바로 알아봤기 때문이다.
킹스메이커가 그녀를 길드 성으로 초대했을 때 스크롤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 다른 건 몰라도 중앙에 새겨진 세 개의 사각형이 삼각형 모양으로 겹쳐진 그림만큼은 그녀도 기억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마법진의 사용법이었다. 스크롤의 경우 찢어야만 그 안에 담긴 마법이 발동되었다. 그러나 그 경우를 생각하며 벽을 찢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낯선 문물의 등장에 잠시 발걸음이 느려졌던 희연은 짧은 시간 머리를 굴린 끝에 그냥 들이박자고 결정을 내렸다. 무너지는 길목에 가만 서 있으면 죽지만 벽에 좀 들이박는다고 죽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생각이 정답이었는지 희연이 가까이 갈수록 벽 위에 새겨진 마법진은 더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제 됐다는 생각에 마음 놓고 웃던 희연은 목 뒤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열흘 달밤의 꿈>이 상대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마지막 남은 기회마저 전부 사용했다. 희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손끝이 간신히 벽에 닿은 순간, 희연은 똑똑히 들었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오는 날붙이의 소리를. 눈이 아릴 정도로 마법진이 빛났다.
“아…!”
아릴 정도의 눈부심을 이겨내고 간신히 눈을 뜬 희연은 예상하지 못한 높은 시야에 잠시 당황했다. 그녀의 발은 땅을 밟고 있지 않았다. 희연은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 발이 꼬여 넘어졌다.
탕-
뒤쪽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희연 또한 분명 그 소리를 들었지만 뒤돌아 확인할 정신은 없었다. 이번에는 진짜 죽는구나 싶어 눈을 질끔 감고 벽에 뛰어들었던 그녀는 거칠어진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간신히 진정하고 뒤돈 희연이 보게 된 것은 활짝 펼쳐진 부채 한가운데 박힌 단검의 날이었다. 거의 코앞에 있는 날카로움에 희연은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그녀의 시선은 부채 너머의 벽, 빛이 꺼진 마법진에 잠시 닿았다 부채의 주인 쪽으로 움직였다. 주저앉아 있었기에 희연의 시선은 상대의 발끝에서 위로 향했다.
앞코가 반짝이는 검은색 단정한 구두와 연미복을 지나 얼굴에 쓰인 안경에 시선이 닿은 뒤에야 희연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마담?”
“이정보입니다.”
희연의 말에 답하며 마담은 부채를 거두었다. 단검에 시선을 뺏겼던 그녀는 뒤늦게 그 부채가 무척이나 화려한 종류의 물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비싸 보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담은 값비싼 부채가 망가진 것쯤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다소 무성의한 손짓으로 부채에 박힌 단검을 비틀어 빼냈다. 구멍 뚫린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는 그에게선 까칠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진정도 했고 구경도 다 했다면, 왜 저 마법진에서 튀어나왔는지 이젠 설명을 들어도 될 것 같은데.”
“어…, 그게.”
“설명은 천천히 들어도 되잖아. 일단 치료부터 하자.”
“?”
마담에게 대강의 사정을 설명하려 했던 희연은 부드럽게 끼어든 누군가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살포시 걸어와 마담의 옆에 섰다. 곧고 긴 금발 머리의 여자였다.
그녀의 금발은 탁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헬르벨의 것과는 달리 여리고 봄기운이 서린 것 같은 색이었다. 눈동자 색은 그보다 더 진한 금색이었는데, 농도가 다른 금색이 선해 보이는 외모와 어우러지자 달콤하고 느긋해 보인다는 인상을 주었다.
“신관복…?”
신기했던 것은 그녀의 옷차림새였다. 금실이 섞이긴 했으나 헬르벨의 옷도, 희연의 옷도 흰색 위주였다. 그러나 그녀는 손등을 덮은 장갑이나 허리에 걸친 긴 끈 같은 것들을 제외하곤 모조리 새까맣게 물든 신관복을 입고 있었다.
신기해하는 희연을 발견한 것인지 그녀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다 인벤토리에서 크리스털 병을 끄집어냈다. 그러고선 희연의 턱을 잡아 고정했다.
“저기…?”
“자, 금방 끝나요. 눈 감으면 안 돼요.”
“으픕…!”
인상만큼이나 다정한 어조였다. 그녀는 희연이 당황하는 사이 거침없는 손길로 얼굴에 물을 뿌렸다. 다짜고짜 병에 든 물을 뿌릴 거라 예상 못 한 희연은 피하지도 못하고 그 물을 다 맞아야 했다. 코가 찡한 느낌에 괴로워하는 희연을 보며 검은 신관복의 여자는 안쓰럽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저런…. 많이 힘들면 다른 치료도 해줄까요?”
이 괴로움의 탓이 본인 때문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어조였다. 황당함에 희연은 고개를 치켜들었고, 그녀가 보게 된 것은 선한 얼굴에 걸맞지 않은 험악한 채찍을 뺨에 톡톡 두들기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살려주세요.”
간신히 그 이상한 공간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싶었는데 더 이상한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희연은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은 사실이라는 걸 절절히 느꼈다.
한쪽은 즐기고 한쪽은 괴로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마담은 희연이 살려달라고 빈 뒤에야 부채를 접으며 끼어들었다.
“다짜고짜 채찍을 들이대면 누구나 오해해, 마리아.”
“난 친절을 베푼 거야. 독에 당한 것 같아서 눈도 치료해 줬는걸? 이거 비싼 성수야.”
“감사 인사를 받고 싶으면 채찍을 내려놔. 그쪽도 그만 일어나죠? 남들이 보면 우리가 괴롭히고 있다고 오해하겠네.”
까칠한 말과는 달리 마담의 행동은 매우 친절했다. 손수 희연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워 준 그는 먼지투성이인 그녀의 차림새에 혀를 차며 손으로 툭툭 털어주었다. 매우 숙련된 솜씨였다.
흰색 일색이기에 유난히 더 지저분해 보였던 희연의 꼴이 그나마 사람 꼴처럼 보이기 시작했을 때쯤 허리를 편 마담은 손을 탈탈 털며 물었다.
“그래서, 왜 저 마법진에서 나왔죠? 장비 보니 아직 저렙 같은데 뒷골목에 혼자 있고… 킹은 어딨어요? 아니, 애초에 걔가 여기 데려온 거 맞아요?”
“아뇨 저는… 저도 제가 왜 여깄는지 모르겠어요….”
희연의 말에 마담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반응에 희연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그녀 자신부터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담은 희연에게서 더 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틀어 벽에 새겨진 마법진을 손으로 훑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마리아라 불린 검은 신관복의 여자가 물었다.
“뭐 좀 보여?”
“아니. 감지 스킬로도 안 떠. 아까까지만 해도 뭐가 있긴 했는데 지금은 그냥 낙서야. 일회성 마법진이었나 본데. 물어보지만 말고 너도 와서 좀 봐.”
두 사람이 마법진을 살피는 동안 희연은 팔에서 힘을 풀고 꼭 끌어안고 있던 악령이를 살펴보았다. 손을 들어 조심이 뺨을 쓸어보자 고체보단 기체에 가까운 느낌이 났다. 손을 조금 더 내려 몸에 묶인 사슬을 쭉 당겨 본 희연은 이곳에서도 풀리지 않는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마법진에 대한 대략적인 조사를 끝냈는지 손에 묻은 흙 검댕을 손수건에 문질러 닦던 마담이 희연에게 말했다.
“일단 킹 불러줄 테니까 여기 있어요. 그 사슬은 만지지 말고.”
그의 말에 서둘러 사슬에서 손을 뗀 희연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게 지어진 건물 탓에 햇볕이 들지 않는, 건물 사이의 빈틈으로 만들어진 공간. 이전에도 와 본 적 있던 에빌론의 골목길이었다.
희연은 이전에 정보 길드에 가느라 골목길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녀가 몰랐던 건 정보 길드는 그나마 골목길 중에서도 양지바른 곳에 있다는 점이었다. 기억하는 것보다 더 우울하고 위험한 분위기에 희연은 긴장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깊은 곳에 있는 골목길은 들어오는 길도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덕분에 킹스메이커가 오는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 긴 시간 동안 마담은 마법진을 종이에 베껴 그리기 시작했고 마리아는 희연의 주변을 서성이며 그녀를 관찰했다.
반짝이는 금색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희연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아뇨. 별로요.”
“아, 그러시구나….”
조금 더 기다려 보았지만, 그 이상 마리아가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희연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스르륵 내리며 아예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은 악령이의 머리를 반복적으로 쓰다듬는 중이었다. 나름의 심신 안정을 위한 행동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바닥의 타일을 더듬던 눈은 얼마 안 있어 하얗기만 한 자신의 신관복과 완전히 대비되는 마리아의 옷 쪽으로 향했다. 희연이 자신을 관찰한다는 걸 눈치챈 마리아는 그녀의 옆에 똑같이 주저앉았다. 휘어지는 눈웃음이 그녀를 친절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봐도 되는데. 옷이 검은색이라 신기하구나?”
“네….”
“전 르센이 아닌 미르그 측 소속이거든요.”
“미르그면….”
킹스메이커가 준 책 중 유일하게 읽었던 책에 나온 이름이라는 걸 떠올린 희연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잘못하면 목을 날려 버린다는….”
“네. 그 1급 청정수 교단이요.”
목을 날린다는 게 진짜였다는 점에 희연은 조금 아연실색했다. 마리아의 어조로 보아 현재 진행형인 관습인 것 같았다. 희연은 새삼스레 신기한 기분으로 마리아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런 험악한 교단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선한 인상이었다. 아니, 선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교단인 건가? 그렇게 따진다면 마리아는 그야말로 티끌 하나 없는 선인이라는 뜻이 된다.
희연은 마리아를 신기해하는 거였지만 마리아는 그녀가 미르그 교단에 흥미가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마리아는 오랜만에 친절을 발휘하기로 마음먹었다.
“흰색은 신전 관련 직업이라는 뜻이고 르센과 미르그를 가리키는 상징색이 각각 금색과 검은색이에요. 집단에 속해 있고 그 집단의 상징색이 있는 직업들은 이 점을 유의해서 장비를 고르는 게 좋거든요. 그래서 저는 검은색 위주의 신관복을 입고 있는 거죠.”
“그렇구나….”
“킹이 안 알려줬어요? 신전 관련 책을 줬다거나.”
“어….”
그 책을 보지 않았다. 희연의 반응이 어떤 의미인지 눈치챘는지 마리아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에 걸린 것도 모르는 눈치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그 이유를 알겠네요.”
“독이요?”
“아까 제가 성수 뿌렸잖아요. 눈 엄청 빨갰어요.”
“아, 그래서….”
기침은 멎었으나 여전히 그녀의 목은 계속 까끌까끌했다. 눈물도 말랐지만 따끔거림은 남아 있었다. 희연은 곰곰이 언제부터 고통이 사라졌나 생각해 보다 성수를 맞은 뒤부터였다는 걸 떠올렸다.
어떻게 그걸 이제야 눈치채나 싶을 수 있었지만 워낙에 마리아의 등장이 강렬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세례 다음에 눈앞에 채찍이 아른거리는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사고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
희연은 마리아가 조금 특이한 방식으로 친절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도 마리아는 행동이 격할 뿐이지 말로 하는 설명 쪽은 매우 친절했다. 그녀의 조언은 희연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독 관련 책은 읽어두도록 해요. 신관은 독이랑 관련 없는 직업이라 직접 책을 보고 깨우쳐야 시스템도 독에 당했을 때 이런 독에 걸렸다, 하고 알려주거든요. 그거 몰라서 독에 당한 줄도 모르고 중독돼서 죽는 경우도 많아요.”
“저도 제가 독에 걸린 지 몰랐어요.”
어쩐지 피 통이 많이 닳았더라. 희연은 뒤늦게 그 점을 짚어냈다. 당연히 그것이 상인과의 싸움, 떨어지는 잔해, 코앞에서 터진 폭발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체력이 깎인 건 기침을 할 때부터였다.
“고렙인데도 모르는 사람 은근 많아요. 알아도 책 보기 귀찮아서 안 익히는 사람도 은근 많고. 사실 렙 좀 먹으면 웬만한 독은 걸려도 안 죽어서 신경 안 쓰는 경우가 많죠.”
책을 보라는 킹스메이커의 조언은 정말로 피와 살이 되는 조언이었다. 희연은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책을 보고 독 좀 알았다고 해서 그 상황에서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중독되었음을 인지했다면 해독제를 먹든가 해서 눈물 짜며 켁켁거리는 상황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그놈에 기침 때문에 숨을 때 들킬까 봐 마음 졸였던 것을 생각하면 지식을 익히는 걸 게을리한 것이 후회될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는 그 뒤로도 이것저것 조언을 아끼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희연과 같은 직업이라 그런지 다양한 방향으로 알려주는 킹스메이커와는 달리 신전과 신관이라는 직업 위주의 조언이 주를 이루었다.
“미르그 교단으로 소속을 옮기면 퀘스트가 시작되는데 3개월 동안 교단의 암살자로부터 살아남아 하는 생존 퀘스트로….”
“…우와.”
킹스메이커와 헬르벨이 나타난 것은 마법진을 모두 베낀 마담이 뻐근한 목을 스트레칭할 때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