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오리 님!”
복잡한 골목을 헤매며 들어오는 시간 낭비 따위 할 수 없다는 듯, 킹스메이커는 낡은 벽을 부수며 등장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는 헬르벨이 보였다. 다행히 벽이 없어진 집은 빈집이었다.
킹스메이커는 마담이 한 번 털어주고 마리아도 한 번 털어주었으나 여전히 꼬질꼬질한 신관복 차림을 한 희연을 보더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킹스메이커에게 마담은 말했다.
“유난 떨지 말고 온 김에 이것 좀 봐줘. 마법진이라 해석이 필요해.”
“오리 님 어쩌다 이런 곳에 혼자 들어오게 된 거예요? 누가 데리고 온 거예요? 갈취당했어요?”
“야.”
“시끄러워 알아서 해석해. 나 바빠.”
마담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그녀는 냉큼 희연에게 오더니 더러워진 옷이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꼭 끌어안으며 걱정의 말을 늘어트렸다.
“염색 거리에서 여기까지 완전 반대 방향인데….”
“그게, 킹 님이랑 헤어졌던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이상한 곳으로 이동되었어요. 뱀이랑 관련된 것 같은 곳이었는데….”
“뱀?”
혀를 차며 종이에 베낀 마법진을 다시 점검하던 마담이 뱀이라는 말에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희연이 말하는 뱀에 관해 무언가 아는 눈치였다.
그런 그의 반응은 희연에게 혹시,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마담의 직업은 정보상이었다. 뱀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마담은 짚이는 것이 있는지 희연에게 적극적으로 질문했다.
“그 얘기 좀 자세히 해 봐요. 이 마법진도 뱀이랑 연관된 거죠?”
“…아마도요?”
“뭘 보고 들었는지 말해 봐요.”
마담은 마치 악수를 청하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희연은 뜬금없는 악수 신청에 당황해하며 머뭇거렸다. 그런 두 사람의 사이에 킹스메이커가 끼어들며 마담을 저지했다.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마담의 손을 쳐 낸 킹스메이커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수작 부리지 마. 나 올 때까지 오리 님 보호해 준 건 고맙지만 거기까지야. 은근슬쩍 물타기로 정보 얻을 생각하지 마, 너.”
마담에게 경고를 날린 킹스메이커는 어정쩡하게 내민 희연의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오리 님. 절대 마담이랑 악수하면 안 돼요. 얘 스킬이 악수하는 상대랑 무조건 거래를 진행하는 거예요. 그게 정보든 물건이든 거래 진행자인 마담이 만족할 때까지 거래는 안 끝나요.”
“진짜요…?”
“네. 진짜.”
희연은 어떻게 그런 사기를 칠 생각을 할 수 있냐는 비난의 의미를 담아 마담을 보았다. 그러나 남의 등쳐 먹는 것 정도는 일상인 그에게 희연의 눈빛은 별 타격이 없었다. 그저 정보를 얻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찰 뿐이었다.
그 모습을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던 마리아가 슬쩍 손을 들었다.
“킹, 나도 안 알려줄 거야? 나 네 소중한 뉴비 님을 위해 성수까지 썼는데. 그거 완전 비싼 건데. 귀한 건데.”
“돈으로 줄게.”
“날 뭐로 보는 거니 친구야. 내가 겨우 돈에 넘어갈 사람으로 보여? 제대로 봤어. 당장 거래 창 열자 나의 베스트 프렌드.”
청렴하지 않으면 목을 날려 버리는 교단 출신답지 않은 현금거래였다. 희연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본 마리아는 그저 환하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희연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여태껏 말없이 기척을 죽이고 있던 헬르벨이 입을 열었다.
“그런 것 치곤 별별 사람 다 믿으면 다니지 않았나?”
“제가요?”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는 희연의 모습에 헬르벨은 차례로 손짓했다. 킹스메이커를, 희연의 품속에서 잠든 악령이를.
희연은 그 손짓에 눈을 깜박이다 그의 손을 잡아 그 자신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스스로를 목록에 추가시키게 된 모습에 헬르벨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게요.”
“……,”
희연과 헬르벨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킹스메이커와 마리아도 거래를 끝냈다. 허공을 바라보던 두 사람의 시선이 흩어졌다. 만족스러운 거래였는지 마리아의 표정은 더없이 환해져 있었다. 자비롭고 다정해 보이는 미소였다.
마리아는 아직까지도 불만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서 있던 마담의 팔을 붙잡더니 킹스메이커에게 말했다.
“돈 값은 해야지. 얘는 걱정 말고 이만 가봐.”
“야, 이거 안 놔?”
“와! 맡기고 가도 되는 거지, 마리아?”
“그럼! 내가 이래 봬도 교단에서 성녀라 불리는 사람이야. 돈 먹은 값만큼 일하는 걸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알잖아.”
“마리아, 이거 당장 놔! 너도 가지 마. 우리 얘기 다 안 끝났어. 야! 마법진! 마법진 해석하고 가!”
셋이 친군가?
희연은 친근해 보이는 세 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기울였다. 흑마법사와 정보상과 성녀의 조합이 신기해 보여서였다. 킹스메이커는 친구의 부탁을 아예 무시할 생각은 없었는지 마담의 손에서 마법진을 베껴 그린 그림을 챙겼다.
“자, 내가 이걸 해석해 주면 넌 교국의 성 지하 지도를 가져다주는 거야.”
“제정신이야?”
“교국이 내 홈그라운드인 건 알고 내 앞에서 그런 거래 하는 거지?”
“네 입막음은 마담이 할 거야.”
“신나라.”
“야!”
마담은 발버둥 치며 거부했지만 낮아진 목소리로 몇 마디 오가자 점차 마리아에게 매달려 있던 몸에 힘을 풀기 시작했다. 여차여차 결국 서로가 이득인 거래를 맞췄는지 킹스메이커는 종이를 팔랑거리며 희연에게로 달려왔다.
킹스메이커는 희연을 번쩍 안아 들더니 빙글빙글 돌렸다. 희연이 킹스메이커보다 키가 컸기에 아슬아슬하게 발끝이 바닥에 끌렸다.
“우리 오리 님!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전 괜찮아요. 다 치료받았어요.”
성수 세례는 격하긴 했지만, 효과가 매우 좋았다. 현재 급한 건 희연이 아닌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악령이었다. 희연은 킹스메이커가 자신을 놓아주자마자 끌어안고 있던 악령이를 내보였다.
“악령이는 괜찮은 걸까요? 아까부터 못 일어나는데…. 그리고 이 사슬이 풀리지를 않아요. 혹시 킹 님은 풀 수 있어요?”
“잠깐만요…, 어디 보자. 사슬은 일단 여기서는 못 풀 것 같고. 악령이 상태는….”
킹스메이커는 진중한 모습으로 악령이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보며 희연은 괜스레 초조해지는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그녀 자신이 악령이를 치료해 주고 싶었지만 반대되는 상극이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비슷한 속성 계열인 흑마법사 킹스메이커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희연은 내내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킹스메이커에게서 답이 나온 뒤에야 희연은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일단, 상태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에요. 뭘 했던 건지 얘기를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힘을 다 썼는데 해 쨍쨍한 낮이기까지 해서 못 일어나는 거예요. 이따 밤 되면 일어는 날 거예요.”
“다행이다….”
희연은 다시 악령이를 챙겨 품에 안았다. 꾸벅꾸벅 움직이는 머리가 이제야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악령이한테 묶인 사슬은 당장 못 풀지만 일단 이거 기장이라도 좀 줄여줄게요.”
킹스메이커는 희연이 팔에 칭칭 감아둔 사슬을 풀어냈다. 촤르륵 떨어지는 사슬은 얇지만, 그 길이가 꽤 길었기에 제법 무게가 나갔다. 희연은 가벼워진 팔을 휙휙 돌리며 뒤로 물러났다.
“<우짖는 새의 설움>.”
사슬 위를 내리치는 낫 위로 불길한 검은색과 보랏빛, 붉은색이 뒤섞인 빛이 일렁거렸다. 킹스메이커가 자주 쓰던 검은 새가 나오는 스킬과 비슷한 스킬이었다.
쨍-!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사슬이 끊어졌다. 킹스메이커는 잘려 나간 사슬을 보더니, 쓸모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인벤토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자, 그러면 이제 오리 님도 구출했고, 거래도 끝냈고. 할 일 다 했으니 이만 나갈까요?”
“네!”
드디어 골목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희연은 힘차게 대답했다. 이전에는 골목길에 대해 별생각 없었으나 이상한 공간에서 몇 시간을 고생했더니 당분간은 그림자 진 골목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마담과 마리아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 그들은 제법 조심스러운 태도로 골목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킹스메이커는 골목길에서 시끄럽게 굴어 좋은 것이 없다 조언했다. 그런 것치고 본인은 오는 길에 벽을 잔뜩 부쉈지만 말이다.
희연은 킹스메이커를 따라 밖으로 나가면서 자신이 얼마나 깊은 골목길 한가운데 떨어졌는지 체감했다.
미로처럼 느껴질 정도로 다닥다닥 붙은 건물이 만들어낸 길은 좁았고 깊었다. 조용했으며 어두웠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같은 낮 시간에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이 생경할 정도였다.
마침내 골목길에서 완전히 벗어나 익숙한 에빌론의 광장에 나온 뒤에야 희연은 조금 굳어 있던 어깨에서 힘을 뺄 수 있었다. 광장에서 들리는 시끌벅적함이 익숙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런데 저 정말로 완전 반대되는 곳에 있었네요.”
반갑게 느껴지는 풍경에 주변을 둘러보던 희연이 말했다. 킹스메이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담한테서 연락받았을 때 진짜 놀랐어요. 방금 헤어졌는데 뜬금없이 골목길 중에서도 가장 깊다는 뒷골목에 있다고 해서, 에휴.”
“…방금이요?”
희연은 분수대 옆 시계를 찾아 고개를 들었다. 이상한 공간에 빠져 그렇게 긴 시간을 보냈는데 정작 이곳에선 그리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그마저도 골목길에서 이곳까지 오느라 소비한 시간이었다.
그런 희연의 모습에 킹스메이커는 그녀가 시간의 흐름이 다른 곳에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저 진짜 어디에 있었던 걸까요….”
“그건 이걸 해석해보면 알 수 있겠죠. 받아 오길 잘했네요. 오리 님이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당장 듣고 싶지만 그건 천천히 듣도록 하고.”
“나중에 천천히 설명할게요.”
“좋아요, 좋아. 그런데 메리 인형은 잃어버린 거예요?”
“아…. 아뇨. 잃어버리지는 않았는데 그게 좀.”
머뭇거리던 희연은 결국 인벤토리에서 메리 인형을 꺼내 킹스메이커 앞에 내밀었다. 멋쩍어하는 희연의 반응에 킹스메이커는 웃어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악령이가 이 지경이 됐는데 숙주인 인형이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숙주….”
그렇게 말하니 메리 인형이 살아 있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희연은 묘한 기분으로 메리 인형을 살펴보았다. 금이 간 도자기 인형은 밝은 데서 보니 상태가 더 심각했다.
파스스 떨어지는 도자기 조각, 제각기 다른 곳을 보는 눈과 덜렁거리는 팔. 원래부터가 귀신 들린 인형 같았지만, 지금은 그 기괴함이 더해진 상태였다. 눈만 마주쳐도 저주에 걸릴 것 같았다.
“이건 완전히 망가져서 고치려면 공방으로 가져가야 할 것 같은데요. 당장은 못 고치겠어요.”
“죄송합니다….”
“정말로 괜찮아요! 인형이야 뭐…, 여러 개 있기도 하고. 굳이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악령이가 인형 안에 들어가기라도 해야 회복이 쉽다는 점 정도?”
망가진 인형을 몇 번 만지작거리던 킹스메이커가 무슨 장치를 건드린 것인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인형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안 터져서 다행이네….”
“…?”
방금 안 터져서 다행이라고 말한 걸 들은 것 같은데…. 에이 설마.
희연은 설마하니 킹스메이커가 인형 안에 폭탄 같은 것을 넣었겠거니 하며 자신이 잘못 들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
안 넣은 거 맞겠지?
희연이 고민하는 사이 킹스메이커 또한 짧은 고민을 했는지 그녀는 헬르벨을 돌아보며 물었다.
“헬르벨. 여기서 우리랑 헤어진 뒤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었죠?”
“…….”
그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희연이 골목에서 헤매는 사이 두 사람 간의 대화가 오고 간 듯했다. 희연 또한 대략 그가 이곳에서 그녀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약간은 시원섭섭하고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희연에게 말했다.
“일단 신전으로 가서 퀘스트를 완료하도록 해요. 헬르벨과 헤어진 뒤 길드 성으로 돌아가서 인형을 고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공방으로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인형 공방이 아니라 마법사의 공방, 그러니까 공방주가 나예요.”
“아….”
직접 고친다는 거였구나.
희연은 쉽게 수긍했다. 부두 인형을 평범한 인형 공방에서 고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그 의미는 메리 인형을 만든 것이 킹스메이커 본인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가 인형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지분을 할애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본 킹스메이커는 정말로 인형에 폭탄 하나 정도는 집어넣었을 수도 있는 위인이었다.
희연은 부디 수리 과정에서 업그레이드라는 명목으로 인형 안에 폭탄 수가 늘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