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아, 혹시….”
희연은 문득, 킹스메이커가 처음 그녀를 길드 성으로 초대했던 말을 떠올렸다. 킹스메이커는 자신의 길드 성에 귀여운 것들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그때 당시 희연은 그녀가 말한 귀여운 것들이 온실에 있는 진짜 토끼와 꽃사슴을 말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 귀여운 것들이 눈앞에 인형들을 말한 거였나 싶어 희연은 그제야 안심했다. 킹스메이커가 직접 귀엽다고 설명한 이상 저주받은 부두 인형 군단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희연은 그제야 편안한 마음으로 인형들이 건네는 것을 받아주었다. 토끼 인형들은 희연이 찻잔을 잡자 조금은 힘들어 보이는 모습으로 차를 따라주었다.
기차에서 내려온 곰돌이 인형은 희연의 다리 위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고 강아지 인형은 쿠키 바구니를 쭉쭉 밀어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귀엽다….”
희연이 품 안에 곰돌이 인형과 강아지 인형을 쓰다듬어 주는 사이 인형 구경을 끝낸 악령이는 쿠키를 먹기 위해 바구니 쪽으로 날아갔다. 뒤늦게 인형을 예뻐한다고 질투하면 어쩌나 고민했던 희연은 먹을 것 앞에선 한없이 너그러운 그 모습에 속으로 안도했다.
다만 안타까웠던 것은 실체 없는 유령 상태의 몸으로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악령이는 힘껏 물었으나 잇자국 하나 나지 않는 쿠키를 보며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껏해야 둥근 눈과 십자 모양의 입이 전부인 얼굴로 그런 표정을 짓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악령이는 이전의 경험을 살려 빙의를 할 생각인지 인형 하나하나를 살피며 그 주위를 알짱거렸지만 끝내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했다. 힘껏 인형에 몸을 들이박아도 그대로 통과된 것이다.
메리 인형 같은 특수한 부두 인형에만 악령이가 빙의 가능하다는 결론만 나왔다. 곰 인형의 머리에 걸터앉은 악령이는 고개를 푹 숙였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시무룩해 보여 희연은 애써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이름 없는 악령 : 나는 이제 쿠키를 못 먹는 몸이 된 걸까….]
인생의 낙을 잃은 것인지 고심하는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희연은 나름 악령이를 위로했다.
“메리 인형이 고쳐지면 그때 먹으면 되지. 그때까지 나도 안 먹을게. 나중에 같이 먹자.”
희연은 악령이를 달래며 들고 있던 쿠키를 다시 바구니 안에 넣은 뒤 악령이 앞에서 빈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양이 인형이 손을 번쩍 들었다.
“?”
고양이의 본능이라도 있어 흔들리는 걸 쫓아오는 건가, 희연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생각보다 더 본질적으로 고양이의 본능을 닮은 인형은 희연이 예상 못 한 방향으로 힘껏 치켜든 손을 내리쳤다.
“어…?”
예고 없이 엎어진 쿠키 바구니에서 떨어진 쿠키는 얼마나 바삭하게 구웠던 건지 모두 손쓸 새도 없이 바사삭 부러졌다. 고양이 인형과 함께 열심히 바구니를 가지고 왔던 강아지 인형이 허망해 보이는 까만 눈으로 사건의 범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바구니를 냅다 엎어버린 범인은 그런 눈빛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게 꼬리를 살랑거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희연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사이 고양이 인형의 횡포는 계속되었다. 가만있던 곰 인형의 머리를 때리고, 토끼 인형들을 밀쳤다. 찻잔을 엎더니 조금 전 희연이 매달렸던 장식대 위로 폴짝 올라갔다.
“잠깐, 잠깐만….”
자리에서 일어난 희연은 조심조심 고양이 인형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양이 인형은 마치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장식대에 있던 유리 장식품 위에 앞발을 올렸다.
“그거…! 그거 건드는 거 아니야. 착하지… 그러지 말자….”
다른 인형들도 고양이 인형을 말리듯 장식대 밑에서 폴짝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모두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상황에 만족한 것처럼 고양이 인형은 장식품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흔들거렸다.
그에 안심한 희연이 한 발짝 걸어간 순간, 기다렸다는 듯 고양이 인형은 꼬리로 장식품을 밀어냈다.
쨍그랑-!
“…….”
희연의 눈앞에서 허무하게 떨어진 유리 장식은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산산이 부서졌다. 그 모습에 희연은 머리가 아파지는 것 같아 눈을 질끔 감았다.
킹스메이커에게 인형이 이랬다고 말하면 과연 믿어줄까? 그녀 본인이 만든 인형이 사고를 쳤다고 말하는 거였다. 희연은 자신의 발언에 신빙성이 있다 확신할 수 없었다.
온갖 걱정을 하며 부서진 유리에 차마 손도 못 대고 있는 희연을 비웃듯 사고 친 장본인인 고양이 인형은 장식대에서 내려오더니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희연은 다급히 소리쳤다.
“가지 마!”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고양이 인형에 비해 악령이는 정말 점잖은 성격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희연은 고양이 인형을 쫓아 복도를 뛰었다. 부서진 장식품 주위를 알짱거리던 인형들도 그런 희연의 뒤를 쫓기 위해 기차에 차례차례 올라탔다.
“어디 갔어!”
[이름 없는 악령 : 저쪽.]
모퉁이를 돌자마자 사라진 인형의 자취에 잠시 멈칫했던 희연은 악령이의 말에 따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복도, 계단, 층마다 있는 홀.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인형을 쫓던 희연의 체력이 바닥난 것은 세 번째로 계단을 오르던 도중이었다. 헉헉거리며 계단에 주저앉은 희연을 따라 난간을 타고 올라가던 기차도 운행을 중지했다.
비실거리며 고개를 들던 희연은 기차에서 손을 흔들거리는 인형들을 보며 회의감에 젖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쫓아가야 하나….”
차라리 킹스메이커에게 본인의 무죄를 증명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 희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계단 위에서 꼬리를 실랑이는 고양이 인형은 그런 희연과 달리 생생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에 희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포기.”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고양이 인형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코앞에 있었지만 더 이상 희연에게 남은 기력이 없었다.
자신을 놔두는 희연을 말똥말똥한 눈으로 보던 고양이 인형은 마치 애교라도 부리듯 희연의 팔에 몸을 치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희연은 이 추격전이 끝난 건가 싶어 잠시 방심했다.
[이름 없는 악령 : 앗…?]
“어…?”
무언가를 해볼 틈도 없었다. 희연은 순식간에 끌려가는 악령이를 보며 의미 없이 손을 뻗었다. 악령이의 몸에 둘린 사슬을 입에 물고 난간 밑으로 뛰어내리는 고양이를 따라 작은 유령의 몸이 부유하다 추락했다.
“아니, 진짜…!”
벌떡 일어난 희연은 난간을 붙잡고 허둥거리다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후방 운전은 안 되는지 기차에서 뛰어내린 인형들이 그런 그녀의 뒤를 쫓아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너…!”
고양이 인형은 마치 포기하지 말라는 것처럼 속도를 조절했다. 몇 번인가 손끝에 인형이 닿았다 놓치는 것을 반복한 희연은 슬슬 머리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희연이 악령이를 붙잡은 것은 어느 동상이 있는 방에서였다.
“잡았… 잡았다…!”
[이름 없는 악령 : 잡았다!]
내내 끌려다니기만 했으면서 나름 그 상황이 재밌었던 건지 희연에게 붙잡힌 악령이는 조금 신나있었다. 고양이 인형은 미련 없이 물고 있던 사슬을 놓았다.
“이제, 진짜 못, 뛰어…. 진짜 더, 못해….”
간절한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듯 말썽을 피우던 고양이 인형은 얌전히 앉아 어느 한 곳만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그 점을 인지한 희연도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방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그녀가 들어선 동상의 방은 큰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작은 편에 속했다. 오직 동상 하나만을 전시하기 위한 장소로 다른 눈에 띌 만한 것들을 들여놓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닥을 채운 알록달록한 돌 블록은 매끄러웠고 아기자기하기보단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창문 없는 방의 벽은 모두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그림 자체가 하나의 장식물 같은 아르누보 풍으로 덩굴 식물 그림이 주를 이루었다.
방의 유일한 장식물이라 할 수 있는 동상은 다른 곳과 달리 움푹 들어간 벽 안쪽에 세워져 있었다. 그 안쪽은 층고가 높았고 천장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하늘이 고스란히 보였다.
동상의 얼굴에 창을 통해 스며든 노을이 닿았다. 기다란 천이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어느 여인의 얼굴에 노을이 스미자 애틋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춤을 추는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은 흩날리는 천 자락과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이었다. 당장이라도 저 손을 잡으면 함께 춤을 출 것처럼 말이다.
희연은 한참 동안 그 동상을 감상했다. 만일 이 동상의 주인이 자신이었다면, 그녀 역시 이 동상만을 위한 방을 만들어주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와아….”
그녀의 감상은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 시간이 깨진 것은 악령이의 메시지가 시야를 가렸을 때였다.
[이름 없는 악령 : 소리가 나!]
“소리? 또?”
악령이는 희연의 물음에 직접 보여주겠다는 듯 날아오르더니 동상의 손등에 자리를 잡았다. 희연은 혹여나 사슬에 걸려 동상에 흠집이라도 낼까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름 없는 악령 : 여기서 들리는데. 이 밑에 있는데.]
“악령이 내려와! 어서!”
악령이는 희연의 손을 피해 요리조리 몸을 뺐다. 희연은 고양이 인형 다음은 악령이인가, 하고 생각하며 피로감을 느꼈다. 마침내 그녀가 사슬 끝을 붙잡은 순간, 동상도 희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 어?”
살며시 미소짓고 있던 동상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눈가를 가린 천 사이로 드러난 눈은 정확히 희연을 보았다.
“와아아악!”
깜짝 놀라 희연은 뒤늦게 비명을 지르며 잡히지 않은 손으로 동상의 손을 때렸지만, 그녀의 손을 잡은 동상은 손아귀의 힘을 빼지 않았다. 다리를 들어 매달리다시피 힘도 줘봤지만 섬세한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돕기 위해 밑에서 서성이던 인형들이 하나둘 그녀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물론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소속 확인이 완료되었습니다.]
“?”
동상의 눈이 도르륵 움직여 그녀의 앞섬에 꽂힌 백색 나무 브로치를 본 순간 그녀의 앞에 낯선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희연이 그 내용을 이해하기도 전, 돌로 이루어진 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몸짓으로 여인의 모습을 한 동상은 발을 내뻗었다.
동상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희연은 바닥에 디딘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벽을 박차며 몸을 트는 동상의 힘과 맞붙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힘 스텟의 주인이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흩날리는 옷자락과 머리카락. 춤추는 여인의 모습의 한순간을 포착한 동상이 생명을 얻어 실제가 되는 순간이었다. 노을빛 아래에서 춤추는 모습이 무척이나 우아했으나 동상에 매달려 끌려가는 희연은 보지 못하는 광경이었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동상이 빙글빙글 돌수록 그들은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하로 가는 비밀 통로.
희연은 뒤늦게 동상의 정체를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어느새 사방이 벽으로 막혔다. 완전히 지하로 내려온 것이다. 다행히도 동상은 지하에 도착하자 순순히 희연의 손을 놓아주었다.
신비롭다 느꼈던 돌 블록 장식이 사방을 막은 벽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마치 깊지만 아름다운 지하 우물에 빠진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이름 없는 악령 : 우와.]
태평히 감탄만 하는 악령이가 좀 밉다 생각하며 희연은 조심조심 동상의 손을 잡았다.
“반대쪽으로… 안 되네.”
희연은 동상의 손을 시계 방향, 반시계 방향 다 밀어보았지만 슬프게도 동상은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진지하게 벽을 타고 여기서 탈출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염없이 높다란 천장만 바라보던 희연은 고양이 인형이 가벼운 몸짓으로 뛰어 내려온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자진신고 하자.
희연은 킹스메이커에게 구조 요청을 보내기로 했다. 왜 거기 있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기는 했지만, 차라리 빨리 성을 헤집고 다닌 걸 사과하고 여기서 나가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일행은 그녀의 생각에 동의해 주지 않았다.
[이름 없는 악령 : 여기 문이 있어.]
“아니야. 그거 아니야. 무조건 아니야.”
우물 밑을 닮은 지하의 벽에는 새까만 문이 하나 있었다. 동상에게 강제로 끌려온 내내 희연이 애써 존재를 무시하던 문이었다.
손잡이가 없는 아치형의 문은 마치 새까만 페인트를 벽에다 덧칠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색 선정에서부터 수상함이 물씬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희연은 결코 그 문을 건들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지만 악령이는 계속 문 앞을 알짱거렸다. 악령이가 들었다는 소리의 근원지가 그 문 너머라는 걸 희연 또한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그 문을 모른 척하고 싶었다. 비밀 통로를 통해서야 들어올 수 있는 지하실에서 수상한 소리가 난다? 무조건 모른 척해야 한다. 그것이 희연이 내린 결론이었다.
문제는 이 자리에 평범하게 겁을 먹는 인간은 그녀 하나뿐이라는 점이었다. 악령이는 본인이 그 겁주는 존재였고 뜨개 인형들은 무서운 게 뭔지 모르는 존재들이었다.
겁도 없이 문 앞을 알짱거리는 작은 것들을 내려다보며 희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사건이 원흉이라 부를 수 있는 고양이 인형 또한 그 무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희연은 둥글둥글하니 귀여운 그 인형의 뒤통수를 보며, 킹스메이커는 어떤 사유로 저런 물건을 만들어 낸 것일까 심도 있게 고민해 보았다.
아무리 봐도 싫어하는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한 용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